이름: 바위솔
2007/8/27(월)
조회: 1870
Re..러일전쟁과 1907년 대부흥운동  
연표

1904. 2  러일전쟁 발발
1905. 5  일해군, 동해에서 러시아 발틱함대 격파
       7  미-일, 가쓰라 태프트 밀약 체결
       9  러-일, 포츠머드 강화조약 체결  ->> 러일전쟁 일본의 승리 끝남

1907. 1 평양 대부흥운동 전국으로 확산, 서북학회 결성
       5  이완용 내각 성립
       6 헤이그 밀사의 평화회의 참석 기도 좌절됨
       7 고종, 헤이그 밀사 파견을 이유로 강죄 퇴위
       8  조선군대 해산, 의병 전국확산
       11 대한자강회 후신으로 대한협회가 결성됨
       12 이승훈, 정주에 오산학교 설립


연표만 보면, 러일전쟁과 1907년 대부흥운동은 직접적 연관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대부흥운동은 190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사실상 1903년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 목사의 회개에서 출발한다. 하디의 회개운동이 1904년 원산 집회로 이어졌고, 평양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로 옮겨져 1097년 대부흥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1895년~1907년 사이에 기독교 인구는 530명에서 26,057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던 것이 09년에는 20만 명에 이르렀다. 어찌하여 이런 대부흥이 가능했는가? 선교사의 증언을 들어보자.


"기독교를 찾는 사람 중에는 그 중요 동기가 보호와 힘의 획득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좀더 정직한 동기라고 볼 수 있는 것은....기독교국이 대가 다 강대국인 것을보고, 그 고도의 문명과 문화에 끌려 전향하는 것이라고 보겠다." ---샤프(C.C. Sharp)

"(러일전쟁을 겪은) 마음의 불안정 때문에 한국인들은 여기저기 무엇을 찾아 지지와 보호를 받고 싶어한다....전 교회가 정치적 가능성이 있다....반일운동에 섞어져 빠져 들어가고 있다."---불(W.F.Bull)

"부실(不實)과 불순의 인사들이 교회에 모여들고 있다." _언더우드

"기독교에 돌아서는 최초의 개종자들의 기본적인 동기는 그 절대 다수의 경우 도덕적이요 정신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이요 정치적이다." _ 래드(G.T. ladd)


청일전쟁(1894~1895.4)에 이은 러일전쟁, 을사늑약체결(1905.10) 등으로 민중들은 극도의 불안감과 울분에 휩싸였을 것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고 나섰고 그 결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이때 서구 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는데 미국도 이에 동조했다. 블레어(William Blair)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까지도 영국이 했던 것을 본떠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고 나서는 것을 용납함을 볼 때 (한국인들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서 격렬한 척외정신이, 특히 반미정신의 물결이 전 국토를 휩쓸었다."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 사이에 서먹서먹한 관계가 생겼고, 장로교회는 첫 노회를 소집하여 교회의 권한을 인도받을 채비를 갖췄다. 이렇게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 가운데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아마도 러일전쟁이 대부흥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단 러일전쟁만이 아니라 그에 앞서 청일전쟁과 동학봉기, 고종강제 퇴위와 국권상실, 의병활동 등으로 이어지는 국가존망의 위기상황이 대부흥운동의 사회정치적 배경이 되고 있음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난을 당한 한국인들 자신의 전례없는 영적인 각성과 결집도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 참고한 책
<역사신문5 -개화기(1876~1910)>, 사계절
이형래, <예수를 배반한 기독교>, 일월서각
마서 헌트리, <한국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성장>(목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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