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위솔
2016/3/06
되찾은 말  
그들이 떠나간 뒤에,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한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께 데리고 왔다. 귀신이 쫓겨나니, 말 못하는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다. 무리가 놀라서 말하였다. “이런 것은 이스라엘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는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마태복음서 9:32-34>


숨통이 트이다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2일까지 무려 9일간,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쉴 새 없이 ‘무제한 토론’이 계속되었습니다. 시간으로 계산하면 모두 192시간 26분입니다. 이 긴 시간 동안 야당의 서른여덟 명 국회의원이 토론에 참여해 테러방지법 제정에 왜 반대하는지 자신의 의견을 밝혔습니다. 길게는 12시간 31분부터 짧게는 1시간 04분까지 경험담은 물론이고 신문기사, 논문, 서적, SNS 의견 등을 인용해 테러방지법이 얼마나 인권침해 소지가 큰 위험한 법안인지 자세히 알렸습니다. 평소 시청자가 별로 없는 국회TV가 이 무제한토론 방송으로 ‘마국텔’(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러 경로로 이 방송을 시청한 사람들을 다 합하면 2백만 이상이라고 합니다. 같은 주제로 한 사람이 무려 평균 5시간 이상씩 연속 말하는데도 그걸 보고자 국회 본회의장을 찾은 사람만도 수천 명을 헤아립니다. 이 토론방송을 본 국민들 가운데는 “국회의원들이 이처럼 똑똑하고 일을 열심히 하는 줄 미처 몰랐다”며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평소 열심히 좋은 법안도 만들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주류 언론에서 다뤄주지 않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국회의원들이 이번 기회에 진면목을 선보이자 놀란 것입니다. 저는 이 무제한 토론방송을 간간이 보면서 “저렇게 평소 하고픈 말이 많았는데 그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국회의원들이 국회 상임위원회나 본회의 때 발언하는 시간을 보면 대부분 한 번에 5-10분 정도가 고작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핵심을 전달하느라 진땀을 흘립니다. 그런데 단 한 번 밖에 할 수 없지만 모처럼 무제한 토론 시간이 주어져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쏟아냈으니 얼마간 후련하진 않았을까 싶습니다.

비록 테러방지법은 다수당의 횡포로 통과되고 말았으나, 이번 국회 무제한 토론으로 국민들이 그 법안의 문제점을 상당히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성과라고 봅니다. 무제한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국회 본회의장에는 자리를 지키는 의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야당 의원은 십여 명 남짓하였고 여당 의원들은 겨우 한두 명밖에 없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방청석만 대기자가 있을 정도 연일 가득 메웠습니다. 선거 국면이라 의원들이 선거운동으로 바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다른 당 의원의 이야기는 들을 가치가 없다는 진영논리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아홉 시간, 열 시간, 열두 시간까지 절절히 호소하는 의원이 있는데 정작 들어야할 사람들은 자리에 없는 나날이 지속되었습니다. 토론 마지막 며칠 전부터 국회방송 한쪽에 조그맣게 수화통역이 생겼습니다. 농인들의 요구가 있자 국회 사무처가 예산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는데 한 의원이 자원봉사자들을 주선하면서 어찌어찌 변통하여 정식 수화통역사를 배치했다고 합니다. 국회 사무처가 야권에 힘을 실어주고자 크게 인심을 쓴 게 아닙니다. 지난 2월 3일, 제정된 한국수화언어법이 톡톡히 한 몫 하였을 것입니다. 이 법령의 기본이념은 “농인과 한국수어사용자는 한국수어 사용을 이유로” “모든 생활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며, 모든 생활영역에서 한국수어를 통하여 삶을 영위하고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가 있다”(제2조)고 밝히고 있습니다. 작년 말 ‘한국수화언어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국내 35만(보건사회연구원 추산, 2013년) 농아인이 비로소 어려서부터 수어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까지도 수어교육과 상담서비스 등을 받는 길이 열렸습니다. 작년 6월 이 법령을 통과시켜 달라고 피켓시위를 하던 한 농아인의 피켓에 적힌 문구는 이랬습니다. “귀막히고 입막힌 채 한 평생 살아왔다. 수화언어법 제정하여 막힌 숨통 트여보자” “19대 국회를 역대 최악의 식물국회”였다며 비난하는 소리들도 있지만 이런 민생 법안 하나를 만든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평생 “귀막히고 입막힌 채 살아야” 하였던 농아인들의 소수 언어였던 ‘수어’를 정식 언어로 받아들였으니 말입니다.


말문이 열리니

분명 존재하지만 ‘투명인간’ 취급당하는 소수자들이 존중받고 편안히 살 수 있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걸을 수도 없고 귀신들려 온 정신을 차리고 살지도 없던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또 그는 이방인, 사마리아인, 세리, 창녀, 과부, 여성, 문둥병자라 차별받던 사람들의 든든한 벗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꿈꾸시던 하나님 나라가 바로 소외되고 억눌리고 차별받는 사람이 없는 복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으며 흥겹게 잔치를 벌이는 중인데, 한쪽 구석에서는 돌봐줄 부모가 없어 며칠째 밥을 굶는 한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잔치는 악마들의 파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도 없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 잃어버린 양을 찾아 가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바로 직전에 그분이 하신 일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마 4:23)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다음 절인 35절에서도 마태는 또다시 예수님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전해 줍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온갖 질병과 온갖 아픔을 고쳐 주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행적을 요약하는 거의 비슷한 말씀이 두 차례 반복됩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시작하시기 전에 한 번, 그리고 예수님이 열 가지 이적을 행하신 뒤에 한 번입니다. 이는 마치 여는 문과 닫는 문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마태는 이 말씀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강조합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시며, 온갖 질병과 아픔을 고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봐야할 점은 예수님께서 그저 말씀으로만 가르치고 선포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온갖 병으로 신음하는 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의 5-7장은 산상설교이지만 8-9장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열 가지 이적이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열 가지 이적의 균형을 맞추려하였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8-9장에 나오는 열 가지 이적 가운데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적만 빼면 모두가 귀신들리고 병들어 장애가 있거나 죽은 사람을 고치신 치유 이적입니다. 그 마지막 열 번째 이적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옛날 개역성경과 공동번역은 이 사람을 ‘귀신(마귀)들려 벙어리 된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새번역과 개역개정 성경은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라고 표현을 바꾸었습니다. ‘벙어리’라는 단어가 언어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비속어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고치기 전 예수님은 눈이 멀어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는 곧이어 귀신들려 말을 못하는 언어장애인을 고치십니다. 눈이 먼 시각장애인과 말을 못하는 언어장애인 가운데 누가 더 불편할까요? 둘 다 몹시 불편한 장애라 그 경중을 비교하기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요. 다만 예수님 시대였다면 언어장애인이 훨씬 살기가 더 힘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당시에는 ‘수어’라는 공용어도 없었고 대부분이 문맹이라 문자로 소통하기도 불가능하였을 터이니 말입니다. 생각과 느낌은 있는데 딱히 그걸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오죽이나 답답하였겠습니까? 차라리 눈이 안 보이면 다른 사람 눈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면 되겠으나 언어장애인의 경우는 매사에 소통이 힘들어 짐승 같은 삶을 강요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천성 언어장애라면 차라리 그러려니 하고 살겠으나 후천성이라면 감내하고 살기 너무 퍽퍽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치신 ‘귀신이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이 언제부터 언어장애를 입었는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나이는 몇 살이고 집안 배경은 어떤지 아쉽게도 본문은 전혀 말해 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귀신이 쫓겨난 뒤 그가 말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무슨 말을 하였는지조차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치유 사건 한 가지만 하더라도 다루어야할 내용이 적지 않았을 터인데 마태는 불과 두 절만으로 치유 과정을 간결하게 처리하였습니다. 본문 내용만으로는 이 언어장애인이 ‘귀신이 들려 말을 못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후천성 장애인 같다는 사실 정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아동문학가 이현주 목사님의 경우 1967년 춘천에서 군대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져 근 한 달간 깨어나지 못했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었던지 기적처럼 깨어났으나 또 한 달간이나 말을 할 수 없었고 겨우 말을 다시 배웠다고 합니다. ‘결핵성 뇌막염’이란 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만난 이 언어장애인도 어느 날 갑작스레 말을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보통 귀가 안 들리면 말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 못하는 사람’으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κωΦόζ)는 ‘듣지 못하는 사람’과 ‘말 못하는 사람’ 둘 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말 못하는 사람’으로 번역된 까닭은 그가 고침 받았을 때 ‘귀가 다시 들렸다’는 언급은 없고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귀는 들렸으나 말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지요. 그는 말문이 트이고 나서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진리를 말하라

이 사람이 고침을 받자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먼저 주변 사람들은 “이런 것은 이스라엘에서 처음 보는 일이다”며 놀라워하였습니다. 반면 바리새파 사람들의 경우, “그는 귀신의 두목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며 이 사건을 빌미로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똑같은 이적을 보고도 이처럼 반응이 크게 엇갈립니다.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권능에 놀라워하고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그분에 대한 악성 루머를 만들어 퍼뜨립니다. 누가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믿지 않다가 요한이 기적적으로 태어날 때까지 한동안 벙어리가 되었다고 전해줍니다. 마침내 요한이 태어나 그의 혀가 풀렸을 때 사가랴는 “말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눅 1:64)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혀로 이처럼 주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진리를 선포하지는 못할망정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를 훼방하고 이웃에 대해 저주의 악담을 퍼붓는다면 그 입은 ‘열린 무덤’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같은 입에서 어찌 찬양과 저주가 나올 수 있느냐며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듯”(약 3:11)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형제자매의 입도 정화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있는 세 부류의 사람을 발견합니다. 한 사람은 오랜 세월 말할 수 없다가 드디어 말문이 트인 사람이고 나머지는 그 주변에서 이 사람이 고침 받은 이적에 놀라워하는 구경꾼들과 예수님이 귀신 두목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쫓는다며 악담을 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 사람입니까? 올바른 말이 말 값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우리가 먼저 ‘진리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 회복을 위해 날마다 더욱 힘쓰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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