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8/4(목)
변화의 시작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되어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들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그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베드로와 그 일행은 잠을 이기지 못해서 졸다가, 깨어나서 예수의 영광을 보고, 또 그와 함께 서 있는 그 두 사람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예수에게서 막 따나가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지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 세 사람을 휩쌌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아들이요, 내가 택한 자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 소리가 끝났을 때에, 예수만이 거기에 계셨다. 제자들은 입을 다물고, 그들이 본 것을 얼마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누가복음서 9:28-36>


여행의 출발선

예수님은 나그네, 곧 여행자이셨습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한 뒤부터 줄곧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한곳에 터 잡고 오래 머무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어떤 학자들은 그리스의 견유학파 철학자에 견주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영향을 받아 무소유의 삶을 살면서 지혜의 교사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는 견유철학자들의 생활방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그는 세상을 관조하는 지혜의 교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그 나라를 이루고자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셨습니다. 귀신들림, 굶주림, 차별, 억압에 시달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상담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직장에 매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사람들은 어느 날 다 내려놓고 먼 나라 여행이나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간혹 실제로 그렇게 떠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새장에서 벗어난 새처럼 자유의 기쁨에 들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마냥 즐거울 겁니다. 하지만 어느덧 여비가 다 떨어지고 여행이 오랠수록 하루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 않을까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라고 왜 그런 바람이 없었겠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여행자 예수의 회한과 힘겨운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데도 그는 편한 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으시고 복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네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은 여행자 예수님을 가장 자세히 그려 줍니다.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는 예수님과 그 일행의 여행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열두 제자와 일흔 두 명의 제자를 여러 마을에 파송하십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도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신 사건은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일흔 두 명의 제자를 파송하신 사건은 누가복음서에만 적혀 있습니다(눅 10:1-12). 누가복음이 얼마나 예수님의 선교여행에 관심이 많았는지 이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명하신 내용은 내동소이합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는 “지팡이도 자루도 빵도 은화도 가지고 가지 말라.”(눅 9:3)고 하셨고, 일흔 두 명의 제자를 파송하실 때는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라”(눅 10:4)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짐이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지시나 다름없습니다. “먹을 것도, 돈도, 신발도 없이 어떻게 여행을 하란 말이냐”고 당장 볼멘소리가 터져 나올 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여행 원칙은 철저한 ‘현지 조달’입니다. 이 모든 것을 현지에서 얻으려면 가난한 민초들의 마음을 얻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어려움을 보살펴주고 함께 울고 웃는 가운데 그 노고를 인정받아 잠자리나 먹을 것을 얻으라는 차원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갈릴리와 유대 온 지역을 쏘다니시진 않습니다. 전반부는 주로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변화산 사건은 갈릴리 지역의 선교 사역을 마무리하시고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떠나시기 위한 일종의 분기점에 해당합니다. 말하자면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도정의 출발선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얼굴의 변화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눅 9:23)는 당부도 이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님의 길을 재촉하는 하나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전과 달리 자신이 겪을 고난과 죽음, 부활을 제자들에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까닭은 이제 그들도 알아들을 만한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는 첫 번째 수난예고를 하신 지 ‘여드레쯤 되어’ 세 명의 핵심 측근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엿새 후’라 했는데 누가만 ‘여드레’라고 하루 차이가 납니다. 세 복음서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의 얼개는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조금씩 다른데 그중에 누가복음 내용이 유난히 다릅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세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뚜렷한 목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용으로 미루어 예수님이 그들에게 자신의 영광스런 변모를 살짝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반면 누가는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고 그 등산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앞서 누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기 바로 직전에도 예수님이 홀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눅 9:18). 또한 예수님은 세례 받으신 뒤에도 기도하십니다(눅 3:21). 제자들을 세우실 때도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눅 6:12).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영광의 변모를 하시러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게 아니라 ‘기도’를 위해 가셨고 실제로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그가 ‘기도’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무슨 마술적 방법으로 변화하신 게 아니라 ‘기도’로 변화되셨음을 알려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인간의 변화 경영을 연구한다는 모 단체의 누리집에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도발적 제목의 칼럼을 읽어본 적 있습니다. 그 글쓴이는 매니저 교육을 받을 때 “사람을 채용해 변화시키려 허송세월 말고 성공의 DNA를 가진 유능한 인재를 채용하라”고 배웠답니다. 처음에는 이 절대명제를 거부하였으나 지내놓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아울러 그는 “사람을 변화시키려 애쓰지 말고 그 사람에게 이미 있는 것을 밖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덧붙입니다. 그마저 쉽지 않다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변화시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고된 훈련을 받아 변화했다는 사람도 얼마쯤 지나면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성품과 기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인간의 변화는 거의 불가능하니 변화를 시도하거나 꿈꾸지 말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충분히 변화가 가능하고 변화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도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 변화가 불가능한 게 아니라 어떻게 변화해야하는지를 잘 모르고 꾸준히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을 뿐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도중에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눅 9:29)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어떻게 해야 변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열쇠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변화하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깊이 성찰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가운데 존재의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힘과 의지로는 악한 습성을 변화시킬 수 없으나 주님께 겸손히 간구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할 때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휘어잡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꿔주십니다. 우리말에 ‘겉볼안’이란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안”이란 줄임말입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속을 드러낸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물론 ‘포커페이스’란 말도 있고 얼굴만으로 다 판단하긴 힘들지만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강 알 수 있는 건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기도 중에 ‘얼굴 모습이 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도 시내 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 뵙고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구하는 사람은 그 얼굴이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新엑소더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세 제자들은 잠을 이기지 못해 졸았다고 했습니다. 그 사이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자신의 ‘떠나가심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여기서 ‘떠나가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엑소도스’입니다. 이 말은 “앞으로 나아감”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의 죽으심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상의하셨을까요?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장례를 치렀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당연히 그런 사정이 작용하였을 겁니다. 하지만 앞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자, 그들이 “엘리야와 옛 에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 답했는데 그 내용도 관련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세 제자는 졸음에서 깨어나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서 대번 모세와 엘리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게 어찌 가능하였을까요? 그들이 모세와 엘리야의 얼굴을 한 번도 직접 본적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물론 누가는 그런 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화가 앞으로 있을 부활사건의 예고편이라는 사실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 중 하나로 인식하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처럼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지니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새로운 엑소더스를 감행하십니다. 즉 죽음을 넘어 부활로 나아가는 진정한 변화의 첫 걸음을 떼셨습니다. 죽음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는 영광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 곧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엑소더스, 곧 십자가 고난을 거쳐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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