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8/4(목)
성령의 사람  
예수께서는,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그것을 펴시어, 이런 말씀이 있는 데를 찾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은 예수께로 쏠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은혜로운 말씀에 놀라서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누가복음서 4:16-22>


성령체험의 열매

 수년 전부터 한국교회에서 새롭게 각광받는 은사운동이 두 가지 있습니다. 방언과 치유가 그것입니다. 방언 은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계기는 김우현 감독의 ‘하늘의 언어’(2007)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부터입니다. 치유 은사의 경우는 온누리교회 손기철 장로가 각종 치유집회를 이끌면서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방언과 치유 은사는 기도원이나 부흥집회, 혹은 오순절 계통 교회들 같은 데서나 많이 강조하고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사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시대 변화에 발맞춰 더 세련된 형태로 교회 대중 속에 파고드는 것 같습니다. 김우현 감독은 KBS에서 인간극장, 현장르포 등을 다수 만든 PD 출신이고 손기철 장로는 현재 건국대 생명과학대학 교수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분들의 스펙을 보고 더 신뢰하여 큰 호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사실 ‘방언’과 ‘치유’ 같은 성령 은사는 초기 교회에서 이미 나타났을 정도로 그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오늘날에야 비로소 나타난 영적 은사가 결코 아닙니다. 또 어떤 특별한 은사자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가 필요로 하는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는 영적 능력도 아닙니다. 방언과 치유는 성령의 여러 은사 가운데 일부일 뿐입니다. 이런 은사체험을 하지 못하였으면 마치 성령체험을 못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거짓입니다. 성령은 방언과 치유라는 두 가지 은사 현상으로만 체험하는 게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훨씬 더 광범위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모든 자들은 이미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존재합니다. 꼭 방언을 하고 병을 치유해야 성령 받은 게 아닙니다. 방언과 치유가 가장 큰 성령의 은사라면 다국어 구사자나 의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가장 성령 충만한 사람일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영적 은사체험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방언, 신유, 예언”이어야만하는 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이웃사랑하기를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합니다. 가르치고, 섬기고, 찬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등의 은사들도 방언, 신유, 예언의 은사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이 같은 은사도 모두 영적 은사에 속합니다. 저는 신비한 영적 은사를 지녔다는 사람들을 주의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설령 그들이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여도 그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마 7:21-23) 누군가가 당장 우리 눈앞에서 신비하고 놀라운 능력을 행한다고 거기에 혹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인지 여부를 잘 살펴봐야 합니다. 그가 자신의 영적 능력으로 무슨 열매를 맺었는지를 보십시오. 악마도 이 세상을 지배하고자 그의 능력을 천사의 것처럼 교묘히 위장하여 어리석은 사람들을 얼마든지 미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맺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 의로움과 진실함”(엡 5:9)이라 했습니다. 성령의 열매들(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의 성령체험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위에 임하였다고 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물에 잠겼다가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자기 위에 비둘기 같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고 하였습니다. 반면 누가는 조금 다른데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그의 위에 내려왔다고 묘사합니다. 기도야 세례 받는 도중에 하실 수 있는 일이므로 큰 차이는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아주 특별한 순간에 성령체험을 하신 건 아님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가 특별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수 있겠으나 세례의식 자체가 성령의 임재를 불러오는 특이한 종교의식이라 말하긴 힘듭니다. 예수님은 성령체험을 하고자 100일 작정 기도를 하신 것도 아니고 오랫동안 금식하며 지내시지도 않았습니다. 평범한 종교의식에 참여하던 도중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장면을 보면 그분이 성령을 부르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계시처럼 내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예수께서 전혀 원치 않았는데 성령이 그에게 임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성령을 마그마에 비유합니다. 이미 각 사람 속에 성령이 분출할 틈을 찾는데 그 틈새가 있다면 화산처럼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그 위에 임재하신 건 그가 성령을 받으실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시종일관 성령의 활동을 매우 강조합니다. 가령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예고를 보면 “그는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령을 충만하게 받을 것”(눅 1:15)이라 합니다. 마리아는 성령이 임하여 아기 예수를 임신하였고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눅 1:41, 67). 예루살렘 성전의 시므온이란 경건한 노인도 성령이 그 위에 임하여 있고 성령의 지시와 인도를 받는 사람으로 나옵니다(눅 1:25-26).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 누가복음은 한 배 이상이나 성령을 더 자주 언급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다음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결과, 예수님은 영적인 권능을 지닌 분으로 널리 소문이 났고, “유대 사람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으며 모든 사람에게서 칭송”을 받으십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이전과 이후의 예수님 모습이 사뭇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이전에 이미 유대의 여러 회당을 돌며 가르치셨고, 신비한 권능을 행하셔서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분이 여러 회당을 돌며 가르치기 시작하신 시기는 공생애 초반부터입니다.


성령으로 살라

누가는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에 돌아와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짤막하게 그의 초기 사역을 요약해 전해줍니다. 그 다음 곧장 예수께서 그의 고향 나사렛 회당을 방문하신 장면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고향 방문을 공생애 초반에 배치하지 않습니다. 유독 누가만이 광야의 사탄 시험 이후 얼마 안지나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을 가신 것처럼 그려놓았습니다. 더욱이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을 가신 장면을 보도할 때 그가 회당에서 설교하신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로지 누가만이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어떤 설교를 하셨는지를 알려줍니다. 이는 누가가 예수님의 첫 출발이 어땠는지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음을 드러냅니다. 특히 그는 예수님이 그분의 고향 나사렛에서 하신 설교가 공생애 전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중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년이 되면 사람들은 각 나라 지도자의 신년사나 담화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행간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합니다. 그게 한 해 동안 나라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보여주는 밑그림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가가 성령의 능력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온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 설교를 주목한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나사렛 회당 설교를 보면 그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대강의 윤곽을 잡을 수 있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취임사나 다름없는 첫 설교의 본문을 이사야 61장 1-2절을 택하여 읽으셨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이사야서 말씀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이사야서 61장 1-2절에는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라는 대목이 없습니다.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에 대한 말씀은 이사야 58장 6절에 나옵니다. 하지만 그 말씀에도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한다”는 대목은 없습니다. 또한 이사야 61장 2절에는 ‘주님의 은해의 해’ 곧 ‘희년’만 나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라는 문구가 곧바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볼 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서 말씀을 조금 변형하여 필요한 대목만을 간추리고 덧붙여 설교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사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를 덧붙이고 불필요한 내용은 제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모두에게 희년을 선포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이라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의 성령체험이 어떠한 형태의 열매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체험을 하였다는 사람 중에 어떤 분들은 간혹 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세계로 도피하고 은둔하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 먼 자, 압제 당하는 자, 희년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밑거름이 되고자 하십니다.

밀러라는 학자가 각 사람의 종교체험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연구한 적 있습니다. 그는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를 돌며 관찰한 뒤, 종교체험을 할수록 사회참여가 줄어든다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체험을 한 사람일수록 정치에 민감하고 고아, 과부, 미혼모, 빈민 등 가난한 자들을 헌신적으로 돕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예수님은 그의 갈릴리 나사렛 회당 첫 설교로 자신이 장차 어떠한 사회를 그릴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델을 보면 성령을 받은 사람이 특히 앞장서서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라.”(갈 5:25)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살면서 예수님을 삶의 모델로 닮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들에게 복음, 해방, 눈뜸, 자유를 선포하고 희년을 이루는 삶을 사셨듯이 우리 또한 그러해야합니다. 성령체험을 한 사람들답게 늘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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