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1/17
공공선을 위하여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다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지만, 섬김을 받으시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성과는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 주시는 것은 공동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1-11>


건너온 사람들

한국교회 선교 초기에 개종한 분들 사례를 보면 교회 다니기 시작하였다고 오랜 종교 문화적 생활 습성이 금방 돌변하진 않습니다. 사람 습관이란 여러 날에서 수년간이나 몸에 익은 건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루아침에 변하기란 매우 힘든 일 아닙니까. 대표적인 인물이 한국 최초의 부흥사로 알려진 길선주 목사입니다. 그는 무관 집안에서 태어나 네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한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열일곱 살에는 몸이 아파 휴양차 절간에 들어가 지낸 적 있고, 열아홉부터 십년간은 차력술, 변신술 따위를 배우며 선도 수련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기간 중에 한 삼년은 관우장군을 모시는 관성교에 빠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유, 불, 선에 무교까지 두루 맛본 뒤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 길선주 목사였습니다. 그는 평양 장대현 교회를 담임 목사로 있으면서 새벽기도회를 시작해 대부흥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만 번이나 읽어 줄줄 외다시피 하였고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가지고 말세론을 펼치며 각처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습니다. 한데 그가 시작한 새벽 기도회는 불교의 ‘새벽 예불’의 영향이고 요한계시록 만독과 암송은 서당식 한학 공부의 영향 때문이라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굳이 길선주 목사가 아니라도 옛 어머니들이 새벽에 물 한 그릇 떠놓고 장독대에서 치성을 드린 일은 한국의 아주 오랜 종교 관습이었습니다. ‘성경 암송’의 전통도 서당에서 천자문부터 암송하기 시작하여 사서삼경을 밤낮 암송하던 전통에서 자연스레 나왔음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종교는 이웃종교들의 의례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마련입니다. 몸은 그대로지만 옷은 얼마든지 바꿔 입을 수 있는 거와 비슷합니다. 각 종교의 근본 가르침은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담는 그릇은 때와 필요에 따라 변경이 가능합니다.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그의 책 <인도의 길을 걷는 예수>에서 이미 무수한 종교가 번성하는 인도에 그리스도교가 줄 수 있는 독특한 게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인도는 세계 종교의 본산이라 할 만큼 위대한 성자, 사원, 종교의식, 종교사상 등 다양하고 찬란한 종교 문화를 꽃피운 나라입니다. 이런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무슨 새로운 것을 선물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가 들만도 합니다. 하지만 존스는 다른 건 모두 인도에 있다 해도 없는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임을 일깨워 줍니다. 종교의 외형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그렇게 변화해왔습니다. 문제는 그 중심에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화려한 예배당에 근사한 성가대의 찬양, 교양 넘치는 목사의 설교가 있다고 하여도 그 예배 가운데 예수님의 복음이 빠져 있다면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반대로 종교 자유가 없는 북한에서 변변한 예배당도 없고 설교도 없지만 서너 사람이 어느 집에 은밀히 모여 주님께 예배드린다면 그곳은 주님이 계시는 교회임이 분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끌려다녔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집필하였을 당시 고린도교회는 생겨난 지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신자 대부분이 고린도에 번성하던 이방종교에 빠져 지내다가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를 믿고 찾긴 하여도 우상숭배를 하던 이교의 습성이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건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엔 아직 결함이 많았습니다.


하늘의 선물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여 급성장한 교회입니다. 많은 사람이 갖가지 동기와 사연을 안고서 교회로 몰려든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에 따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처음 교회 나올 때의 처지를 보면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훈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전 1:26)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강하고 지혜롭고 잘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비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다(고전 1:27-28)고 말합니다. 다름 아닌 고린도교회를 염두에 둔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의 성도들 구성을 보면 출신이나 사회적 신분, 학벌, 재산 등에서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부 성도들 중에 상류층 사람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절대 다수는 가난한 하층민이나 서민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오순도순 지냈느냐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사정상 교회를 떠난 뒤 고린도교회는 내부의 온갖 문제들로 분란을 겪는 중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영적 은사에 따른 혼란과 소동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영적 은사를 사모하는 교회였습니다. 언뜻 좋은 일처럼 보입니다. 영적 은사를 추구하며 그 은사들로 바르게 사용만 한다면 교회가 지역을 살찌우며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초기 예루살렘교회 모습이 그러하였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났고” 신도들이 공동생활을 하며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곤 하자” 사람들이 교인들을 좋아하였다(행 2:43-47)고 했습니다. 전도, 예배, 교제, 구제가 적절히 어우러지자, 교회가 사람들의 칭송을 얻으며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고린도교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은사를 지닌 성도들이 있었으나, 서로를 존중하며 적절한 역할 분담을 하여 질서 있게 교회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기는커녕 파벌이 나뉘어 싸우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다들 훌륭한데 모아놓으면 모래알처럼 잘 뭉쳐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영적 은사를 마치 자신이 본래부터 지닌 능력이나 된다는 듯 착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남들에게 없는 영적 은사가 있음을 내세워 교회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은사’(카리스마타)는 아무런 공로 없이 성령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세상의 영이 주는 능력과는 차원이 다름을 강조합니다(고전 2:12). 각 사람이 잘나거나 예뻐서 갖게 된 게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께서 은혜의 선물로 나눠준 게 ‘은사’라는 겁니다.


모두를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다”(고전 12:3)고 말씀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씻어내기 위함입니다. 그 당시는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만으로도 죽임을 당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숭배 공공연히 행해졌고 그 황제만이 ‘구세주’이자 ‘주님’이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때입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고백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놓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바울은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고서는 애초 불가능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형제자매가 서로를 불신하고 시기와 갈등을 일삼는 것은 잘못임을 깨우쳐 줍니다. 과거 우상의 종노릇하던 자들이 예수의 사람이 되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고 고백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이고 감사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서로를 헐뜯고 시기하다 못해 파벌로 나뉘어 으르렁대며 싸우니 멀리서 그런 소식을 듣는 바울의 심경이 오죽 했을까 싶습니다.  

그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아홉 가지의 다양한 은사를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신유의 은사, 믿음, 권능의 활동,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 통역 등이 그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데 이런 은사가 있다고 하여 다른 성도보다 지위가 높아지거나 군림하라는 건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모든 은사는 “성령께서 나누어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주실 때 성도 각자 자신을 위한 잇속이나 챙기라고 주신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 주신 목적을 “공동 이익을 위한 것”(고전 12:7)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즉 성령의 은사는 사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선을 위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정치인이 권력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사적인 잇속이나 챙기는데 사용한다면 그 나라가 어찌되겠습니까? 대기업 총수가 많은 부를 축적해 사회에 어찌되든 말든 그 재물로 자자손손 누리고 사는 데만 골몰한다면 어찌될까요?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며 교회와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대신 교회를 사유화해 자신의 왕국처럼 만든다면 어찌되겠습니까? 그런 사회는 매우 불행하고 끔찍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 성도들의 은사가 공공선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교회 성도들의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각양 은사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공공선에 대한 추구’가 크게 약화되어 있습니다. 세상이야 어찌되든 말든 나 자신과 내 가족만 잘 먹고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습니다. 교회들도 서로를 세워주고 사랑으로 격려하지 않고 잘났다고 경쟁하느라 시기, 다툼,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각자의 이익에 매몰된 삶을 살라고 선물하신 게 아닙니다. 그 은사로 서로를 섬기며 더불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은사를 공공선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이 땅에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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