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3/19(토)
사람의 빛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요한이었다. 그 사람은 그 빛을 증언하러 왔으니, 자기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요한복음서 1:1-12>



빛을 찾다

 새해를 맞아 우리 주님의 은혜와 진리의 빛이 여러분 모두에게 늘 가득하길 바랍니다. 매년 새해 첫날이면 ‘해돋이’를 보고자 전국의 수많은 사람이 추위를 마다 않고 새벽부터 산으로 바다로 나가 기다립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 거리에 차량도 많고 낚시가게들은 붉을 환히 켜놓고 여전히 영업 중이었습니다. 바닷가에서 낚시하며 해돋이 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러는가 봅니다. 어제 본 해나 새해 첫날 맞는 해나 별로 다를 바 없을 텐데 왜 굳이 한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보려고 사서 고생을 할까요? 평소 분주한 생활을 하느라 ‘해돋이’나 ‘해넘이’를 보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새해 첫날 해돋이를 보며 마음의 소원을 빌고 한해를 힘차게 시작해보려는 생각도 있겠지요. 인간을 비롯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햇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등에서 오랜 세월 태양신 숭배가 성행한 까닭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햇볕을 빛의 원천으로 보지 않습니다. 가령 시편의 한 시인은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시 36:9)라고 고백합니다. 또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시기 때문에” “해나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다”(계 21:23)고 합니다. 만물을 비추는 태양조차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리거나 밤이 오면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뚜렷한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빛으로 우리를 밝혀주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모든 빛의 원천이라 말합니다.

19세기 후반 경기도 고양읍에 ‘백장님’(본명, 백사겸 1860-1940)이라 불리는 유명한 점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아홉 살 때 눈병으로 장님이 되자 거지생활을 하다가 4년간 점술을 배워 열다섯 살부터 23년간 점술가로 살았습니다. 그동안 개성, 평양, 서울, 이천, 원주 등지를 떠돌며 복점을 쳐주고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숱한 점술가들이 활동하였으나 백장님은 그 중에서도 가장 용하다고 소문난 점쟁이라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고양읍에 정착해 결혼도 하고 대궐 같은 집에서 살며 계속 점을 쳤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던 때라 온갖 미신이 번성하고 신흥종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백성들의 궁핍과 불안은 날로 극심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백장님은 빼어난 직관과 눈치, 화술로 가난한 사람들을 점술로 속여 큰 재물을 모은 것입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행하는 점술에 대해 양심의 큰 가책을 느껴 고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손님은 사십 전후의 가난하고 한 많은 아낙들이었습니다. 백장님은 그들에게 병점, 재수점, 신수점 따위를 빌미로 겁을 주거나 속여 많은 재물을 모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고아들을 데려다가 키우기도 하고 진정한 복술의 이치를 깨닫고자 부지런히 공부도 해보았습니다. 무려 18년이나 새벽마다 매일 주문을 외고 천지신령을 찾으며 치성을 드려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정성을 들여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마지막으로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백일기도를 마치던 날 어떤 매서인 곧 성서를 보급하며 전도하는 사람이 찾아와 “예수 믿는 도리를 적은 전도지”라며 소책자를 건네고 갔습니다. 당시 백장님은 기독교를 ‘사교’ 쯤으로 알았기에 그 전도지를 장롱 속에 쳐 박아 두게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는데 그 전도자가 또다시 찾아와 간절히 기도를 해주고 떠났습니다. 그날 백장님은 비몽사몽간에 하늘나라에 올라가 예수를 만났고 예수님이 건네는 은산통(*산통이란 점쟁이가 점칠 때 산가지를 넣어두는 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예수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백장님 곧 백사겸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그의 점술책들을 모두 불살랐습니다. 점술로 모은 모든 재산도 헐값에 처분해 3천 냥이 생기자, 그것을 어찌할지를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강도가 들어 그 3천 냥을 빼앗아갔습니다. 백사겸은 이 일을 주님께 감사하였고 그날부터 걸식 전도자 생활에 나섰습니다. 아내에게도 이혼을 요구하며 자유롭게 살라고 하였으나 아내는 끝까지 함께 하겠다며 떠나지 않았습니다. 백사겸의 이 놀라운 변화에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였지만 교인들은 이 ‘조선의 삭개오’에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의 간증을 들으려는 교회가 쇄도하였습니다. 얼마 뒤 백사겸은 감리교에서 공식 전도자로 임명받았고, 팔십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전도자 생활을 하며 무수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육신은 장님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진리의 빛을 본 사도 바울과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덕주, 『새로 쓴 개종 이야기』45-57쪽 ; 연규홍, “점쟁이 이름 날리다 방랑 전도자로: 백사겸(白士兼)” 「새가정」, 1994. 59-61쪽 참고)


생명의 빛

 요한복음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가 예수님께 고침 받아 눈을 뜬 한 청년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이 청년이 앉아 구걸하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 이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눈먼 상태로 태어났습니까?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덧붙이시기를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 9:3-5)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태생 맹인인 청년의 눈을 뜨게 해주심으로써 자신이 생명의 참 빛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영적으로 맹인인 사람들의 눈을 띄워 밝히 보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요 8: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빛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가려진 마음의 눈이 성령의 조명으로 환히 뜨여야 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 4:6) 밖에서 태양이 아무리 환한 빛이 비추더라도 방에 검은 커튼을 치고 있다면 그 방은 캄캄한 어둠이 계속될 것입니다.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훤한 대낮이라도 어둠만 계속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듯 예수님의 빛을 차단하던 우리 마음의 모든 커튼들이 걷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진정 온 세상을 비추는 생명의 빛이자 진리의 빛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의 서문에 해당하는 ‘로고스 찬가’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은 산문이 아니라 시처럼 운문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마치 시처럼 여러 은유로 압축해 웅장히 노래합니다. 저자는 ‘아르케’ 곧 ‘세상의 시초’부터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문구는 “하나님의 곁에 계셨다”는 번역도 가능합니다. 즉 로고스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혹은 그 곁에 계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그런데 곧이어 “그 로고스(말씀)은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곁에 계셨다”고 하더니 “그가 하나님이셨다”는 건 또 무슨 말씀일까요? 로고스 자체가 하나님과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로 이해하면 됩니다. 가령 여기 손이 있지만 이 손이 곧 내 몸인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로고스 예수는 하나님과 뗄 라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이시기에 자의적으로 행동하실 수 없고 하나님께 들은 대로 말씀하고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로고스 예수를 통해 세상 만물을 지어내시고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예수님의 빛은 ‘사람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빛이 사람들 가운데 비치자, 어둠이 그 빛을 “‘제치지’/‘이해하지’/‘붙잡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어둠은 이 세상의 통치자인 악마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그 속에 있는 자들은 예수의 빛을 “제치지도, 이해하지도, 붙잡지”도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 속에 참 생명이 없습니다.


빛의 자녀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너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 다녀라.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다니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 12:35-36) 예수님의 빛은 구원과 진리, 생명의 빛입니다. 또한 그 빛은 무엇보다 ‘사람의 빛’입니다. 자연 만물을 비추는 태양 빛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을 받아 빛의 자녀가 되지 않은 사람은 캄캄한 어둠을 헤매는 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자신의 욕심을 가득 채우는 삶을 살지라도 장님 백사겸처럼 마음의 어두움과 공허감은 깊어만 갈뿐입니다. 그 마음에 예수의 빛을 가득 받은 사람이라야 비로소 삶의 온갖 폭풍과 어둠이 걷히고 기쁨과 평안이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롬 11:36)고 찬미하였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참 주인을 찾은 사람의 깨침이자 고백입니다. 사람의 빛, 소망의 빛,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가득 받아 주변 사람들에게 비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등대처럼 나아갈 길을 성실히 안내하는 금년 한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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