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3/19(토)
비범한 아이  
예수의 부모는 해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도, 그들은 절기 관습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런데 그들이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의 부모는 이것을 모륵,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 뒤에 비로소 그들의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여,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는데,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날라서,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였다.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예수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그들에게 순종하면서 지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 <누가복음 2:41-52>



말썽 피는 소년

복음서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대해 거의 침묵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자세히 보도한 점에 비춰 보면 의외입니다. 물론 복음서는 전기가 아니므로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굳이 기록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아동, 청소년 시절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공생애 기간의 사생활도 일체 알려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 복음과 행적의 전달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기 예수가 태어난 뒤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몹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어린이는 평소 친구들과 무슨 놀이를 하였고 공부는 열심히 했는지,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은 잘 듣는 아이였는지, 혹시 사고는 치지 않았는지 등 궁금한 게 많습니다. 우리의 많은 궁금증을 잘 안다는 듯, 누가는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유월절에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에피소드 한 토막을 전해 줍니다. 감질나게도 겨우 열두 살 때의 일화 하나뿐이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아예 없는 다른 복음서들보다는 낫습니다.  

한데 누가는 왜 다른 나이 때는 놔두고 열두 살 소년 예수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일까요? 그 무렵 예수가 보인 이상한 행동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오래도록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마리아는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유월절에 벌인“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다”(눅 2:51)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미운 열두 살’이란 말이 있듯, 열두 살은 사춘기가 막 시작되는 나이입니다. 본격적으로 부모님 속을 썩이기 시작하는 나이이지요. 더욱이 예수님 시대 유대 사회에서 열두 살은 막 어른의 문턱을 넘는 분기점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경우도 예수를 임신하였을 때 나이가 열두 살이나 열세 살 무렵일 것이라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소년 예수는 드디어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제 길을 걷고자 암중모색하며 과감히 행동에 나서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부모님과 더불어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까지 갔다가 혼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도 모르고 잘 따라 오겠거니 생각하며 하룻길을 간 뒤에야 예수가 없어진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부모가 얼마나 아들에게 무관심하였으면 그랬겠느냐”고 탓할 일은 아닙니다. 유월절이면 세계 각처에서 무수한 순례 객이 몰려들게 마련이고 그중에는 갈릴리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가 열두 살인데다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을 매년 갔으므로 부모로서는 안심하고 귀향하던 참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하룻길이나 간 뒤에야 아들이 사라진 사실을 알고는 부랴부랴 온 사방을 찾아 헤맵니다. 예수 부모가 애태우며 아들을 찾아다닌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당시는 강도떼가 자주 출몰하였고 치안도 몹시 불안정하였습니다. 특히 로마제국의 식민 치하라 유월절이면 늘 소란스러웠습니다. 예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간이나 예수를 찾아다니며 애간장이 탔을 겁니다. 마침내 그들은 성전에서 랍비들과 한참 토론을 벌이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마리아는“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며 그를 꾸짖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반응합니다. 여느 부모라면 이런 경우 아들을 몹시 야단쳤을 것입니다. “부모가 애타게 찾는 줄도 모르고 성전에 남아 한가롭게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다니, 어찌 못된 행동을 하느냐”며 크게 화를 낼 법합니다. 한데 요셉과 마리아는 소년 예수가 당대 최고 석학들과 슬기롭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대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탄생 과정에서 겪은 놀라운 일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예수의 일탈 행동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자라나는 아이

 주후 2세기경에 나와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인기를 끈 ‘도마의 유년기 복음’이란 외경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예수가 다섯 살, 여섯 살, 여덟 살, 아홉 살, 열두 살 때 행한 기이한 일들을 알려줍니다. 내용을 보면 유대인의 풍습이나 지리, 기후도 잘 모르고 기록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저자는 이방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누가복음의 열두 살 소년 예수가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을 벌인 일을 맨 마지막에 거의 그대로 실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살 꼬마 예수부터 열두 살이 되기까지 순차적으로 그 일화를 하나씩 들려줍니다. 이 외경이 전해주는 예수라는 아이는 대책 없는‘악동’입니다. 다섯 살 때 진흙을 빚어 참새 열두 마리를 만들었는데 그날이 하필 안식일이라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느냐”고 아버지 요셉에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손뼉을 쳐 그 참새들을 날아가게 합니다. 어떤 아이가 달려오다 그의 어깨에 부딪히자 “너는 가던 길을 더 못 갈 거야”라고 말해 그 아이가 그 자리에서 죽게 만든 일도 있었습니다. 요셉이 글을 가르치려 그를 랍비에게 데려갔을 때는 선생이 열심히 알파벳을 쓰고 불러주며 따라하라고 해도 가만히 지켜만 봅니다. 화가 난 선생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자 “제가 당신에게 배울 게 아니라 제가 당신을 가르쳐야합니다... 당신은 알파의 본성도 모르면서 어떻게 베타를 가르칩니까? 안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면 베타에 대해서도 당신 말을 믿겠습니다.”라고 말해 선생으로 하여금 “이 아이는 도저히 못 가르치겠다.”며 두 손 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악동 예수의 몇 마디 말로 아이가 죽고 사람들 눈이 멀어버리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자, 화가 난 요셉은 예수의 귀를 심하게 잡아당겼습니다. 이때 예수는 “찾되 찾지 못하는 건 아버지한테 이제 충분해요. 게다가 아버지는 현명하게 처신하지도 못하셨어요. (제가) 아버지 자식이라는 걸 모르시나요? 저를 괴롭히지 마세요.”라고 말합니다. 이런 아들을 둔 아버지라면 도대체 아들을 어찌 키워야할지 막막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이 다 알고 자신을 조금만 괴롭히면 그를 죽이거나 눈이 멀게 하는 아이, 아버지의 훈육마저 거부하며 오히려 훈계하는 아이를 감당할 세상의 부모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어린이 예수라지만 ‘도마의 유년기 복음’에 나오는 그는 너무 괴팍하고 오만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 중에 그나마 예수다운 모습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가 여덟 살 때 씨 뿌리는 철이 되자 요셉은 예수와 함께 밭에 나가 씨를 뿌립니다. 예수는 씨를 한 항아리 뿌렸는데 그 씨가 뿌리자마자 곧 자라나 타작하게 되었고 백 항아리나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동네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들에게 이 씨앗을 나눠주었다는 내용입니다. 씨앗을 뿌리자마자 타작하게 되었다는 마가복음의 ‘스스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막 4:26-29)를 떠올리게 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은 과연 예수다운 면모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성장 과정을 생략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점은 ‘도마의 유년기 복음’이 어찌하여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가 아무리 어려서부터 기적을 행하고 정신적으로 성숙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가 성장하는 과정을 생략한다는 건 치명적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예수는 그저 나이만 들어갈 뿐 정신적으로 성장과 성숙을 이뤄가는 과정이 도무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오늘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는 소년 예수는 비범하면서도 평범한 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는 열두 살 소년치고는 매우 슬기로워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 오늘날로 말하자면 최고의 석학들과 함께 토론하며 그들이 경탄할 정도의 대답들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를 애태우며 제 멋대로 행동하는 ‘미운 열두 살’ 소년입니다. ‘도마의 유년기 복음서’에 나오는 어린이 예수는 한술 더 떠서 자신을 화나게 하거나 괴롭히면 신비한 능력으로 열배 백배로 값아 주는 악동입니다. 그는 아버지 요셉도, 그를 가르치러 나선 선생들도 감당하기 힘든 무서운 어른 아이로 그려집니다. 기적을 행하는 일만 뺀다면 어린이 예수는 오늘 우리가 돌보는 아이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는 진흙으로 흙 놀이를 하고 학교 선생님 말을 잘 듣지 않으며 부모님 속을 썩이는 말썽쟁이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하여 그들에게 자신이 가진 씨앗을 나눌 줄 아는 착한 아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예수가 어떤 모습으로 자라났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도 지금 커가는 우리 주변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에 위안을 얻습니다. 예수님 부모가 대단한 재력가이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 예수를 남달리 신동으로 키워내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이 키우라고 맡긴 아들을 그저 자신들이 가진 능력과 사랑으로 정성껏 돌보았을 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고 예수 스스로 조금씩 깨쳐 나갔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 말씀은 예수가 “지혜와 키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다”고 함으로써 아이들의 성장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일러줍니다. 아이들이 온전한 인격체로 자라려면 신체의 성장, 지혜의 성장,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이것을 어떤 분은 사차원의 성장 곧“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성장”이라 말합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아이들의 신체적, 지적 성장을 위해서는 골몰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회적, 영적 성장”은 뒷전입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특별한 사랑이 필요한 시기임에도 그게 가장 부족합니다. 아무리 ‘비범한 아이’일지라도 부모와 이웃들의 ‘평범한 사랑’이 공급되지 않으면 그는 괴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자라나는 소년 예수를 생각하며 우리의 아이들을 그와 같이 균형 잡힌 성장을 하도록 돕고자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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