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3/19(토)
신앙의 근기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데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을 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관가에 넘겨줄 때에, 어떻게 말할까, 또는 무엇을 말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때에 지시를 받을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일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16-22>


고난의 종

 지난 목요일(10일), 광주 5.18망월민주묘역에서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고 정진동 목사 8주기 추모예배를 드리고 왔습니다. 정진동 목사님은 제가 속한 일하는예수회(예장민중교회선교연합)가 생겨나기 훨씬 전인 70년대 초반부터 2005년 뇌경색으로 쓰러지실 때까지 줄곧 민중선교를 하신 선배이십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살아계실 때 두어 차례 잠깐 뵌 적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대화를 나눠본 건 민중선교 훈련생 시절 청주도시산업선교회를 방문했을 때가 전부입니다. 당시 목사님께서 저서들에 친필 사인까지 해 주셨는데 빛바랜 자료집들처럼 보여 부끄럽게도 관심 있게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이번 추모예배를 드리고 나서 비로소 그의 회고록을 찾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역사에 길이 남을 보배 같은 목사님을 가까이 두고도 여태 잘 모르고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정진동 목사님은 농촌목회를 하시던 중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인 조지송 목사의 산업선교 특강을 듣고 감명 받아 산업선교에 뛰어드신 분입니다. 그때는 1970년대 초반이라 산업화, 도시화가 한창이라 이농현상이 심화되던 시절입니다. 도시의 노동자, 빈민들은 크게 늘었으나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기댈만한 곳은 찾기 힘들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심한 차별대우에 시달리던 거리의 청소부들부터 돕기 시작해 청주지역의 가난한 자들의 든든한 벗이 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려 30차례 이상의 연행, 가택수색과 구속을 당하셨고 사랑하는 큰 아들을 의문사로 잃는 쓰라린 아픔을 겪기도 하셨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둘째딸 결혼식 날에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경찰에 연행되셨습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4.19 기념행사에서 성명서를 낭독하였다는 혐의였습니다. 1988년 7월, 택시 노동자들의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실 무렵에는 괴한 40여 명이 몰려와 목사님의 집을 이틀에 걸쳐 파손하고 오물을 투척하는 행패를 부린 일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납치와 연금, 협박 등 정보기관과 경찰 등에 의한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한 목회자가 40여 년의 목회기간 내내 이처럼 험악한 생활을 계속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믿음 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직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되었습니다.”(히 11:36-38a) 이 말씀은 십자가 고난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정진동 목사님 같은 분의 삶에 잘 부합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는 예수 제자의 사명은 “이웃과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즉 마지막 피 한 방울마저 아낌없이 흘리신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정보경찰들이 청주산업선교회와 노동교회에 대해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귀중한 금 ․ 은 보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권력의 하수인 경찰의 모진 탄압은 비록 힘들긴 하지만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는 표증이므로 보람찬 일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하십니다. 이런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 모든 고난을 씩씩하게 헤쳐 나오실 수 있었지 않나 싶습니다.


생존의 슬기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이리떼가 우글대는 세상 한복판에 나아가 어리석게도 그들에게 잡혀 먹히지 말고 지혜롭게 잘 살아남으라는 경고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처할 현실이 결코 녹록치 않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리떼 같은 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합니다. 실제로 착하고 순박하게 사는 사람들일수록 야바위꾼들의 농간에 놀아나 큰 피해를 입을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러 나섰다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올가미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댄다면 오히려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내내 유대 지배자들의 감시, 공격, 음모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당장 붙잡혀 처형당할 위험에 내몰리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를 내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그의 생생한 경험이 묻어 있습니다. “뱀과 같이 슬기로워라”는 문구에서 말하는 ‘슬기로움’(프로니모스)은 어떤 지식이 많다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처리하는 방식에 있어서 용의주도함이나 영리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간교하게 꼬드기는 모습을 떠올려 보시면 “뱀과 같은 슬기로움”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비둘기 같은 순진함”에서 말하는 ‘순진함’이란 ‘단순하고 꾸밈없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순진하라는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살벌한 일상에서 영리하고도 꾸밈없는 삶으로 모든 도전과 위기를 돌파하라는 교훈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오늘 본문은 마가나 누가의 것보다 더욱 강도 높은 박해의 예고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공회(산헤드린)에 넘겨주고 그들의 회당에서 매질 할 것”이라 했습니다. 또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여기서 묘사한 상황은 예수님이 활동하실 무렵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파송한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회당에서 매질을 당한 일은 복음서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 복음을 전한 일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어느 때를 염두에 둔 예수님의 경고일까요? 많은 학자는 이 시기를 유대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바리새파 세력만 겨우 남아 유대교의 명맥을 겨우 유지할 때라고 봅니다. “회당에서의 매질과 산헤드린 앞에서의 증언” 같은 언급은 그 시대가 “기독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분리되기 전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이 팔레스티나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 세계로 뻗어나갈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너희는 유대 총독 앞에 설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고,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나가서, 그들과 이방 사람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라고 말씀한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초기교회의 사도들이 예루살렘 공회에 끌려가 신문당하거나
총독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을 전해 줍니다. 이로써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 결코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교회는 갓 출발한 아주 초창기부터 내외부의 박해에 시달려야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자식이 부모를 당국에 고발하거나 그 반대의 현상조차 발생하였습니다. 이런 극심한 박해 가운데서 초심을 잃지 않고 신앙을 지키기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 모든 박해를 슬기롭게 잘 극복하고 살아남으라고 명하십니다.  


끝까지 가라

 “고난이 없으면 영광도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왕관도 없는 법”(W. 펜)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회피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너희는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고 거듭 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평행되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어라.”(눅 21:17-19) 참고 견디는 자에게 좋은 열매가 있습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자신의 영혼도 귀한 결실도 다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뿌려진 씨앗의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서, 그것을 굳게 간직하여 견디는 가운데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눅 8:15) 견딤이 없이는 수고의 열매도 기쁨, 승리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해 섬기려는 사람일수록 온갖 환란과 고난을 겪게 마련입니다. 견디기 힘든 박해를 겪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에 대해 누누이 예고하셨습니다. 가령 산상설교의 팔복에서 그는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보상이 크기 때문이다.”(마 5:11-12a)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과 교회에 닥치는 모든 박해를 슬기롭고 순박하게 대처하며 마지막까지 잘 견뎌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문구와 똑같은 내용이 마태복음 24장 13절에도 나옵니다. 같은 복음서에서 단어까지 다 똑같은 내용의 말씀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드물고 흥미로운 일입니다. 그만큼 예수께서 마지막 날까지 잘 견디는 삶을 중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계시록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에게도 “너희는 열흘 동안 환란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계 2:10)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예수님과 더불어 걷는 사람입니다. 가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멈추고 되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가 무겁다고 내팽개치거나 올라타고 갈 수도 없습니다. 주님이 공급해 주시는 용기와 힘으로, 끝까지 완주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다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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