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3/19(토)
잘 지은 집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내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과 같은지를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그는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다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물살이 그 집에 들이쳐도, 그 집은 흔들리지도 않는다. 잘 지은 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 흙 위에다가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물살이 그 집에 들이치니,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고, 그 집의 무너짐이 엄청났다.
                                                  <누가복음 6:43-49>


첫 마음의 기억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구교인 천주교나 신교인 개신교 모두 외국인 선교사의 전도로 시작된 게 아닙니다.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 조선인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일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나라는 서양 제국들의 식민지 침탈 과정에서 선교사도 들어가 교회를 세웠기에 부작용과 거부감이 많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을 정도입니다. 반면 조선인들은 주체적으로 복음을 수용하였습니다. 1885년 4월 5일, 미국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셀러 선교사가 일본을 거쳐 제물포(인천)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조선 땅에 들어와 사역한 첫 번째 공식 외국인 선교사입니다. ‘은자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에다 드디어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는 기대와 설렘을 가득 안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2년 전에 조선에는 이미 교회가 존재하였습니다. 의주에서 중국을 오가며 장사하던 서상륜, 이응찬, 백홍준 등이 중국에서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성경번역사업에 참여해 일하다 예수를 믿고 고향에 돌아와 복음을 전한 결과입니다. 매서인(성서를 판매하며 전도하는 사람) 서상륜의 보고에 의하면 1883년 말 서울에 ‘세례 지원자가 13명’이나 있었습니다. 그의 외가가 있던 황해도 장연의 소래에는 그보다 먼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우리 교회의 이름은 이 소래교회에서 빌려 왔습니다. 그 마을 토박이말 명칭이 본래 ‘솔샘’이고 그것이 ‘솔내’로 바뀌었다가 ‘소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나무가 우거지고 계곡물이 황해로 흘러드는 곳이라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알려졌습니다. 우리 솔샘교회는 조선사람 스스로 이 땅에 세운 교회의 첫 마음을 잊지 말고 이어받자는 취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또한 ‘솔샘’이란 이름에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서민을 잘 닮은 소나무와 영성의 샘물 같은 교회를 이루자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지역사회 선교에 기초한 영성공동체”를 일구겠다는 일념으로 여수에 내려와 교회를 개척한지 그새 어언 14년이 흘렀습니다. 처음 우리 교회 출석한 어린 학생들은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천안으로, 인천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고 그 사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멀리 이사 가신 교우들도 제법 됩니다. 2004년부터 간간이 목회일지를 쓰는데 대략 훑어보니 교우들과 부대끼며 고군분투한 흔적들이 눈에 선연합니다. 교회를 창립한 2001년 말, 기독교 주간지의 어느 기자가 우리 교회를 취재해 기사를 쓴 적 있습니다. 이제 갓 출발한 교회라 보여줄게 없다고 해도 극구 취재하겠다고 멀리 서울서 내려왔습니다. ‘민중과 함께 하는 교회 이야기’를 주제로 성탄특집호를 만들고자 기사거리를 찾다 어찌하다보니 저희까지 연결이 된 모양입니다. 2001년이면 기존의 민중교회들도 눈에 띄게 쇠락해 가던 상황인데 그런 교회를 표방하고 개척을 한다니 그 포부가 궁금하였지 않았나 싶습니다. 옛 기사를 찾아 다시 보니 “평신도의 의식을 깨워 ‘평신도 중심의 민주적 교회’를 이뤄 보겠다”거나 “여수지역의 환경문제에도 점차 관여해 나갈 계획”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처음 구상한 그대로 이뤄진 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교우들과 부지런히 함께 공부하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다가서려 노력은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여기에 만족할 순 없고 섬김과 나눔에 더 열심을 다하는 건실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자 다 같이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좋은 나무되기

 교회가 하는 각종 무슨 프로그램이 중요하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 안에서 과연 ‘예수의 정신’이 잘 구현되고 있느냐가 참 교회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핵심 기준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요람’으로 알려진 솔내교회의 첫 예배당 사진을 보면 허름한 초가집에 돌담으로 둘려 있습니다. 내부가 열 평가량의 공간이나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시골 초가삼간을 예배당 삼아 함께 예배드리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였을 것입니다. 당국의 기독교 박해가 심해 서양 선교사의 입국이나 성경 반입이 엄금되던 시절임에도 스스로 전도해 교회를 세우고 예배드리니 기쁠 수밖에요. 소래교회는 예배당을 다시 지었을 때도 기와집 형태의 한옥으로 건축하였습니다. 이 교회의 첫 담임목사로 사역한 캐나다 태생의 맥켄지 선교사도 서양인 티 내지 않고 조선 사람처럼 생활하였습니다. 당시 동학군 수만 명이 그 지역을 휩쓸던 시기였으나 소래교회나 맥켄지 선교사만큼은 해코지 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보증도 한 몫 하였지만, 무엇보다 이 교회가 평소 조선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병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잘 돌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학군 가운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마저 생겨났을 정도였습니다. 교회의 크고 작고는 그 규모로 따질 일이 아닙니다. 그 지역에 꼭 필요한 교회로 뿌리내렸느냐를 먼저 살펴봐야겠지요.

예수님은 누가복음 평지설교를 마무리하시며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속담처럼 지극히 당연한 말씀인가요? 진리는 이처럼 평범한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위대한 건 바로 이와 같이 평범한 사실에서 심오하고 비범한 진리를 이끌어내곤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열매는 나무만큼 좋을 수 있다”는 유대인 속담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속담을 변용하여 나무는 좋은데 열매가 나쁘거나 열매는 좋은데 나무가 나쁠 수는 없다(마 12:33)고 가르치십니다. 그는 나무가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는 그 열매를 따고자 가까이 가보셨습니다. 이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 아무런 열매가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 나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막 11:14)는 말씀으로 저주하셨습니다. 너무 잔인하신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는 예수님의 평가 기준에서 보면 ‘나쁜 나무’입니다. 잎만 무성하였지 과일나무임에도 배고픈 사람에게 나눠 줄만한 아무런 열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곧 예루살렘 성전과 그곳의 유대 집권자들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였고, 그곳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 집권자들의 권세는 대단하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아무런 열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려드는 음모, 폭력, 술수, 사기 같은 쓸모없는 껍데기인 어둠의 일들만 가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겉모양만 그럴싸하고 요란하게 꾸며댈게 아니라 건실한 나무가 되어 좋은 열매를 맺기 바라십니다. 시중에 나온 과일을 보면 때깔 좋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크기도 작고 벌레 먹어 볼품없는 과일은 잘 팔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진짜 좋은 열매입니까? 농약 범벅으로 키워내 외양은 그럴싸한데 병마의 덩어리나 다름없는 과일은 사실 나쁜 열매입니다. 진정 좋은 열매는 무농약 유기농으로 농부가 정성스레 잘 돌보아 얻은 과실로서 그걸 먹는 사람들의 건강에 이로운 열매입니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려면 그런 나무를 가려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합니다.


잘 지은 집처럼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집짓는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건축이라면 그분의 전문 분야입니다. 갈릴리 목수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친 요셉의 가업을 이어받아 줄곧 목수생활을 하셨으면서도 그 가르침에서 의외로 건축 이야기가 드문 편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매우 중요한 대목에서 집짓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6장 20절부터 나오는 평지설교의 최종 결론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예수님은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등의 여러 귀한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유독 평지설교 때만 이렇게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평소에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여러 형태로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대중에게 큰 인기가 있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면 비좁은 집이나 회당, 들판 가리지 않고 그 가르침을 듣고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정작 말씀대로 행하지는 않고 그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답답해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그저 귀에 듣기 좋은 소리로 소비되고 말뿐 아무런 결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허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쐐기를 박듯 경고하십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 없이 맨 흙에다 집을 짓는 자와 같아서 홍수가 나면 그 집이 쉽게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반면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자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자와 같아서 홍수가 나도 그 집이 끄떡없다고 하십니다. 교회는 ‘말씀의 집’입니다. 이 집이 태풍과 홍수, 그 어떤 외부 세력의 핍박과 시련에도 흔들림 없이 서려면 그 무엇보다 예수님 말씀의 기초 위에 건축되어야 합니다. 겉모양은 화려한데 속빈 강정마냥 예수정신은 온데간데없어 얼빠진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초가 부실한 집은 얼마 안가 금이 가고 기울어 무너지고 맙니다. 열네 살을 맞은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생생히 살려내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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