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11/30(월)
좁은 문을 찾으라  

예수께서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께 물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집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졸라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할 터이나, 주인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모두 내게서 물러가거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는 바깥으로 쫓겨난 것을 너희가 보게 될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면서 이를 갈 것이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보아라, 꼴찌가 첫째가 될 사람이 있고, 첫째가 꼴찌가 될 사람이 있다.” <눅 13:22-30>



고난의 선택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헤라클레스는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입니다. 고대 수메르 신화의 영웅 길가메시와 유사한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길가메시도 헤라클레스처럼 신과 인간이 절반씩 섞인 자였습니다. 그는 우르크 왕으로 통치하는 동안 백성들을 억압하고 온갖 쾌락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친구 엔키두가 죽고 나자 문득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비로소 정신을 차려 영생을 얻고자 험난한 여행을 떠납니다. 헤라클레스 역시 길가메시처럼 불멸의 삶 곧 영생을 얻고자 위험한 모험을 떠나는 건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길가메시와 달리 술에 취해 자신의 부인과 자녀들을 죽인 죗값을 치르기 위한 여행을 합니다. 헤라클레스는 제우스 신과 미케네 왕의 딸 알크메네 사이에서 태어난 자였습니다. 말하자면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입니다. 알크메네는 암피트리온이란 사람의 아내였으나 바람둥이 제우스는 그녀를 범하여 임신시켰습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진노해 헤라클레스가 일생 동안 12가지의 업을 극복해야 한다는 저주를 내립니다. 따라서 헤라클레스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렇게 짜인 운명이 너무 밋밋해 누군가 약간 변형을 가한 것일까요? 헤라클레스는 그가 열여덟 살 때 어느 십자로에서 ‘쾌락’과 ‘미덕’이란 아리따운 두 님프를 만납니다. 쾌락은 자신의 길을 택하면 한 평생 안락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합니다. 반면 미덕(혹은 다툼)은 자신의 길을 택하면 이 세상에서는 투쟁과 고통이 계속되지만 마침내 내세에 큰 영광으로 장식된 생활을 부여하겠다고 말합니다. 헤라클레스는 둘 가운데 고난의 길인 미덕을 택합니다. 그 결과 일생동안 험악한 모험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죽어서 별이 됩니다. 이게 바로 ‘헤라클레스의 십자로’ 혹은 ‘헤라클레스의 선택’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고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편한 쾌락의 길 보다는 힘겨운 고난의 길을 택하여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고대 근동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가령 주전 7세기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드는 그의 ‘일과 나날’이란 작품에서 “나쁜 것은 쉽게 얻어지고 얕은 곳에 있으며 그것에 이르는 길은 매끄럽고 우리와 가깝다”고 말합니다. 반면 “선한 것에 이르는 길은 멀고 가파른 길이며 거칠어서 사람이 정상에 거의 도달하였을 때에야 쉬워진다”고 했습니다(Hesiod: Work and Day, 286-292). 주전 6세기에 활동한 공자도 그의 <논어>에서 “도에 뜻을 두고 있으면서 누추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선비와는 함께 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 헤라클레스 신화, 헤시오드의 일과 나날, 공자의 논어가 공통적으로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사람들 누구나가 추구하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 ‘쾌락’ 따위가 아니라, ‘진리’, ‘영생(불멸)’, ‘도’(道), ‘선’(善) 같은 인생의 궁극적 가치를 얻으려면 사람들이 기피하는 고난의 길을 택해서 걸어가야 천신만고 끝에 그 보물을 얻는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도 그의 책 <에티카> 마지막에서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어렵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손쉽게 얻을 수 있고 많이 찾는 거라면 그건 귀한 게 아닙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만 보더라도 메달 하나 얻고자 얼마나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까? 그렇게 불철주야 피나는 훈련을 하고 우승하여 얻은 금, 은, 동 메달이기에 소중합니다. 누구나 받는 메달이라면 그런 시시한 걸 얻고자 사서 고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 가지의 길

 예수님은 도마복음서에서 “너희는 나그네가 되어라”(42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너무 집착 말고 길 가는 과객처럼 관조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만일 예수님 자신은 나그네로 살지 않으시면서 “너희는 나그네가 되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의 의미가 크게 반감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는 길 위의 사람이셨습니다. 공생애 기간 중 예수님은 어느 한곳에 정착해 오래 머물지 않으십니다. 오늘은 “이 성읍, 내일은 저 마을”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돌아다니십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지도 없이 떠돌아다니신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길을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길게 묘사합니다. 길을 걷는 나그네 예수님의 동선과 메시지가 주는 울림이 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여러 성읍과 마을에 들르셔서 가르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도중입니다. 나그네로 걷고 계시는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불쑥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는 그의 ‘메시지 성경’에서 이처럼 질문한 사람을 ‘어떤 구경꾼’이라고 했습니다. 질문자가 그의 삶에서 우러난 질문을 던지지 않고 단순 호기심 때문에 묻는 태도를 보이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자 질문하였다면 “주님, 나 같이 죄 많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질문한 사람에게 대답지 않으시고 그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많은지 적은지를 물었더니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며 그 질문을 삶의 태도와 실천 문제로 바꾸십니다. 이는 예수님이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유대인들의 사변적 구원 논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천사가 몇 명인지, 구원은 몇 명이나 받는지, 형사수취제로 결혼한 부부는 부활의 날에 어떻게 되는지 등의 주제로 논란을 벌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런 공리공담보다는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며 새로운 삶의 태도와 방향을 설정하게 하십니다. 흥미롭게도 누가는 11장, 12장, 13장에서 ‘문’을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11장 9절에서는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예수님은 12장 36절에서 “마치 주인이 혼인 잔치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곧 열어 주려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이 11, 12, 13장에서 연거푸 ‘문’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라”고 하셨지 “좁은 문을 찾거나 두드려라”고 가르치시진 않으십니다. 하지만 마태의 평행본문(마 7:13-14)에서는 좁은 문과 멸망 문을 대조한 뒤 멸망 문으로 이끄는 길은 널찍해 찾는 사람이 많지만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을 너무 비좁아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과 넓은 문으로 가는 길이 극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누가의 예수님은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좁은 문을 찾으라”거나 “문을 두드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문 좀 열어 달라”고 문을 두드리고 조르는 자들에게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도 않습니다.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우리는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인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며 아는 체를 해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모른 체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불의를 일삼기” 때문입니다. 주인과 안면을 트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건 각자 삶의 태도를 바꾸어 회개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좁은 문 찾기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마태의 평행본문에서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좀 더 직설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입니다. 문도 좁고 길도 비좁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은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봐야 할 점은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은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였으나,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과 길”은 “너무나도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한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을 묘사한 내용과 짝을 맞추려면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과 길”은 길이 비좁고 험하여 “들어가는 사람이 적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갑자기 “찾는 사람이 적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생명의 문과 길을 들어가고 걸어가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길과 문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은 “그 길과 문에 들어가고 걸어가고자” 한다면 그곳이 어딘지 “찾아내야” 함에도 아예 그런 시도조차 않는다는 일침입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그런 길과 문이 있는지 아예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목회자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하더군요. 평소 설교시간에 넓고 쉬운 길만 가르쳤지 좁고 험한 생명의 길은 안내하지 않았기에 교인들이 그런 길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멸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좁은 문과 길은 예수님 자신으로도 볼 수 있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자 할 때 겪는 온갖 안팎의 고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님의 성전 문에 서서 주님께 예배하고자 문으로 들어오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친 바 있습니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의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머물러 살겠다.”(렘 7:1-3) 주님께 예배하여 구원을 얻고자 성전 문으로 들어오는 자들에게 “너희 모든 생활과 행실을 고쳐라”며 회개의 삶을 살라고 외치는 예레미야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예배당에 드나들면서도 주님의 문과 길을 부지런히 찾고 두드리지 않으면 “주님의 마당만 밟는”(사 1:12) 격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삶과 가르침으로 우리가 걸어야할 문과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안내 표지판에 따라 생명의 좁은 문을 찾고 그리로 들어가기를 날마다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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