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11/30(월)
자비의 생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마 5:43-48>


마구 쓰는 ‘완전’

 몇 해 전부터 사람들이 이야기할 때 ‘완전’이란 낱말을 지나치게 자주 씁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 20-30대가 가장 즐겨 쓰곤 합니다. “완전 예뻐” “완전 짱이야” “완전 대박” “완전 짱나” “완전 똑같아”... 이처럼 ‘완전’이란 말이 시도 때도 없이 쓰입니다. 언론들조차 ‘완전 민낯 공개’ ‘완전 엄친 딸이네’ ‘완전 볼륨 대박’ 따위의 제목을 스스럼없이 씁니다. “언론은 사회의 공기(公器), 곧 사회에 두루 영향을 끼치는 기관”인데 되레 언론들이 우리말을 파괴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일입니다. ‘완전’이란 낱말도 애초 방송이나 신문이 함부로 쓰다 보니 그게 널리 퍼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전’이란 낱말을 심하게 쓴다 싶은 공부방 청소년들에게 몇 차례 주의를 준적도 있지만 오랜 말버릇이라 잘 바뀌지 않습니다. 사실 주변 친구들이 다 쓰는데 강다짐하고 혼자서 하루아침에 습관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리 조심하려 해도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불쑥 튀어나올 겁니다. 문제점을 깨달은 사람들부터 평소 꾸준히 함께 고쳐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완전 똑같아” 보다는 “무척 닮았어!” “쏙 빼닮았어!,” “완전 예뻐” 보다는 “매우 예뻐” “무척 예뻐” “굉장히 예뻐” “대단히 예뻐” 따위로 말해야 훨씬 매끄럽습니다. 한데 어찌된 일인지 ‘완전’이란 한 단어로 많은 상황을 뭉뚱그려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완전’을 마치 만능열쇠나 되는 듯 함부로 쓰고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사례로도 요즘 우리말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완전’은 ‘완전할 완(完)’자에 ‘완전할 전(全)’자로 구성된 한자말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그 정확한 의미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음”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추어 부족함이나 결함이 없음”이란 의미입니다. 오늘날 같이 허점투성이, 모순덩어리인 세상에서 ‘완전’이란 낱말은 그 어디에 붙여도 썩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나 천사라면 모를까 한계와 실수가 많은 사람에게 ‘완전’을 기대한다는 건 ‘우물가에서 숭늉 찾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완전함에 대한 인간의 주제넘은 욕망이 ‘완전’을 유행어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나님 닮기
 놀랍게도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거야 전능하신 신이시니 당연한 일이지만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본인의 목표를 허물 많고 연약한 우리 인생에게 잘못 요구하신 건 아닐까요? 예수님이시라면 ‘완전’에 도달하시는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분”(히 4:15)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성서는 예수님에 대해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분”(히 7:28)이란 평가를 이미 내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자 ‘외아들,’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처럼 완전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보통의 인간은 예수님과는 비교하기 힘들만큼 나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 같이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한”(마 26:41) 사람들에게 ‘너희는 완전하여라.’고 요구하시니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이게 어쩌다 실수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5:20)이라고도 경고하셨습니다.

“내 멍에를 매고 나한테 배워라”(마 11:29)고 하시더니 사람이 도저히 감당 못할 멍에를 지우신 건 아닌지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날마다 토라를 연구하며 그것을 철저히 지키려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의’를 능가하고 하나님처럼 ‘완전’한 삶을 산다는 건 아무리 신앙 좋은 신자라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 같습니다. ‘완벽주의’를 다룬 한 심리학 논문을 보니 ‘영적 완벽주의’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 뿌리가 최초의 인류로 알려진 아담과 하와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 살았으나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날 뱀이 나타나 “동산 중앙의 선악과의 열매를 따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창 3:5)라고 유혹하자 그 말에 대번 넘어갔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어 하나님처럼 되고자 욕망하였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 같이 영적인 극치에 도달하고자 애쓰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나 기도원에 들어가 기도하는 많은 사람, 일반 목회자나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영적 완벽주의’의 흔적은 찾아보면 많습니다.

가령 존 웨슬레는 ‘기독교인의 완전함’에 대해 다룬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철두철미 거룩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타는 마음을 갖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요,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이며, 그가 품으셨던 마음 전체를 품는 것이요, 항상 그가 행하신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웨슬레가 항상 예수님과 같이 행동하여 ‘완전함’을 이루려 시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금욕훈련’으로 그런 완전함을 이루려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나중에야 “순수한 사랑과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이루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오랜 교회의 역사에서는 웨슬레뿐 아니라 ‘완전함’을 이루고자 온갖 고행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들은 산상설교의 예수님 말씀대로 ‘완전’에 도달하고자 애썼습니다. 하지만 개역개정판 성경은 “너희도 완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로 번역하였습니다. ‘완전하라’와 ‘온전하라’는 말은 엄연히 의미가 다릅니다. ‘온전하다’는 말의 뜻은 “무엇이 변화되지 않고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입니다. “필요를 모두 채워 부족함과 결함이 없는 상태”인 완전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자비로운 삶

그런데 성경은 같은 문구를 무슨 이유로 ‘온전’과 ‘완전’으로 달리 번역하였을까요? 이는 헬라어 성경의 ‘텔레이오스’란 단어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텔레이오스’를 번역할 때 ‘완전’의 의미가 담긴 ‘perfect'란 단어를 씁니다. 하지만 ‘텔레이오스’는 ‘완전’이나 ‘온전’이란 뜻 말고도 ‘순수한’ ‘성숙한’ ‘흠 없는’ 따위의 의미가 더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하면 ‘텔레이오스’는 “올바른 윤리적 선택”이나 “모든 덕을 갖춘 인격” 등을 뜻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너희는 완전/온전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흠결 하나 없이 완벽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너희는 완전하라”는 요구는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해야 합니다.”(신 18:13)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보다 앞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명하신 바 있습니다. 성경은 노아에 대해서도 평하기를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완전한 자였다”(창 6:9)고 하였습니다. 과연 노아와 아브라함이 흠 하나 없이 ‘완전한 자’였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허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 무슨 근거로 ‘완전하다’는 평가를 내린 것일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완전하라”고 명하신 말씀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지 “그 어떤 허물이 조금도 없는 삶을 살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오늘 본문의 전체 맥락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의 동포에 대해서는 토라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함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원수를 사랑해야할 상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할 ‘이웃’의 범주에 들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차별이 너무 당연하다는 게 유대인들의 일반적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낡은 생각을 뒤집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선한 자나 악한 자 모두에게 똑같이 햇볕과 비를 주신다며 그런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최종 결론으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고 요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전’이 ‘자비의 삶’이란 사실은 누가의 평행본문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은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눅 6:36)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완벽한 삶’을 요구하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런 흠도 없는 완전한 자가 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좌절감, 열등감, 죄책감만 더 커갈 것입니다. 그런 삶은 예수님이 의도하신 바가 전혀 아닙니다. 그는 우리에게 완벽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삶을 사는 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이 “어려서부터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막 10:21)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청년에게 부족한 건 결국 ‘자비’였습니다. 다 갖췄지만 이웃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자비로운 삶을 살지 않는다면 큰 결점이 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처럼 많은 흠결이 있어도 ‘자비로운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그를 ‘완전한자’라고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을 닮아 더욱 힘써 자비로운 삶을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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