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11/30(월)
온전한 사람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이르기를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셨다”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은 먼저 그분이 땅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려오셨던 그분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려고, 하늘의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섬김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엡 4:6-13>


불러낸 사람들

 지난주초 뜬금없이 ‘교회’가 일반 뉴스의 제목으로 떠올랐습니다. “저 안이 거의 교회에요 교회. 그냥 믿어달라.” 무슨 일인가 해서 살펴봤더니 ‘국정원 해킹’ 관련 비공개로 열린 국회정보위원회 회의 분위기를 기자들에게 전한 어느 야당 K의원의 발언이었습니다. 회의가 다섯 시간 가량이나 진행되었으나 국정원측에서는 “민간인 불법사찰은 절대 없었다. 믿어 달라.”는 말만을 거의 되풀이하였고 그 의원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 믿어달라고 한다.”며 국정원의 이 같은 뻔뻔한 행태를 ‘교회’에 비유해 꼬집은 것입니다. 그 의원이 말하려는 취지야 충분히 공감하지만 “왜 하필 ‘무조건 믿어 달라’는 식의 국정원을 ‘교회’에 빗댔을까” 하는 생각에 속상했습니다. K의원도 회원인 SNS 한 대화방에 해당 뉴스 링크를 옮기고 거기에 댓글을 하나 달았습니다. “정상적인 교회라면 펼쳐놓고 믿으라고 하지 덮어놓고 믿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일침이었습니다. 그러자 불과 몇 분 지나지 않아 “종교적 표현은 아니고 비유적 표현이니 이해해 주시라”는 K의원의 답 글이 달렸습니다. “그 의원이 기독교를 잘 몰라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갖고서 실언했나보다.”하고 그냥 가볍게 넘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한국교회연합(한교연)과 한국교회언론회 같은 단체가 성명을 내서 “교회를 우습게 알고 천 만 성도의 신앙을 매도한 K 의원은 정계를 떠나라”며 성토하고 나섰습니다. 국정원의 해킹의혹에 대해선 함구하는 이 단체들이 마치 스스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듯 설쳐대는 꼴이 한심스럽습니다. 알고 보니 K 의원도 기독교인이랍니다. 그는 “본래 ‘사이비 교회’를 말하려는 거였는데 본의와 달리 전달돼 송구하다”고 사과하였습니다. 그가 국정원의 맹신적 요구를 교회에 빗댄 건 잘못이나 사안의 본질과 초점은 국정원의 그릇된 행태에 있지 교회에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일부 교계 단체들이 발언의 전체 맥락은 무시하고 ‘교회’라는 비유적 표현만 침소봉대해 맹비난함으로써 스스로 교회의 공신력과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종교적 맹신’을 강요하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물론 개신교 내부에 일부 맹신을 조장하는 교회들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오직 믿음’만을 내세우며 ‘무조건 믿으라’고 큰 소리쳐 대는 이상한 부흥사들과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성서가 가르치는 교회의 본 모습은 아닙니다. 공연기획자로 잘 알려진 탁현민씨는 예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가 간밤의 꿈에 한 성도가 거액의 헌금을 하는 계시를 받았다며 그 성도를 일으켜 세우는 걸 보고 그때부터 교회를 멀리하였답니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 고등학교 2학년까지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까지 성경을 열 번 통독하였고 성경퀴즈대회를 하면 늘 1등할 정도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대요. 그런데 고1때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자살해 지옥에 갔다는 설교를 듣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고뇌에 빠졌고 신앙이 시들해져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그 당시 목사님과 전도사님 등에게 “가룟 유다가 정말 지옥 간 게 맞는지” 물어봤지만 누구도 명쾌한 답을 주지 않았답니다. 탁현민, 김어준씨 사례에 보듯 교회가 건강히 바로 서지 않으면 좋은 인재를 길러내기는커녕 오히려 내쫓는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교회’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란 단어의 번역입니다. 에클레시아는 ‘에크’와 ‘레시아’의 합성어인데 에크란 말은 “~로부터” 혹은 “밖으로”라는 의미이고 ‘레시아’는 “부르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란 “불러낸 사람들”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특별히 택하여 불러낸 사람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교회로서의 참된 소명을 일깨우고 회복하기를 바라는 말씀입니다.  


몸을 세우고자

교회는 출신, 나이, 성별, 학력, 직업 따위가 천차만별인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살아온 배경과 경험도 다 다르고 생각, 취미, 성격, 장기도 각양각색인 사람들로 어우러져 있습니다. 부부와 한 가정이 조화를 이루며 살기도 힘든데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이룬 교회가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평안히 지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오랜 역사를 거쳐 얻은 값진 경험과 교훈을 바탕으로 교리적으로나 제도적으로 많은 발전을 하였습니다. 가령 이단자들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교회 안에서 발생한 여러 분쟁해결의 방안은 무엇인지 참고할만한 자료도 많고 교회법도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가 기록되던 당시는 선교 초기라 지금과는 상황이 크게 달랐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는 성도가 많았고 교회의 직분도 제도화되지 않은 상태라 교회마다 처지가 달라 편차가 심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사도 바울 같은 지도자가 없다면 교회는 중구난방, 지리멸렬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4장 서두에서 줄곧 ‘하나 됨’을 역설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라고 말하고, ‘그리스도의 몸’ ‘성령’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 ‘주님’ ‘믿음’ ‘세례’ ‘하나님’이 모두 하나임을 환기시킵니다. 천차만별,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평화의 띠’로 하나 되게 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교회는 성령의 보호하심과 이끄심 아래 놓인 공동체입니다. 예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 밤 기도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 17:21)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광복 70주년인 8.15를 앞두고 민족의 하나 됨 곧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갈기갈기 찢긴 교회의 일치를 위해 더욱 매진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 곧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을 아버지로 섬긴다는 자녀들이 무수히 갈라져 반목, 질시, 갈등한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세상 앞에 큰 죄악이자 부끄러움입니다. 만유의 주 하나님만큼은 아니라도 우리의 옹졸한 마음의 지경을 더욱 넓혀 서로를 주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바울은 육체의 행실을 “분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갈 5:19-21)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사람은 이런 것들에 빠져 헤어날 수 없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분쟁과 분열을 겪는다는 건 그 구성원들이 이기심에 사로잡혀 육체의 행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대안으로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갈 5:16)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의 영에 따라 살아간다면 교회는 그분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는 권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불러 그분의 자녀로 삼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을까요? 12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지체들입니다. 교회의 각 지체가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은 건강히 바로 설 수 없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만으론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 일을 착수하지 못합니다. 지체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제몫을 잘 감당해야만 가능합니다.


온전한 인격

 바울은 성경에 “그분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셔서, 포로를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셨다”는 말씀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관련 구절을 찾아보면 “주님께서는 사로잡은 포로를 거느리시고 높은 곳으로 오르셔서, 백성에게 예물을 받으셨으며, 주님을 거역한 자들도 주 하나님이 계신 곳에 예물을 가져왔습니다.”(시 68:18)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선물을 나눠 주신 게 아니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장면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끝난 뒤 승리한 군대가 패배한 군대의 전리품을 수거해 가는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말씀을 약간 변형하여 주님이 우리 모든 성도에게 은혜의 선물을 나누어주신 일의 근거로 삼습니다. 그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만물의 충만케 하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도, 예언자, 복음 전도자, 목사, 교사” 등을 세우시고 가장 높은 데로 올라가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직분은 제도화되기 이전의 초기 교회에 있던 카리스마적 교회 직분들입니다. 성도 각자가 그 은사에 따른 삶을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울” 뿐만 아니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른다”고 했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을 통해 “상호관계론적 인격”을 말합니다. 인격이란 혼자서 십년간 면벽수도 한다고 잘 닦이는 게 아니고 서로의 관계로써 더 깊어지고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영원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 곧 온전한 사람, 온전한 인격에 도달하게 됩니다. 교회는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삶을 추구함으로써 모두가 믿음과 앎이 일치하는 그 충만한 경지에 도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명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온전한 인격을 이루고 믿음과 앎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번호제 목짧은댓글이름첨부작성일조회
701   해방의 재건축   바위솔   2015-08-16  560
700   너 무엇 하느냐?   바위솔   2015-08-09  704
699   온전한 사람   바위솔   2015-08-02  630
698   불씨를 잠재우라   바위솔   2015-07-26  605
697   비밀의 관리인   바위솔   2015-07-19  507
696   돌아온 영혼   바위솔   2015-07-12  180
695   그 이름을 위하여   바위솔   2015-07-05  1157
694   평화의 일꾼   바위솔   2015-06-28  765
693   은총의 일꾼   바위솔   2015-06-21  732
692   권세와 복종   바위솔   2015-06-14  830

 
처음 이전 다음       목록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