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10/1(목)
평화의 일꾼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엡 2:14-22>



평화를 찾아서

 이집트 출신의 ‘마크 가브리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이슬람교 집안에서 태어나 불과 12살 때 꾸란 전체를 암송할 만큼 독실한 무슬림으로 자랐습니다. 이집트 카이로의 알 하즈하르 대학을 2등으로 졸업하였고, 같은 대학에서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해 석․박사를 취득해 모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알 하즈하르 대학이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 대학은 이슬람권에서는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졌고 수니파 무슬림들의 최고의 권위로 통한다고 합니다. 역사만 해도 무려 천 년에 이르고 재적 학생은 9만 명에 달하는 대학입니다. 마크는 이런 대학의 전도유망한 젊은 교수로서 열심히 가르치던 중 어느 날 갑작스레 대학 위원회에 불려갔습니다. 그가 이슬람교의 전통 신앙을 의심하는가 하면 교리에 어긋난 강의로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신고 때문이었습니다. 대학 위원회와의 면담 과정에서 마크는 “꾸란과 하디스(무함마드 언행록)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는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위원이 격분해 그에게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으며 곧장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튿날 새벽 마크는 무장한 비밀경찰들에게 붙들려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하고 기적처럼 풀려나긴 했으나 다시 대학에 돌아가진 못했습니다. 그 뒤 자주 심한 두통에 시달렸는데, 약을 사러 약국에 갔다가 약사가 건네준 성경을 읽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하지만 마크가 기독교인이 되자 그의 부모형제를 비롯해 모든 친지가 그를 외면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마크는 영국에 건너가 기독교 교육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집필과 강연으로 세계 각처에 이슬람교의 실체를 알리고 예수의 복음 전파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마크는 대학시절 꾸란 해석을 가르치던 오마르 압델 라만 교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왜 우리에게 언제나 지하드(성전)에 대해서만 가르치십니까? 꾸란에서 평화, 사랑, 용서에 대해 말하는 다른 구절은 안 가르치시나요?” 오마르 압델 라만은 알카에다, 무자헤딘 같은 이슬람 테러단체의 사상적 지도자입니다. 1993년 세계무역 센터 폭파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된 바 있습니다. 마크의 뜻밖의 질문에 오마르 교수는 화를 참느라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형제, 코란에는 ‘전리품’이라는 장은 있지만 ‘평화’라는 장은 없네. 지하드와 사육은 이슬람의 머리야. 그걸 빼버리면 이슬람의 머리를 자르는 거나 마찬가지지.”(마크 가브리엘, 『예수와 무함마드』, 12-31). 실제로 코란의 목차를 살펴보면 암소, 여인, 식탁, 전리품, 가축, 회개, 요나 등 여러 장으로 나뉘어 있지만 “평화, 용서, 사랑”이 주제인 장은 없습니다. 대신 지금의 상식으로 선뜻 이해하기 힘들만큼의 폭력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가령 “반항적으로 되기 쉬운 걱정이 있는 여자는 구타해도 무방하다”(코란 4:34)거나 “다신교도들을 발견하는 즉시 죽여라. 잡아라. 억류하라”(코란 9:5)는 구절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의 목을 때리고(자르고), 또한 그들 각 손가락을 때리라(코란 8:12)” “박해가 사라지고 종교가 온전히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성전하라.”(코란 8:39)는 명령들도 있습니다. “코란의 극히 일부 폭력적인 구절을 편취해 침소봉대한 거 아닐까”하고 생각할 분들이 혹시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성서의 백성들’ 곧 유대교인이나 기독교인들과 잘 지내라는 일부 구절도 나옵니다. 하지만 코란이 기독교의 성서, 특히 신약성서에 비해 매우 폭력적인 기조를 보이는 건 엄연한 사실입니다. 근래 유독 이슬람 테러 단체들이 계속 기승을 부리는 건 코란의 폭력적 가르침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꾸란에 대한 비판적 읽기와 해석이 없이는 지구촌의 이슬람 테러를 근절하긴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의 평화

 그러면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평화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지구촌의 폭력과 갈등도 심심치 않게 벌어집니다.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나, 이 전쟁을 적극 지지한 극우 기독교계의 제리 폴웰, 팻 로버트슨 목사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들은 세계를 선악 이분 구도로 나누고 반대쪽을 제거해야할 사탄으로 몰며 틈만 나면 21세기형 ‘십자군 전쟁’을 다시 벌이려 듭니다. 한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은 최근 동성애 반대 운동이 마치 진리 수호와 거룩한 사명이나 된다는 듯 실력 저지를 하느라 부쩍 열심입니다. 근본주의 이슬람과 기독교는 종교만 다를 뿐 너무 흡사해 짝패나 다름없습니다. 초기 교회는 절대 평화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군 복무를 거부하였고 공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의 폭력적 지배가 당연시되던 시대라 군대와 공직생활을 하다보면 살육과 부정에 연루될 위험이 컸기 때문입니다. 유대전쟁이 터질 무렵에도 예루살렘 교회 신자들은 그 전쟁에 가담하지 않고 ‘펠라’라는 지역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죽음이 두렵거나 비겁해서 피한 게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웠다면 순교하는 사람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건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의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는 선포로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평화를 위해 일하신 분, 혹은 ‘평화’의 삶을 가르치신 분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을 ‘평화’라 하였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이사야 예언자가 메시아 아기를 묘사하며 그의 이름을 ‘평화의 왕’(사 9:7)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메시아, 곧 평화의 왕이 오시면 모든 전쟁이 그치고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미 4:3) 평화세상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다”란 말이 구호 아닌 실제 현실이 된 적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과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마 23:37)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며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눅 19:42),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평화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의 오랜 경계를 넘나 드셨습니다. 신약시대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장벽들을 무너뜨리고자 애쓰셨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집회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참석하였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지체 높은 신분의 인물이라고 해서 특별히 달리 대접하거나 가난하다고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나병환자이든 세리, 성매매 여성, 장애인이든 간에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사람을 가르는 차별의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 부르실 것이다.”(마 5:9)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단지 말씀으로만 가르치시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 속에서 이루고자 힘쓰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가르는 높은 담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1871년에 고고학자들은 성전 난간에 부착되어 있던 경고의 비문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누구든지 이 울타리를 넘어 성전의 영역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를 범해 붙잡히는 자는 그로 말미암은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이 경고문을 무시하고 성전의 안쪽 유대인 남성이나 여성의 뜰로 들어가면 어찌되었을까요? 성난 유대인들이 벌떼 같이 달려들어 그를 성전 밖에 끌고나가 두개골을 깨뜨려 죽였습니다. 그렇게 할지라도 이런 처형에 대해서만큼은 로마군이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 드로비모를 성전 안으로 끌어 들였다는 누명으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폭행당한 사건을 보도합니다. 이 사건으로 바울은 로마 천부장 루시아의 개입으로 간신히 살아나 길고 지루한 재판의 여정에 올랐습니다. 성전의 ‘막힌 담’이 얼마나 무서운 차별의 담이었는지를 이런 사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셨다”고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로 그동안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는 장벽이 무너졌음을 깨우쳐 주는 말씀입니다.


화해의 복음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사마리아 지역에도 일찍부터  교회가 들어섰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복음이 이루어낸 기적입니다. 며칠 전 우리는 한국전쟁 65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전쟁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습니다. 분단의 장벽은 삼팔선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전히 많은 이들 가운데 분단에 따른 냉전 이데올로기와 분노, 상처가 남아 있고 그것이 화해와 통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습니다. 통독 이전 동서독의 독일 교회들은 “교회의 날” 행사를 통해 평화군축을 위해 함께 노력하였습니다. 교회들은 매주 월요일마다 민주화와 핵무기 제거를 요구하는 촛불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동독교회의 경우는 ‘양심적 병역거부’의 법제화 요구에 앞장섰고 이 때문에 많은 청년이 투옥되었습니다. “칼을 쳐서 쟁기의 보습을 만들자”는 이런 교회의 평화운동이 마침내 베를린 분리장벽을 허물고 통독을 이루는 데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이 우리를 평화의 일꾼으로 부르셨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무슨 일을 할 것인지 함께 의논하고 실천해야할 것입니다. 광복 70주년인 올해를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가득 임하여 평화의 일꾼으로서 각자의 현장에서 화해와 치유의 사역을 잘 감당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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