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10/1(목)
은총의 일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은혜의 때에, 나는 네 말을 들어주었다. 구원의 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다”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6:1-10>


저렴한 은혜

  근래에는 보기 드물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전도 문구가 적힌 천 원짜리 지폐가 간혹 발견되곤 하였습니다. 대부분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혹은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문구를 고무인으로 찍은 형태의 지폐였습니다. 이처럼 널리 쓰이는 지폐나 화폐를 위․변조해 사용하면 형법상 처벌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는 명분일지라도 그 자체가 범죄임은 물론이고 전도는커녕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뿐입니다. 몇 년 전에는 열차 타고 서울을 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성경을 들고 칸칸마다 다니며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쳐대는 걸 보았습니다. 요즘도 서울의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이런 거리의 전도자를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됩니다. 그들이 속한 종교단체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함부로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것 같아 불쾌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전도를 하려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이야 어느 누가 탓하겠습니까? 하지만 혐오감을 불러오는 자극적 문구나 공공장소의 고성방가 전도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대중의 편견과 불신을 가중시킬 따름입니다. 각급 교회가 ‘전도축제’를 하며 상품권 같은 선물공세로 사람들을 예배당에 불러 모으는 행태도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할인마트 특별 바겐세일 하듯 ‘싸구려 복음’을 전하는 건 예수님의 값비싼 희생을 헛수고로 만드는 짓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은혜’ 혹은 ‘은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카리스’라는 단어는 본래 왕과 같은 높은 권력자에게 호의를 입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은혜란 내가 수고하여 받는 급여와 같은 게 아닙니다. 은혜는 전혀 기대하지 않던 놀라운 선물과도 같습니다. 가령 천사 가브리엘이 갈릴리 나사렛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 예수를 임신하리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하였습니다. “메시아를 임신하게 해달라”며 부지런히 백일기도, 서원기도 따위를 한 처녀가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으로 그녀는 아기 예수를 임신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은혜를 입은 자”라고 한 것입니다. 마리아가 메시아 예수를 임신하는 은혜를 입었듯,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은혜’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선물”(고후 9:14)에 해당합니다. 도저히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 비싼 선물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십니다. 성경은 인류가 “모세에게서 율법을 받았고 예수님에게서는 은혜와 진리를 받았다”(요 1:17)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사건으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은혜는 마술쟁이 시몬이 그랬듯 애당초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토록 값비싼 은혜를 받고도 그것을 ‘헛되이’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교회 다니기 전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었다면 그가 바로 은혜를 헛되이 만든 게 아니겠습니까? 제아무리 귀한 하나님의 은혜일지라도 받는 자가 싸구려 취급하면 그 은혜는 싸구려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하여도 이단에 빠지면 그 은혜는 금세 변질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여야겠지만 각자 그 은혜를 잘 받아 간직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고귀한 직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기껏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만들어 가는 상황에 대해 몹시 우려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개척해 삼년 간 목회하던 교회입니다. 현재 신약성서에 수록된 바울의 편지들 가운데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분량이 제일 많습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낸 로마서도 길긴 하지만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내용 자체가 교회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주로 다루기보다는 교리적 가르침에 더 초점이 있습니다. 반면 고린도 전후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건강한 발전과 성숙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며 목회하였는지가 생생하게 드러납니다. 이 교회는 그가 지중해 이방지역에 세운 여러 교회 가운데 가장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신약시대 최고의 사도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조차 고린도 교회만큼 매우 다루기 힘든 상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파당분쟁이나 음행, 은사남용, 우상의 제물 논쟁, 거짓교사들의 침투 등 골치 아프고 복잡한 문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고린도에 상주하며 얽히고설킨 문제를 하나하나 정리하였다면 그나마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며 그 지역선교에 매진하던 상황입니다. 에베소를 떠나 고린도를 직접 찾아갈 형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디모데나 디도 같은 제자들 편에 편지를 들려 보내 고린도 교회 사태를 수습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는 일부 성과도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의 근본 체질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며 그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이 전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4)에 놀아나 바울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들이 볼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 거짓 교사들”에 비해 여러 모로 수준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말도 어눌한데다 신령한 은사에 있어서도 부족해 보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권위 출처는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베드로나 요한 같은 거물급 사도들을 들먹이며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의 복음을 왜곡했다고 폄훼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자 스스로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유명한 사도들이나 교회들 혹은 특별한 은사 따위를 내세워 자신의 사도권을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가문이나 출신성분으로 사도적 권위를 세우려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란 말로 사도권의 출처와 기반을 말합니다. 바울의 생각은 확고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역자라는 사실만으로 족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롬 8:31)라는 외침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바울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얻었다고 주장합니다(롬 1:5, 고후 1:1, 12). 그의 사도직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고자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꼭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 여겼기에 주님 앞에서 밤낮없이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 “환란, 궁핍, 곤경, 매 맞음, 투옥, 난동, 수고, 불면, 굶주림” 등을 겪으면서도 “많이 참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도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목회할 때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온갖 고생을 자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서른아홉 대의 매를 맞은 것만도 다섯 번이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고후 11:24)이라 했습니다. 배가 난파되어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도라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인도로 그런 고생은 안해야할 것 같아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일꾼이기에 이런 모진 고난을 겪으며 견뎌내야 하였습니다. 중도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겠지만 그는 주님의 은혜를 헛되게 만들지 않고자 끝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은총의 역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온갖 수난과 고생을 알아주기는커녕 그가 과연 사도인지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면 잘도 받아들였습니다(고후 11:4). 바울의 가르침은 시시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너무도 쉽게 미혹되었습니다. 농작물도 그렇습니다. 토종, 유기농 농작물들은 작고 벌레 먹어 볼품없어 보입니다. 반면 농약이나 화학비료 같은 걸로 키운 농작물은 큼직하고 윤기가 흘러 탐스럽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유기농 농산물보다는 크고 실해보이는 농약범벅의 농산물을 사가지만 그것은 먹을수록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눈에 비친 바울은 사도다운 면모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도라면 바울처럼 그렇게 자주 매 맞고 투옥되는 등의 고생살이를 하지 않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 권위에 대번 압도될 정도의 카리스마와 유창한 언변으로 신도들을 휘어잡는 자라야 참 사도가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바울은 역설의 수사학으로 자신을 변호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후 6:8-10). 여기에는 바울의 자화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겉보기엔 “속이는 자, 이름 없는 사람, 죽는 사람, 가난한 사람,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실패자였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떨거지 전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인 바울은 세속의 평판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역설의 은총을 깊이 깨달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극심한 환란 중에도 좌절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힘으로 묵묵히 돌파해 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가르친 은총의 역설을 맛보며 어떠한 처지에서든 주님의 일꾼답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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