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04/19
마음 문을 열라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눅 24:36-49>



4.19는 진행형

 4.19혁명 55주년인 아침입니다. 재작년 공부방 아이들과 부안에 갔을 때 신석정 문학관에 잠시 들른 적 있습니다. 신석정 시인이라면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라는 그의 시 때문에 막연히 서정시인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학관을 둘러보다 눈에 번쩍 뜨이는 시 하나를 발견하고 편견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 말아라 -4.19 혁명에 부치는 노래”라는 시였습니다. 신석정은 이 시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듯 당부합니다. “발버둥 치며 부르던/ 우리들의 조국이/ 목어 터져라 부르던/ 우리들의 조국이/ <피의 증언>으로 다시 숨을 타던/ 1960년 4월 19일을/ 사무치게 사무치게 잊지 말아라// 산의 의연한 자세로 하여/ 새 역사의 분수령에 서서/ 억압과 암흑을 물리치기에/ 구호를 입에 문채/ 더운피 흘리며 쓰러지던/ 우리들의 형제를 잊지 말아라” 신석정 시인의 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어느덧 4.19는 껍데기 관제 기념행사로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4.19혁명에 떨쳐나선 주역들은 이제 모두 백발성성한 노년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4.19가 지금의 헌법 전문에서조차 지워질까 걱정스럽습니다. 어쩌면 4.16 세월호 참사는 4.19의 집단망각을 깨우는 비상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4.16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많은 시민이 “국가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깊은 잠에서 깨어나 “진실을 인양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4.19혁명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과정에서 촉발되었습니다. 1960년 당시 이승만은 85세의 나이에 대통령에 출마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부통령에 출마한 이기붕은 협심증과 신경통으로 거동이 불편해 선거유세 한 번도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럼에도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세계 역사상 대통령선거에서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니 우선 당선시켜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먹고 징역을 살아도 내가 산다”며 경찰과 공무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노골적으로 부정선거를 저질렀습니다. 온갖 투표부정, 개표부정이 행해졌고 야당 참관인은 구타를 당해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선거일 당일에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선거를 불과 엿새 앞둔 1960년 3월 9일 여수에서는 야당의 간부가 경찰의 사주를 받은 깡패에게 구타당해 죽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암흑천지 세상을 뒤엎고자 학생들과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이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낸 사건이 4.19혁명입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4.19혁명은 이듬해 발생한 박정희의 5.16쿠데타에 의해 짓밟혔습니다. 그리고 5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4.19는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난 대선 때 3.15 부정선거 못지않은 엄청난 관권부정선거가 있었고 그 책임자들은 단죄되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4.19 정신을 소홀히 한 나머지 이 같은 불행이 되풀이 된 것입니다. 4.19가 교회력상 부활의 절기에 있는 건 단지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무기력하고 비겁하기만 했던 시민들이 깨어나 스스로 주인임을 천명하고 독재자를 끌어내린 건 일대 혁명이자 시민정신의 부활입니다.


문이 열리다

누가복음의 부활사건 보도는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 ‘기억’을 무척 중시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아침에 여성 제자들이 무덤에 찾아갔을 때 만난 천사들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같은 천사들의 말을 듣고 여성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눅 24:6-8)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을 본 사실과 예수님이 부활 예고를 하신 말씀에 대해 남성 제자들에게 알립니다. 하지만 남성 제자들 곧 ‘사도’로 호칭되는 자들은 “그 이야기를 헛소리로 여겼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둔 두 제자와 동행한 예수님은 실의에 잠긴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들으신 뒤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눅 24:25-26) 그리고는 그때부터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엠마오 두 제자에게 성경의 메시아 예언들을 환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성경 풀이를 듣는 동안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뒤 돌처럼 굳어지고 무뎌져서 도무지 깨닫지 못하던 그들 마음 속 심장이 다시 펄펄 살아나 고동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까맣게 잊고 있던 성경을 생각나게 해 주신 겁니다. 곧 기억의 재활성화입니다. 성경 말씀을 회상하고 주님과 더불어 저녁식사를 함께 할 때 두 제자의 눈이 열려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람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도 못할 만큼 시야가 좁습니다. 어리석게도 자기가 보고 있는 게 전부인줄로 착각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마음 문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외쳐봐야 “쇠귀에 경 읽기”에 지나지 않게 마련입니다. 반면 마음 문을 개방한 사람에게 하는 말은 굳이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먹습니다. 신경 써서 귀담아 듣고자 하기에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겁니다. 지난 주 목요 성경공부를 준비하며 모일간지 종교부 기자가 쓴 동광원 이현필 선생 관련 글을 읽다가 그 기자의 재미난 푸념을 보았습니다. 이현필 선생을 취재해 보니 이현필 선생이 세운 광주 봉선동 귀일원이 자신이 소싯적 살던 집에서 불과 10m 정도 거리더랍니다. 그런데 “수십 년 살면서도 ‘이현필’이란 이름을 한 번 들어본 적 없었다”며 아쉬워하였습니다. 그땐 ‘이현필 선생’ 같은 인물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가까이 살면서도 보이지 않았던 거겠지요. 설령 이현필 선생의 이름을 들었더라도 그 당시에는 “왜 저렇게 사나”하며 별 관심 없었을 겁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데 전이해가 없으니 중증장애인이나 결핵환자, 정신박약아들을 돌보며 독신 수도자로 사는 사람들 의 삶이 아름답게만 보였을 리 없습니다. 무엇보다 마음 문이 열려야 환히 보이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활 예수님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늘 누가복음은 일깨워 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예루살렘의 모처에 모여 있던 열한 사도에게도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뜻밖에도 예수님의 방문을 받자 제자들은 유령인 줄로 알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두려워”하던 반응이 조금 뒤에는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 반응으로 바뀝니다. 부활의 주님이 그들 곁에 오셨음에도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거나 크게 놀라고 기뻐 어찌할 줄 몰라 몹시 허둥대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이런 사도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즉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며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즉 엠마오로 가둔 두 제자에게 그러셨듯이 성경의 예언을 풀이해 주심으로써 당신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사건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일깨우십니다. 이때 “그들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다”는 말씀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 또한 사도들이 평소 까맣게 잊고 지내던 성경 말씀을 부활의 주님이 환기시켜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으로 자랐기에 예수님이 풀어주신 성경의 예언들은 익히 아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가령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 노래’만 해도 처음 듣는 말씀이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이 말씀은 수난의 메시아를 예언하는 말씀으로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의 설명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예언한 말씀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늘 기억하라

부활의 예수님이 여성 제자들과 사도들을 만나 하신 일은 ‘기억의 환기’였습니다. 익숙히 알던 내용이지만 까맣게 잊고 살던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굳게 닫힌 마음 문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사복음서 기록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처럼 마음 문을 닫아걸고 있다면 그 부활의 주님과 가까이 동행하면서도 그를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오늘의 사건들에 비추어 기억해 내지 않는다면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사건에 동참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의 빗장을 걷어내야 합니다. 마음의 가려진 눈이 먼저 뜨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부활의 주님이 낯선 길동무로 우리와 동행하셔도 그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인생의 여행을 마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사도들과 마지막으로 만나 “그들의 마음 문을 여시고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언으로 “모든 민족에게 죄 용서와 회개가 선포되어야 한다.”며 선교의 사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그때 그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과 성경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재현해야할 오늘의 사건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부활의 주님을 맞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와 동행하며 부활의 증인으로서 이 어두운 땅 가운데 참 생명과 평화, 정의의 싹을 틔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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