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8/18(화)
자유인의 법  
이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수천 대 자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출애굽기 20:1-7>



세 번째 돌판

그리스도인치고 ‘십계명’을 금시초문이라 할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약성서에 ‘주기도문’이 있다면 구약성서에는 ‘십계명’이 있다 할 만큼 중요한 말씀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십계명이 이미 16세말에 조선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습니다. 예수회 신부로서 중국선교에 큰 공헌을 한 마테오리치와 그의 동료들이 1584년 마카오에서 한문으로 된 교리서 <신편서축국 천주실록>을 인쇄하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십여 년 후인 임진왜란 때 조선의 한 병사가 매우 닳아빠진 그 책을 갖고 있는 게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돌려 읽느라 너덜너덜해진 것입니다. <신편서축국 천주실록>은 일종의 교리서인데 이 책의 부록에 십계명이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십계명의 한반도 전래 시기는 16세기보다 훨씬 빠를 수도 있습니다. 5세기 중반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가 7세기경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당나라에 널리 전파된 적 있습니다. 그 시절 경교가 신라에도 전해진 흔적을 보여주는 돌십자가나 마리아관음상 같은 유물들이 경주에서 출토되기도 하였습니다. 경교가 신라에 전래된 게 사실이라면 십계명이 한반도에 전해진 시기는 7세기로 앞당겨질 수도 있습니다. 경교도 십계명을 중국의 실정에 맞게 번역해 보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계명은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가르침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유대교도 역시 십계명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십계명은 토라의 여러 계명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이 손수 두 개의 돌판에 새겨주신 말씀이고 율법의 요약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계명이 나오는 출애굽기 20장에는 하나님이 이 계명을 친히 돌판에 쓰셨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한참 뒷장인 출애굽기 31장 18절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손수 돌판에 쓰신 증거판 두 개를 그(모세)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만 봐서는 하나님이 돌판에 쓰신 내용이 십계명인지 다른 율법들인지 불분명합니다. 반면 모세는 신명기의 십계명 본문에서 주님께서 십계명을 두 돌판에 새겨서 자신에게 주셨다(신 5:22)고 말합니다. 이처럼 신명기는 하나님이 십계명을 두 돌판에 손수 쓰셨음을 강조합니다(신 4:13). 출애굽기에도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였다는 기록(출 34:28)은 있으나 그 주체는 하나님이 아니고 모세입니다. 이때 말하는 돌판은 모세가 직접 준비해 시내 산으로 가져온 것인데 그는 하나님 명령대로 그 돌판에 십계명을 새깁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직접 새겨주신 첫 번째 돌판을 받아 하산한 뒤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 모습을 보고 몹시 분개해 던져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번째 돌판은 스스로 준비해 오라하시고 십계명도 판에 직접 기록하게 하십니다. 아쉽게도 우리는 하나님과 모세가 직접 새겨 기록한 십계명 돌판을 보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 말씀으로 그 십계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따름입니다. 십계명 돌판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십계명이 너무 낡아서인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십계명은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많이 밀려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조차 십계명을 가벼이 여기며 힘써 지키려하지 않습니다.    

권성훈 시인은 “21세기형 십계명”에서 이런 세태를 다음과 같이 풍자합니다.

하나님을 먹은 뱀으로 술을 담갔지/ 하늘이 든 독이 부글거리는 밤
농염한 혀가 시시각각 갈라지며/ 똬리 틀은 항아리에서 까마득한 말씀이 새어나오네
다른 신을 믿으라/ 미신을 섬기라/ 하나님을 욕하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마라
네 부모를 공경하지 마라/ 살인하라/ 간음하라/ 도둑질하라/ 거짓말하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하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새로운 아이러니라...(하략)

이 시대에 모세가 살아 있어 또 다시 시내 산 정상에 올라 주님께 세 번째 십계명 돌판을 받는다면 권 시인이 말한 “21세기형 십계명” 같은 내용을 실제로 받아내려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로 기존의 십계명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충격과 도전을 주지 못한 채 케케묵은 고대 법조문 같은 취급을 받는 실정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 무수한 ‘다른 신 숭배’와 하나님에 대한 모독, 살인과 간음, 도둑질, 거짓말 따위가 판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 마라”는 금령이 아니라 차라리 “~하라”고 역설적으로 모든 금령을 해제해야 십계명이 누굴 위한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비로소 알아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라의 핵심+

 종교개혁자 루터는 십계명을 일컬어 “모든 약속 중의 약속, 모든 신앙의 원천이며, 그리스도 복음의 약속을 포괄하는 지혜의 원천”이라 칭송하였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십계명에 대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구원하시고 주신 참되고 영원한 의의 규범”이라 말합니다. 개신교를 대표하는 두 종교개혁가가 십계명의 가치를 이처럼 높게 평가하였다면 그럴만한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단지 구약 모세 율법의 요약만은 아닙니다. 십계명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실 율법을 요약하는 말씀이라면 굳이 십계명이 아니라도 구약성서에서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성구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 6:6)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그럼 십계명이 율법의 요약이란 의미 말고 그리스도인에게 왜 중요합니까?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묻는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며 십계명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합니까?”라고 묻자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증언하지 말아라, 속여서 빼앗지 말아라,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하지 않았느냐?”(막 10:19)며 십계명을 환기시키십니다. 만일 예수님의 이런 언급이 없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십계명이 유구한 세월동안 중요한 계명으로 평가받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도 십계명을 율법의 핵심 내용으로 언급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간음, 살인, 도둑질, 탐내지 말라” 따위의 모든 계명의 요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롬 13:9)라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선언합니다. 야고보 선생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최고의 율법’이라 말하면서 십계명 중 하나만 어겨도 전체를 범한 셈이 된다고 지적합니다(약 2:8-11). 즉 사도 바울과 야고보 선생은 십계명을 율법의 핵심으로 보면서도 그 십계명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요약할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을 비롯해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 선생 등 초기교회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십계명을 중시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십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간명하면서도 오래된 이정표에 해당합니다.


자유인의 법

하나님은 십계명의 첫머리에서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출 20:2)라고 먼저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서도 똑같습니다(신 5:6).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왜 이렇게 자기소개부터 하시는 걸까요?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는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떠돌다 마침내 시내 산에 다다랐을 때입니다. 모든 백성은 산 밑에서 대기하고 모세와 아론은 산꼭대기로 올라가 십계명을 비롯해 주님이 주시는 토라(율법)를 받습니다.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구원해 내신 분임을 그새 망각하였을까봐 그 사실을 일부러 떠올리신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 종살이할 때 이끌어낸 주”라고 하심으로써 이스라엘과 자신의 관계를 밝히심과 동시에 그들이 지켜야할 가치와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십니다. 즉 십계명은 많은 율법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의 요약본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생활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십계명의 명령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된 자유민들을 위한 계명입니다. 십계명의 포인트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유를 쟁취한 백성들에게 전하신 자유의 선물과도 같습니다. 그러기에 십계명은 사실상 어떠한 처벌도 상급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하지 말라”와 “~하라”의 형태로만 이루어진 열 가지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주님의 도움으로 힘겹게 얻은 그 자유를 잘 간직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려면 이렇게 하라”며 십계명의 지침을 주십니다. 즉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의 고통과 억압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자유의 길로 이끌어낸 주님이다. 내가 진정한 하나님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내 앞에서”라고 번역된 말씀을 직역하면 “내 얼굴 맞은쪽에”입니다. 우릴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얼굴이 거울처럼 빤히 쳐다보고 계시는데 그 맞은편에다 우상들을 놓고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자유인을 위한 법입니다. 이 법은 우리를 자유와 해방으로 이끄는 오솔길이지 억압과 굴종의 족쇄로 주어진 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18)고 하셨습니다. 삶의 좌표가 흔들리고 방향을 잡기 힘든 이 시대에 주님이 주신 십계명의 표지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예수님이 안내하신 길을 따라 이 법을 성취함으로써 참된 자유인의 삶으로 함께 나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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