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2/17(화)
선하신 뜻에 따라  
선하신 뜻에 따라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여의고나서, 요셉이 자기들을 미워하여, 그들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하면 어찌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요셉에게 건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남기신 유언이 있습니다. 아우님에게 전하라고 하시면서 ‘너의 형들이 너에게 몹쓸 일을 저질렀지만, 이제 이 아버지는 네가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우님은, 우리 아버지께서 섬기신 그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이 말을 전해 듣고서 울었다. 곧 이어서 요셉의 형들이 직접 와서, 요셉 앞에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리는 아우님의 종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다.
                                                            <창 50:15-21>



헝클어진 실타래

 이삭은 부인이 리브가 한 사람이었고 슬하에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두었습니다. 두 아들은 부모와 달리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에서는 가나안 여인 셋을 아내로 삼아 다섯 아들을 두었습니다. 야곱은 본처와 후처를 합해 부인이 넷이었고 자녀도 아들이 열둘, 딸이 하나였습니다. 딸은 히위족 족장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디나 혼자만 언급(창 34)되어 그렇지 사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살던 시대는 자녀 많은 것을 큰 복으로 여겼습니다. 야곱은 젊은 시절 무척 고생했으나 많은 재물과 자녀를 두었으므로 겉보기에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날 없다”는 속담이 있듯 그는 자녀문제로 죽는 날까지 근심하며 시달렸습니다. 특히 요셉과 그의 형들 사이의 갈등으로 오랜 세월 불행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이 너무 보기 싫어 들판에서 아무도 몰래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넷째인 유다가 뜯어 말리며 “그래도 우리의 피붙이인데 죽이진 말고 차라리 노예로 팔아넘기자”고 설득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요셉은 형들 손에 살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열 아들은 왜 그리 동생 요셉을 미워하였습니까? 한 마디로 아버지의 편애 때문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지 않았다면 요셉과 형들의 사이가 살해 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로 틀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형들은 아버지가 그를 자기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요셉을 미워하여, 그에게 말 한 마디도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다.”(창 37:4) 부모가 자녀들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 죽자 사자 싸우게 만드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편애하면 됩니다. 이는 집안에 불행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부모의 편애로 형 에서와 큰 갈등을 겪고도 거기서 이 같은 교훈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아내 라헬이 낳은 자식이라고 요셉과 베냐민을 아들들 가운데 각별히 더 챙겼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아내 라헬이 일찍 죽고 그녀가 낳은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만 남았으니 아버지 야곱은 어머니 없는 그들에게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 화려한 옷을 지어 입히고 늘 자신 곁에 두며 잔심부름이나 시킨 일은 잘못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에게서 차별받는다고 느꼈고 그럴수록 동생 요셉을 더욱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소년 시절 요셉은 어지간히도 눈치가 없었습니다. 형들이 그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평소 언행을 조심해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고 밭의 곡식단이나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더라는 이상한 꿈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늘 자신을 편들어주니 우쭐해져 형들 앞에서 자주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동생을 어떤 형이 좋아하겠습니까? 요셉의 형들은 참다못해 아버지 몰래 그를 들판의 빈 구덩이에 쳐 넣고 죽이려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요셉은 그의 형들에 의해 이집트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끔찍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하는 화해

고대 가나안 땅은 가뭄이 잦았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가뭄을 피해 이집트나 그랄 땅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야곱의 집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려 7년간의 가뭄이 계속되자 야곱의 아들들은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갔다가 거기서 총리대신인 요셉을 만났습니다. 요셉은 대번 그의 형제들을 알아봤으나 형들은 그가 요셉인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이집트의 총리대신으로만 알고 감히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파라오를 모실 때 나이가 서른이었습니다(창 41:46). 10대 소년일 때 노예로 팔려가 서른에 일약 이집트의 2인자의 지위에 오른 거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시치미를 뗍니다. 그는 형들을 이집트 땅을 염탐하러 온 첩자로 몰아 사흘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을 인질로 삼아 남겨놓고 나머지는 돌려보내며 막내인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그들은 첩자임에 틀림없다며 압박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은 당연히 경악하였습니다. 요셉을 잃은 것만도 기막힌데 이제 자칫하면 베냐민까지 잃게 생겼으니 오죽하였겠습니까? 형들이 부친 야곱을 겨우 설득하여 한참 만에 베냐민을 데리고 이집트에 갔을 때도 요셉은 자신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동생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몰래 넣어 그를 도둑으로 몰아 형제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하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자신이 요셉임을 밝혔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 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4-5) 이처럼 요셉은 자신이 이집트에 먼저 내려온 과정을 집안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하는 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형들을 최대한 안심시키고 그들과 눈물의 화해를 합니다. 하지만 이로써 지난날의 해묵은 앙금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두 차례나 형들을 시험한 사실에서 보듯 그는 형들과 처음부터 마음 터놓고 대화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가 이집트에 왔다고 고백하였으나 그 말을 곧이들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아마 그냥 입에 발린 의례적인 표현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아직 살아 있으니 원수 갚기를 잠시 유보할 따름이지 부친 사망 뒤에 요셉이 무슨 일을 벌어질지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야곱이 사망하자마자 형들은 요셉에게 편지를 써서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는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요셉과 그의 형들의 경우, 용서와 화해가 한 차례로 끝나지 않고 거듭되고 있음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과의 화해를 다 끝냈다고 생각하였을지 모르나 형들은 심중에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요셉이 언젠가는 복수할 것이라 여기고 내심 불안과 공포에 떨어야 하였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까?”라고 말하며 보복의 의사가 없음을 밝힙니다.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라는 말로 형들을 해칠 뜻이 없음을 거듭 확인해 주었으나 형들은 선뜻 믿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선하신 뜻에 따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 16:9)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 여정을 돌아보며 그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과정에서 주님의 구원 섭리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다시금 이렇게 말합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창 50:20-21a). 요셉이라고 왜 형들이 밉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다 못해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입니다. 아버지와 생이별을 시킨 그들에게 언젠가는 꼭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형들을 만났을 때 그들을 염탐꾼이나 도둑으로 몰면서 두 차례나 큰 곤경에 빠뜨렸습니다. 형들을 시험하기 위한 거였으나 그것도 복수의 하나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일체 하나님은 직접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가령 요셉에게 천사가 환상 중 나타나 “네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것은 너의 온 가족을 구원하기 위함이다.”라는 언질 한 번 준 적이 없습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인생 여정에 관여하신 주님의 손길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은 이런 주님의 섭리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렘 29:11) 우리가 절망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조차 주님은 우리가 그 사건 가운데서 주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일어서기를 기대하십니다. 인간이 생명과 구원의 길에서 자꾸 이탈하여 상황을 엉망으로 만들어 갈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온갖 죄악의 횡행하는 세상이지만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선으로 바꾸어 구원하시고자 힘쓰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좋구나!’라고 연거푸 경탄하셨습니다. 그렇게 창조사역은 끝난 게 아닙니다. 주님의 새로운 창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고자 애쓰십니다. 어리석은 복수의 악순환을 끊고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서 주님의 선하신 섭리를 발견해 응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억압, 착취, 오염, 무자비가 지배하는 세상을 생명과 평화 자비의 세상을 만드는 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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