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9/3(수)
살아있는 소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으며,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게 하셨습니다. 이 유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시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사랑하며, 지금 그를 보지 못하면서도 믿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을 누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벧전 1:3-9>


위기의 대한민국호

세월호 침몰 참사로 온 나라가 벌써 열흘 넘게 비탄에 잠겨 있습니다. 안산지역은 사망한 단원고 학생들의 운구차 행렬과 통곡소리가 연일 계속된다 합니다. 원치 않는 일이지만 사망사고는 늘 발생합니다. 세월호 침몰 참사가 단순히 그런 ‘사고’였다면 다들 이토록 비통해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사고가 난 뒤 수습과정에서 당국과 관계자들의 부실, 무능력, 거짓말 등이 반복되면서 오늘의 ‘대량참사’를 낳았습니다. 이건 어쩌다 발생한 우발적 참사가 아닙니다. 지금 대한민국호가 얼마나 위태한 지경에 놓였는지 경고하는 예고편에 해당합니다. 이대로 가다간 앞으로 세월호 참사를 훨씬 능가하는 끔찍한 일도 벌어질 공산이 큽니다. 새전북신문 정윤성 화백은 만평에 이렇게 썼습니다.

세월호... / 승객버린 선장 선원.../ 무능하고 책임 떠넘기는 정부.../ 초기 대응 실패, 부실구조, 인양 재촉, 욕설 해경.../ 희생자 가족 범죄자 취급하는 경찰.../ 막말 망언 정신나간 행동 정치인.../ 눈치만 보는 공무원... / 입닫은 지식인 전문가... / 악성댓글 유언비어 네티즌... / 오보 불신자초 언론.../ 그리고 이런 세상이 되도록 동조한 / 우리 어른들... 악마를 보았다.

이 글에 한 네티즌은 “악마 같은 자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있으니...이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보통 상상과 달리 악마는 뿔 달린 괴물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속임수와 거짓에 능통합니다. 악마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거나 때로 ‘빛의 천사’로 변신까지 하여 사람들을 유혹하는 교활한 존재입니다(고후 11:14). 실제 현장에서는 구조 수색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음에도, 지난 목요일(24일) 한 신문은 민·관·군 합동 “사상 최대 규모 수색”이 진행 중이라고 허위 보도하였습니다. 이 기사로 말썽이 일자 해당 기자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변명하였답니다. “저라고 용빼는 재주 있겠습니까? 위에서 시키니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죠. 그 위에 프런트도 결국 사장 딱가리, 사장은 대통령 딱가리... 다 그런 거잖아요. 그리고 그 정부 뽑아준 건 여러분들이구요. 왜 저한테만 그러시는지. 솔직히 여러분은 OOOO 기자 시켜도 저랑 똑같이 행동할꺼잖아요.” 지금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이 글이 잘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싶습니다. 부끄러움, 양심, 진실, 책임감 따위를 다 괄호치고 그저 ‘먹고사니즘’ 노예가 되어 사는 우리가 오늘의 사태를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슬며시 고개 드는 ‘내 탓이오’ 식의 섣부른 자성논리를 경계합니다. 그것이 관련자들의 책임을 분산시킴으로써 잘못을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두의 자성과 회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학이나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불의한 사회구조를 혁신하는 행동과 참여로 나타나야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 실질적인 변화도 가져올 것입니다.


산 소망을 찾는다

 2011년 부산 영도 조선소 크레인에 올라 309일간 농성한 한진중공업 김진숙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사측의 부당한 대량 정리해고에 맞선 목숨을 건 고공농성을 하였습니다. 농성이 장기간 지속되자 시민들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희망버스’로 응답하였습니다. 이 희망버스는 밀양 송전탑 공사현장과 쌍용차 평택 철탑농성장에도 이어진 바 있습니다.  이렇게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농성장을 찾는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절망적인 상태임을 드러냅니다. 지난 목요일(24일)에도 쌍용차 해고 노동자 한 분(정한욱씨)이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2009년 대량해고로 직장을 잃고 복직투쟁을 통해 지난 2월 해고무효소송에서 복직판결을 받았으나 끝내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사측은 법원의 복직 판결을 수용하지 않고 대법관, 고등법원장 출신이 포함된 19명의 호화 변호인단을 꾸려 대법원에 항고하였습니다. 법원이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 판결만 내린 것은 아닙니다. 2009년 공장점거 파업에 대해 사측과 경찰이 노조에 청구한 손배 가압류 청구소송에서 47억을 배상하라 판결하였습니다. 해고도 모자라 천문학적 손해배상금으로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최근 ‘4만 7천원 노란봉투 운동’도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권마저 돈으로 무력화시키려는 지금의 절망스런 체제를 어떻게든 바꿔보고자 시민들이 점차 손을 맞잡고 있습니다. 실로 암담한 시대지만 절망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살이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기”(전 9:4a)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는 1세기 말에서 2세기 초엽 본도와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지역의 소외되고 압제받는 성도들을 권고 · 격려하고자 기록되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사도 베드로라고 밝히고 그 권위를 덧입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실제 누가 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로마에 머물며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여 지금의 힘든 고난을 잘 견디어 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서는 그 당시 성도들이 당하는 극심한 ‘고난’의 상황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시련의 불길과 슬픔, 차별, 억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그들은 “방탕, 정욕, 술 취함, 환락, 연회, 가증스런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다(벧전 4:3)”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뒤집어 보면 성도들을 둘러싼 세계는 이 같은 죄악 가운데 깊이 빠져 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2세기 초 로마작가 플리니(pliny)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전들이 황폐해지고 축제들이 시들해졌으며 이교신전에 바친 고기를 시장에 내다파는 상거래가 중지되었다고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일컬어 “인류를 증오하는 족속”이라는 맹비난을 퍼붓습니다. 비단 플리니만 기독교인을 벌레 보듯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로마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며 박해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당시는 황제숭배가 널리 행해지던 시절인데 그리스도인들은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기에 ‘고집불통’으로 불리며 소외, 차별, 탄압에 시달렸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저자는 견디기 힘든 고난을 겪어야했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음”을 환기시킵니다. 이에 앞서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셨다”고도 말합니다. 이때 ‘새로 태어남’이란 세례를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세례로써 새로 낳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세례에 대해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벧전 3:21)이라 정의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이 세례 받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롬 6:4-5)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부활의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때문에 감당키 어려운 고난과 슬픔, 시련 가운데서도 절망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하여 벨릭스 총독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는데, 나를 고발하는 이 사람들도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곧 그것은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의 부활이 장차 있으리라는 것입니다.”(행 24:15) 우리가 인생의 고난과 슬픔, 시련 중에도 기뻐하며 생기를 잃지 않는 것은 부활의 산 소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위로와 기쁨, 평안, 생명력을 공급합니다(히 6:18-19).


희망을 낳으라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엄청난 환란을 당하여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른” 적 있다고 말합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낄” 정도가 되었을 때 주님은 그와 동료들을 이 위험한 죽음의 고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건져주시며 또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라 희망한다”(고후 1:9-10)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품은 산 소망은 새 희망을 낳습니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일지라도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괴롭고 힘든 생활이 계속되어도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구이도는 어린 아들과 나치 강제수용소에 갇히는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으면서도 특유의 쾌활함을 잃지 않습니다. 그것이 구이도의 아들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저자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 3:15)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도처에서 ‘소망의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그 자신이나 세상에 두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부활의 산 소망을 간직하고서 주님이 이루실 그 나라를 고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절망 가운데 놓인 이 땅 가운데 새 희망을 잉태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들답게, 이 세계를 장악하고 절망으로 이끄는 악마의 체제와 맞서 끝까지 꿋꿋이 싸워나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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