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3/23(일)
풍랑 가운데서  
그 날 저녁이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자.” 그래서 그들은 무리를 남겨 두고,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함께 다라 갔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오므로, 물이 배에 벌써 가득 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예수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서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마가복음서 4:35~41>



고깃배 타고서

복음서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행보를 보면 육로는 주로 ‘도보로’ 갈릴리 호수는 ‘고깃배로’ 이동하십니다. 그는 걸어 다니실 때보다 배를 타고 이동하실 때 훨씬 빨리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어부들을 제자로 삼지 않으셨으면 갈릴리 호숫가 곳곳을 쏘다니며 전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고깃배가 있었기에 기동력 있는 복음 전파가 가능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셨다는 언급이 복음서에 모두 스무 번 이상 나옵니다. 그만큼 고깃배는 예수님의 요긴한 선교 수단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처럼 직접 돌아다니지 않고 요단강 근처 광야에 머물며 전도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예수님은 직접 찾아다니셨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전도 방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를 이동수단으로만 사용하신 게 아닙니다. 배를 강단 삼아 사람들을 가르치시기도 하셨고 제자들과 고기도 잡으셨습니다. 배에서 식사를 하거나 잠도 주무셨고 이동하실 때 제자들을 가르치시기도 하십니다. 이처럼 고깃배는 예수님의 중요한 일상생활 공간의 하나였습니다.

지난 1986년 심한 가뭄으로 갈릴리 호수가 바닥을 드러낸 적 있습니다. 그때 고대 막달라 근처 호수의 개펄에서 배의 형체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시던 가버나움에서 약 8킬로 떨어진 곳입니다. 이 배를 조심스레 캐내어 복원해 보았더니 폭이 2.5m, 길이가 8m로 약 13명쯤 탈 수 있는 규모의 고깃배였습니다. 배에서 함께 발견된 단지와 등잔들 그리고 목재에 대한 탄소 14 연대 측정결과 이 배는 주후 50년경의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즉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의 갈릴리 호수의 고깃배였습니다. 이 배는 진흙에 뒤덮여 있어서 세균과 부식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 낡아 못 쓰게 되자 쓸 만한 부위는 뜯어내고 나머지 형체만 버린 배라 온전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 배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떤 형태의 배를 타고 다녔는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탔던 배는 렘브란트의 ‘갈릴리 호수의 풍랑과 예수’(1633)라는 그림에 나오는 것 같은 근사한 돛단배가 아니었습니다. 돛도 없이 노를 젓고 다니던 거룻배였습니다. 배 밑바닥은 물이 새지 않게 역청을 발랐고 삼나무 같은 목재가 부족해 질 나쁜 목재의 널빤지들로 얼기설기 덧댄 배로 추정됩니다. 범선을 타고 가다가도 폭풍우를 만나면 두려워 덜덜 떨게 마련인데 이처럼 조악한 고깃배를 타고 가다 그런 일을 당하면 어쩌겠습니까? 폭우에 가랑잎 떠내려가듯 누구든 속수무책, 혼비백산하는 게 당연할 것입니다. 한밤중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갑작스레 불어 닥친 광풍을 만나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습니다.


광풍을 잠잠케

갈릴리 호수는 길이가 무려 약 20km, 폭이 11km에 달합니다. 그래서 복음서도 호수라고 하지 않고 ‘바다’라 부를 때가 많습니다. 이 호수 주변은 해발 500m~1000m에 달하는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높은 산이 갈릴리 북부의 해발 2700m 높이의 헐몬산입니다. 이 헐몬산을 정점으로 할 때 갈릴리 호수는 맨 밑바닥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의 해수면보다 200m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낮에는 찌는 듯 더운 기후를 보이고 밤에는 호수의 상공으로 지중해의 찬 공기가 내륙으로 급속히 이동합니다. 이때 부는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바꿔 아래로 내려 불면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럴 경우 잔잔하던 호수가 순식간 폭풍으로 요동치기에 작은 고깃배 정도는 쉽게 난파될 수 있습니다. 기상학자들이 1940년대 갈릴리 호수를 관찰해 보았더니 5년 동안 매우 강한 폭풍이 겨울에 두 차례 발생하였답니다. 이때 폭풍은 배를 집어 삼킬 만큼 높았고 자욱한 안개를 동반하였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만난 폭풍이 반드시 이와 똑같은 거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치더니 큰 파도가 일어 배 안에 물이 가득 찼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소호 요트경기장에서 아들과 카약을 타다가 어디 펑크가 났는지 물이 새어 들어와 겁이 더럭 난 적 있습니다. 유집사님 팀이 기다리는 섬에 닿기까지 거의 혼자서 열심히 노를 저었는데 왜 그리 섬이 멀게 느껴지는지 진땀을 뺐습니다. 이처럼 실 펑크로 카약에 조금만 물이 새어 들어와도 침몰할까 두려운데 풍랑으로 배 안에 물이 가득한 상태였다면 제자들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배 안에서 세상모른 채 곤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에는 물이 가득하고 큰 풍랑으로 제자들은 죽느냐 사느냐 사투를 벌이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그렇게 맘 편히 잠드실 수 있었을까요? 이런 예수님 모습은 대번 예언자 요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요나도 그가 타고 가던 배가 큰 풍랑을 만나 요동할 때 예수님처럼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선장은 그런 요나를 발견하고 “당신은 어찌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있느냐?”며 “일어나서 당신 신에게 부르짖으라”(욘 1:5-6)고 요청하였지요. 선장이 깨우지 않았다면 요나는 남들이 두려움에 떨며 아우성치든 말든 계속 잤을 것입니다. 그는 아예 죽을 작정하고 하나님 명령을 거스르며 도망치던 중이라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대는 요나의 표징 밖에는, 아무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 16:4)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요나는 풍랑을 만난 장면이나 사흘 만에 살아난 일이나 비슷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흔들어 깨운 뒤에야 예수님은 일어나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고요하고 잠잠하라”며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멈추게 하십니다. 이때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마치 살아 있는 어떤 생명체에게 말씀하시듯 명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귀신들린 자나 악마를 상대하실 때 이 같은 명령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는 큰 풍랑을 일으켜 자신과 제자들을 집어 삼키려했던 바람과 바다도 마치 귀신이나 악마 같은 존재처럼 대하십니다. 고대 바벨론 사람들은 티아맛이란 혼돈의 신이 바다를 다스린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노여움 때문에 종종 큰 풍랑이 일어나 배가 파선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고요하고 잠잠하게 하십니다. 여러 차례 명하신 것도 아닙니다. 단 한번 명하시니 즉시 그대로 되었습니다. 시편의 한 시인은 “주님, 큰 물결이 나를 덮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깊은 물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큰 구덩이가 입을 벌려 나를 심키고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해주십시오.”(시 69:15)라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에 의하면 큰 풍랑에서 구원을 베푸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폭풍으로 집채만큼 큰 파도가 치솟아 들이 친다면 그것을 누가 당해내겠습니까?


이분은 누군가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그 무섭던 풍랑이 금세 잠잠해지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는 앞서 큰 풍랑을 맞아 두려워하던 그 두려움과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두려움입니다. 신적인 외경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들 무서워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며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큰 풍랑으로 죽느냐 사느냐하는 판에 곤히 잠드신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대번 깨어나 살려달라고 야단일 텐데 예수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주무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주무실 때 제자들은 깨어나 야단법석을 피우고 제자들이 곤히 잘 때 예수님은 홀로 밤새워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때(카이로스)에 대한 인식이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떨며 아우성쳤던 것은 그들이 배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심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은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직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 한 마디에 바람과 바다가 잠잠해지자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하고 서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가까이 계신 주님을 몰라보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모두 예수님의 풍랑 제압 이적을 보도합니다. 세 권의 복음서가 이 사건을 합창하듯 전한다는 사실은 초기 교회가 예수님의 이 이적을 널리 공유하였음을 나타냅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이 풍랑을 제압하신 이적을 중시하였을까요? 이 이적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광풍을 어떻게 극복하며 살아야하는지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잔잔하던 바다가 표변하여 세찬 바람으로 요동치는 일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 자체에 대해 놀라고 이상히 여길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관심 가져야할 사항은 그런 갑작스런 인생의 큰 풍랑을 만났을 때 어떤 자세로 헤쳐 나갈 것인가 입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신 이적을 두 차례 행하십니다. 한 번은 본문이고, 다른 한 번은 제자들만 있는 상황에서 역풍이 불어 그들이 괴로이 노를 젓는데 주님이 물위를 걸어 배 안에 들어오시자 바람이 그친 장면입니다(막 6:45ff). 제자들은 주님이 곁에 계시는데도 풍랑에 쩔쩔맸고 안 계시지만 물위라도 걸어오실 것임을 모르고 역풍에 버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며 수많은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믿음다운 믿음’을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거센 풍랑이 닥치자 주님을 까맣게 잊고 살려 달라 아우성쳤습니다. 우린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빌 2:10).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요,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이 주님을 우리 중심에 모시고 인생의 어떤 거센 풍랑이 닥치더라도 두려움 없이 굳센 믿음으로 담대히 헤쳐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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