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위솔
2014/5/8(목)
산 믿음을 위하여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너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행함이 있다. 행함이 없는 너의 믿음을 나에게 보여라. 그리하면 나는 행함으로 나의 믿음을 너에게 보이겠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 아,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가?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약 2:18~25>



껍데기 믿음

지난달 4일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란 단체가 발표한 ‘2013 한국교회 사회적 신뢰도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의 신뢰도(21.3%)가 천주교(29.2%), 불교(28%)에 비해 많이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교회가 사회봉사 활동은 다른 종교에 비해 열심히 하고(개신교 41.3%, 천주교 32.1%, 불교 6.8%), 사회 통합이나 발전에 기여한다(58.6%)는 평가를 받은 것은 그나마 다행입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다수가 한국교회를 불신하는 가장 큰 요인은 “언행일치가 안돼서”(24.8%)입니다. 그 다음이 “교회의 비리(21.4%),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입장(10.2%)” 순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가장 힘써야할 일로는 “윤리와 도덕 실천운동”이 꼽혔습니다. 물론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란 단체가 글로벌리서치란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 조사한 거라 이런 결과가 나왔을 가능성도 일부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수긍할만한 조사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신앙과 삶에서 크게 괴리되어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최근 한 대형교회 원로목사가 교회에 백억 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재판 이후 맞은 주일예배 설교에서 “근래 생애 최대 고난을 맞았지만, 그걸 통해 회개와 성령의 변화로 진주가 되는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교인들은 이구동성 “아멘”하며 박수를 쳐 화답하는 걸 보았습니다. 교인들 앞에 무릎 꿇고 백배 사죄해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도 상황이 전혀 딴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세상 속에 있다는 말은 곧 세상과 영향을 주고받게 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반대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라고 교회에 항상 다 나쁜 영향만 끼치는 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때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어떤 필터로 걸러내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평소 무얼 이야기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암암리에 다 지켜봅니다. 예수 믿는다는 자들은 뭐가 다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언론에 교회의 재정 비리나 분쟁이 종종 보도되는 걸 보거나 주변의 교인들이 거짓과 욕심 많은 행동들을 할 때는 당연히 실망하고 불신하게 됩니다. 신자들이 비신자들에게 “대체 무얼 믿기에 저러나”하는 말을 들으며 비웃음거리가 될 때, 이는 신앙의 위기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을 세속의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회와 세상의 잣대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 말 자체는 옳습니다. 하지만 그게 교회의 불의한 관행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지난주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가 전주의 어느 중형교회에서 목회하는 목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는 “지금 같은 교회 시스템에서는 부교역자들을 위한 노조를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하였습니다. 담임 목사가 원한다면 언제든 대책 없이 해고가 가능하기에 생계자체의 곤란이 크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흔히 ‘주님의 일 하는 분이니 그분이 알아서 해주시지 않겠냐’고 하는데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냐? 사회에서는 해고되면 실업급여라도 받는데 교회는 그런 장치조차 없다”고도 지적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부교역자도 아닌 중형교회 목회자에게서 들으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교회와 세상 기준은 다르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과연 더 나은 상태인가를 먼저 보아야할 것입니다. 무턱대고 “믿음으로!”를 외치기 전에 그 믿음의 알맹이가 튼실한지 잘 헤아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과 실천

제퍼슨은 “무식이 오류보다 낫다.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가 그릇된 것을 믿는 자보다 진실에 더 가깝다”고 말합니다. 잘못된 믿음은 거짓과 불신의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또 맹신이 얼마나 위험한 지는 지구촌의 각종 종교분쟁의 비극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언행일치가 안 된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 근본 원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그 신앙 자체가 뒤틀려 있기 때문입니다. 걸핏하면 “믿습니까? 아멘”을 외치지만 무얼 믿는다는 건지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성공주의, 승리주의 욕망을 부추기고 강화하는 것들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과정은 괄호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 성공하여 십일조 많이 하는 것만이 하늘의 축복인줄로 착각합니다. 여기에는 ‘오직 믿음’이란 종교개혁자들의 구호에 대한 그릇된 이해가 톡톡히 한몫하고 있습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로마서 1장 17절과 히브리서 10장 38절을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각각 번역하였습니다. 하박국서나 로마서, 히브리서 원문에 없는 ‘오직’이란 표현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이는 루터의 독일어판 번역 성경의 영향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천주교의 행업주의를 비판하고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여 교회를 개혁하고자 일부러 그렇게 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달라졌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성서 원문에도 없는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 껍데기만 남은 믿음지상주의를 낳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도 바울과 야고보 선생은 믿음과 행함에 대해 말하면서 똑같이 아브라함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가르침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닌ㅁ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창 15:6)는 창세기 말씀을 인용하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아무런 공로가 없었지만 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는 사례로 행위보다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반면 야고보 선생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냐?”(약 2:21)며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약 2:24)고 주장합니다. 이렇듯 두 사람의 의견이 갈리기에 대체 누구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때는 이삭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명하시는 장면은 한참 뒤인 창세기 22장에 가서야 나옵니다. 그럼 바울이 맞고 야고보가 틀린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분의 가르침 모두 옳습니다. 야고보 선생은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즉 그는 믿음과 행함이 같이 가야한다고 봅니다. 순서상으로는 믿음이 먼저 일 수 있으나 그 믿음이 주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면 행함 곧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가르침을 더욱 쉽게 이해하려면 바울이 말하는 ‘행위’는 ‘율법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야고보가 말하는 ‘행위’는 ‘믿음의 실천’을 의미한다고 보면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할례나 유대교의 여러 절기를 지키고 금식하는 일 따위를 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이야기는 그런 공로를 많이 쌓은 자를 주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있는 자를 의롭다고 보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16절 말씀에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표현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사도 바울의 이 가르침은 후대에 가서 곡해되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착각하는 신자들이 많이 생겨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때문에 야고보 선생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다.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실천해야 그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다.”라고 신자들의 왜곡된 신앙을 교정합니다. 그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믿음은 실천이 있을 때라야 생명력이 있고 구원도 이룬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공익신앙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치르셨으니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고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 7:21)고 하십니다. 간디는 사회를 병들게 하는 일곱 가지 죄악 가운데 하나로 “희생 없는 신앙”을 들었습니다. 신자라고 하면서도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쭉정이 신앙단계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사로운 것이 아닙니다. 만인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주변 사람들에게 두루 유익을 끼치는 데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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