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5/8(목)
담장 허물기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듣고서,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로 보냈다. 두 사람은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하려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을 뿐이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아직 성령이 내리시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시몬은 사도들이 손을 얹어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내고서, 말하기를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하니,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 그러므로 그대는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 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보니, 그대는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소.” 시몬이 대답하였다. “여러분들이 말한 것이 조금도 내게 미치지 않도록, 나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8:14~25>



편견과 차별의 늪

작년 가을 교회소풍을 경남 하동의 송림공원으로 갔습니다. 하동은 여수에서 자동차로 불과 1시간 정도면 닿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 소풍 때 말고 하동에 간 적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가까운 하동보다는 거리가 먼 광주를 훨씬 더 많이 다녔습니다. 물론 광주와 담양에 부모형제가 살고 있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적 거리감으론 지금도 하동이 광주에 비해 굉장히 멀게 느껴집니다. 여수에서 경남 진주만 해도 거리상으로는 광주보다 조금 더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하루에 버스가 단 1대 밖에 없고 소요시간도 2시간 20분이나 됩니다. 여수에서 하동 가는 버스는 아예 없어서 광양 터미널까지 가서 거기서 갈아타고 가야합니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KTX 타면 3시간 남짓이면 가는데 대구까지는 버스도 자주 없을뿐더러 4시간 이상 걸려야 갑니다. 이는 그만큼 동서간의 교류가 잘 안 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선거 때마다 확인하는 동서간의 높은 벽은 어쩌면 불편한 교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주 만나야 편견과 고정관념이 깨질 텐데 그런 교류가 잘 되고 있지 않으니 동서간의 갈등이 잘 해소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도 말로만 ‘망국적 지역감정’ 운운하지 말고 지금의 교통체계부터 바꾸고자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지난주 오랜만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1988년 이래 적십자에 등록된 남북이산가족 상봉신청자 12만여 명 중에 태반이 죽고 현재 생존자는 7만여 명에 불과하답니다. 그 중에서 이번에 상봉하는 이산가족은 남쪽만 360여 명 규모입니다. 상봉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바늘구멍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디 이번 상봉을 시작으로 더욱 자주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져 분단의 비극이 조속히 치유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산가족 상봉이든 금강산 관광이든 아니면 경제협력이든 간에 남북이 부지런히 자주 오가야합니다. 그렇게 빈번히 교류하다보면 그동안 서로에 대해 갖고 있던 불신, 편견, 고정관념이 봄눈 녹듯 점차 해소되게 마련입니다. 지금의 남북분단과 동서갈등은 그것으로 이득을 보려는 강대국이나 권력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념과 냉전의 시대 20세기를 지나 21세기인 지금, 더 이상의 이념 갈등이나 지역감정은 시대착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종북좌파’ ‘전라도 홍어’ ‘쥐쌍도’ ‘쪽바리 2중대’ 따위의 이념과 지역 차별을 조장하는 말들이 버젓이 사이버공간에 떠돕니다.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갈등을 조장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이나 국정원 직원 또는 그들에게 놀아나는 얼빠진 사람들입니다.

지역 차별에 대한 연구로 밝혀진 각 지역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 편견은 이렇습니다. “서울사람은 사교적이나 이기적이고 충청도 사람은 예의 바르고 보수적이며, 경상도 사람은 의리 있고 단결력 강하다. 전라도 사람은 생활력 강하고 타산적이며 신뢰성이 없다.” 여러분은 이 같은 세간의 평가에 얼마나 동의하십니까? 전라도 사람에 대한 불신과 편견이 제일 심하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좋지 않으실 것입니다. 전라도에 대한 정부의 오랜 차별과 소외 정책이 국민들 속에 이 같은 무서운 고정관념을 심어놓았습니다. 하지만 호남인 스스로도 피해의식에 젖어 있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연고와 연줄을 먼저 따지지 말고 좋은 인재를 발굴해 지역 일꾼으로 세우고 동서교류를 열심히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호남교회들 영남지역 교회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교류하는 일도 한 방안이 될 것입니다. 그래야 지금의 지역 차별과 편견의 늪에서 헤어날 수 있지 지금처럼 계속되었다가는 동서갈등은 회복 불능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 죽이기

신약시대 사마리아는 차별과 소외의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하지 않으려 했을 정도입니다. 이 같은 상황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했더니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선생님은 어떻게 유대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 4:9)라고 황당하다는 듯 반문합니다. 당시로서는 이게 자연스런 반응이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갈 때 가까운 사마리아로 통하는 길을 놔두고 요단강 쪽으로 빙 돌아다닐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증오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주전 2세기경에 현자 벤 시락이 쓴 집회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나 자신이 혐오하는 민족이 둘 있고 셋째 것은 민족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들은 세일 산에 사는 자들과 블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거주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다.”(집 50:25-26) 세일 산에 사는 자들이란 에서의 후손인 에돔족속을 말합니다. 에돔족속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후 앙숙이 되었고 블레셋은 그리스 혈통의 해양민족으로서 사사시대 이래 이스라엘과 원수처럼 지냈습니다. 세 번째 “민족이라고도 할 수 없다”는 “세겜에 거주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바로 사마리아 주민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왜 사마리아 사람들을 그토록 미워하며 차별했을까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했을 때 앗시리아 왕은 바빌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 성읍에 이주시켰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과 혼합 민족을 이루며 살았고 야웨신앙도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에 이주한 이방민족들이 야웨신앙으로 개종한 사유를 보면 재미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본래 섬기던 우상숭배를 계속하였습니다. 한데 어느 날 사자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자꾸 물어 죽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읍의 이방인들은 “이것은 우리가 이 땅의 신에 대한 관습을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반성으로 사마리아 출신 한 제사장의 가르침을 받아 야웨신앙으로 개종합니다(왕하 17:24-28). 하지만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다시 성전을 지을 때 함께 동참하겠다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얼씬도 못하게 막았습니다. 바벨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민족주의와 순혈주의 의식이 매우 강했습니다. 가령 에스라 같은 지도자는 바벨론에서 사는 동안 이방여자와 결혼한 사람들에게 모두 이혼하라고 명하였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틀어진 사마리아와 유대인들의 관계는 그 뒤로도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헤롯대왕이 통치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빈번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자 신도들이 주변 지역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즈음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빌립도 순회 전도에 나서는데 그가 맨 처음 찾은 곳이 사마리아의 어느 성읍입니다. 여기서 빌립은 큰 권능과 이적을 행하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였고 많은 개종자를 얻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의 전도를 받아 세례받고 신자가 되었지만 아무도 성령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도 복음이 전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와 신자들에게 안수하였을 때에야 비로소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로써 사마리아 개종자들 신앙의 진정성이 확인되었습니다. 사마리아 개종자 중에 마술사 출신 시몬이 나옵니다. 그는 두 사도에게 돈을 주고 성령을 내리는 권능을 사려고 했다가 호된 질책을 당합니다. 다행히 시몬은 두 사도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중보기도를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뒤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고 나옵니다. 빌립과 두 사도의 전도는 결실을 맺어 “사마리아 온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 9:31). 그런데 주후 2세기~4세기경에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집니다. 저스틴, 이레니우스, 히폴리투스 같은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교부들)에 의하면 사마리아 마술사 시몬은 이단의 대명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몬주의자라는 종파를 만들어 영지주의를 퍼뜨렸고 거의 모든 사마리아인에게 “첫재 신(protostheos)” 혹은 “서 있는 자”로 숭배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영지주의 이단 따위의 틈바구니에서 경쟁하며 만만한 사마리아를 또 다시 희생양 삼았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즉 시몬 마구스에 대한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의 묘사는 실제와는 달리 과장되었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빌립처럼

초기 그리스도교는 소수 종교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로마제국에게서 ‘사악한 미신’ 취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점차 세력을 넓혀 가더니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사마리아를 희생양을 위한 표적으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리아 마술사 출신 개종자 시몬은 어느덧 가장 “모든 종류의 이단 창시자”로 몰렸고 사마리아인들을 마술로 미혹해 우상숭배로 이끈 장본인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 빌립,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걸었던 길을 배반하고 원점으로 되돌아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가운데 사마리아 성읍을 전도하고자 힘쓰셨습니다. 일부러 사마리아 지역을 찾아가셨고 그러다 어느 날은 사마리아 한 동네에서 쫓겨나신 적도 있습니다. 이에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이 명령만 하시면 동네를 다 불 살라버리겠다며 격분하기도 했습니다(눅 9:51~56).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그 동네에 대해 전혀 서운해 하시거나 화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흥분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친사마리아 선교활동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게까지 만들었습니다(요 8:48). 부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에 이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이 시작하신 사마리아 선교를 끝까지 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교 명령을 지킨 사람이 바로 빌립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선뜻 가지 않던 사마리아에 내려가 전도하였습니다. 또한 베드로와 요한 같은 사도들을 불러 사마리아인들의 개종을 확인시킴으로써 그들도 사마리아 선교에 동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편견과 차별로 소외된 땅 사마리아로 내려가 그 장벽을 헐고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심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명령을 받들어 내려가야할 또 다른 사마리아는 어디입니까? 그곳은 새터민, 이주노동자, 결혼 이민자, 노숙인 등 이 땅의 소외된 이들이 있는 현장일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내려가려면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온갖 그릇된 차별의식, 고정관념들부터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과감히 걷어내야 합니다. 더 이상 사람의 등급을 매기고 가르며 차별하는 일부터 그쳐야 합니다. 빌립처럼 하나님의 복음을 가로막는 온갖 장벽들을 무너뜨리고 화해와 평화의 복음을 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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