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1/12
너를 부른 까닭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을 만드시고, 거기에 사는 온갖 것을 만드셨다.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고, 땅 위에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주셨다.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 내가 너의 손을 붙들어 주고, 너를 지켜 주어서, 너를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할 것이니, 네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고,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를 풀어 줄 것이다. 나는 주다. 이것이 나의 이름이다. 나는,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에게 양보하지 않는다. 전에 예고한 일들이 다 이루어졌다. 이제 내가 새로 일어날 일들을 예고한다. 그 일들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일러준다.” <이사야 42:1-9>



메시아의 대관식

  오늘은 교회력으로 주현절 후 첫 주이자 주님의 수세일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일로부터 시작하십니다. 사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요한복음만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공생애를 요단강에서 받으신 세례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요한복음도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만 직접 묘사하지 않았을 뿐이지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을 예수님의 등장에 앞서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세례가 대체 무슨 연관이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셨다는 사실은 그가 한때 요한의 세례운동에 가담했음을 나타냅니다. 마가복음서는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에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막 1:14)고 합니다. 이는 요한이 체포되지 않고 세례운동을 계속했다면 예수님의 공생애도 그만큼 늦춰졌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운동에 뛰어든 직접적 계기가 바로 요한의 체포사건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주님이 받으신 ‘세례’로 분명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죄 사함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메시아가 곧 오실 것임을 확신하며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 차원에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로 믿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건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교 교리상 예수님은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의문이 이미 초기 교회 때부터 제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며 세례자 요한의 다음과 같은 말을 끼워 넣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마태에 의하면 요한은 감히 예수님께 세례 베풀지 못하고 말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라고 말씀하시며 거리낌 없이 자진해서 세례 받으십니다. 누가도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은 사실이 썩 내키진 않았나 봅니다. 그는 “온 백성이 세례 받은 뒤에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눅 3:21)고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맨 마지막에 세례 받은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장면을 아예 제외한 요한복음이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세례를 말렸다는 마태복음에 비하면 나은 편입니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은 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장면을 차마 삭제하지 못했을까요? 예수님의 공식적 소명이 바로 이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에게 임하시고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막 1:11) 이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공식 선포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의 세례는 마치 ‘왕의 대관식’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처형도 ‘받아야 할 세례’(막 10:39)라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로 시작해 세례로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겉보기와 달리 그가 진정한 하나님 아들이심을 드러내신 메시아 대관식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종’인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딸)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나님께 듣는 사람이라면 세상 부러울 것 없겠지요? 예수님이나 되시니까 그런 말씀을 듣지 우리와는 상관없는 말씀이라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 뿐 아니라, 여러분도 주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극진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 길로 비뚤어져 나가기 때문에 깊이 체감을 못할 따름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손을 잡아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 37:23-24)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으면 그분이 왜 사랑하며 기뻐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따르며 그 안에 머무는 자들도 모두 심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노래를 하나 들려줍니다. 이른바 ‘종의 노래’로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붙들어주는 나의 종이다. 내 마음에 드는 내가 택한 사람이다.”며 주님의 종을 소개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고 기쁨이 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문은 끝내 그 이름을 밝혀주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 알려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흔히 본문의 ‘주님의 종’을 메시아이신 예수님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하늘의 음성이 들렸고 변화 산 변모체험 때도 같은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또 마태복음은 이사야 42장의 ‘종의 노래’를 인용하며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이루고자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마 12:16)고 합니다.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가 말하는 ‘주님의 종’은 당연히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자신을 철저히 숨기셨다는 점을 들어 마태가 이사야서 42장 ‘종의 노래’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듯 본문의 종은 미지의 사람입니다. 지금껏 많은 학자가 그가 누구인지 밝혀내려 했지만 만족스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현재까지 예수님, 이스라엘, 이사야 자신 등 크게 세 가지 설로 나뉘어 논란이 될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종을 예수님으로 보지만 유대교에서는 ‘이스라엘’로 이해합니다. ‘제2이사야’로 불리는 본문의 저자인 익명의 예언자가 그 주인공이라는 주장도 나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스터만이란 구약학자는 저자가 종을 의도적으로 감추었다고 봅니다. “그래야 모든 이가 종의 모습을 닮고자 노력하고 하나님 하시는 일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베스터만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이사야가 주의 종이 누구인지 알릴 필요가 있었다면 굳이 그 이름을 감출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일부러 이 종의 정체를 괄호치고 이 사람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사람이란 사실을 볼 때 이 사람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돌보는데 예민한 감각을 지닌 자비의 사람입니다. 누구나 어쩌다 한두 번 좋은 일을 할 수는 있지만 외부의 각종 방해에 맞서 그것을 지속하긴 매우 힘든 법입니다. 한 때 열심히 하다가도 어느새 지치고 낙심해 넘어지거나 주저앉게 됩니다. 하지만 주님의 종은 어떤 외풍에도 꺾임 없이 한결같은 자세로 그 일을 지속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이 따르지만 낙심치 않고 끝까지 그 소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 같은 주님의 종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하나님은 주님을 굳게 의지하며 한결같은 마음 자세로 나아가는 자를 기뻐하시고 권능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의를 위한 부르심

  하나님은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며 그의 종을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다시 마태복음의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는 장면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세례자 요한이 감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지 못하고 말리자 예수님은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 3:1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 매우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서 ‘종의 노래’에서도 “나 주가 의를 이루려고 너를 불렀다”며 그 종을 부르신 까닭이 의로움의 성취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의로움’이란 곧 “눈먼 사람 눈 뜨게 하고, 어두운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는 일” 따위의 구원의 사역을 함으로써 ‘이방의 빛’이 되는 삶입니다. 이는 앞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푸는 일”과도 그 맥락을 같이합니다.

본문에는 ‘공의’(미쉬파트)라는 낱말이 세 차례나 나옵니다. 주의 종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는 “주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종의 노래’는 바벨론 포로기 말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바벨론 같은 대제국의 침략에 유다 같은 나라는 힘없이 무너졌고 그 백성들은 오랜 세월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포로생활 자체가 바로 어두운 영창에 갇혀 지내는 희망 없는 감옥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주님께서는 그의 종을 통하여 공의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제국들의 손아귀에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며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으십니다. 이는 예수님 같은 메시아만 하실 수 있는 역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에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많은 사람이 힘겨운 현실에 낙담하고 좌절하여 구원의 손길을 찾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불과 이틀 사이, 여수에서 무려 여섯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마음 아팠습니다. 지금은 주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는지 그 소명을 다시금 새기고 그분의 공의를 이루는 일에 힘써야할 때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종이 되어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를 늘 힘써 살려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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