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1/05(일)
주님은 나의 빛  
내 원수야, 내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서, 미리 흐뭇해 하지 말아라.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 곧 나의 빛이 되신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으니, 이제 나는 주님의 분노가 가라앉기까지 참고 있을 뿐이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나를 변호하시고, 내 권리를 지켜 주시고, 나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내가 주님께서 행하신 의를 볼 것이다. 그 때에 내 원수는 내가 구원 받은 것을 보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나를 조롱하던 그 원수가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내 원수가 거리의 진흙처럼 밟힐 것이다. 패배당한 원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미 7:8-10>


‘빛의 자녀’이려면

 오늘은 신년주일이자 주현절을 하루 앞둔 날입니다. 주현절은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리는 교회의 절기입니다. 주님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현절을 ‘빛의 축제일’이라고도 합니다. 이사야는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사 9:2)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를 기록한 복음서의 두 저자, 마태와 누가는 모두 이사야 9장 2절을 인용하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이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마 4:16; 눅 1:79).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어둠과 죽음을 환히 밝히시는 구원과 생명의 빛으로 태어나셨다고 이해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요 1:9)며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 말합니다. 예수님 자신도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며 스스로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나 예수님을 ‘빛’의 은유로 말한 대목이 없습니다. 다만 마가는 예수님이 변화 산에 올라 변모하실 때 주님의 입으신 옷이 “세상의 어떤 빨래꾼도 더 이상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막 9:3)고 전합니다. 이는 마가 또한 예수님을 눈부신 빛을 발하는 존재로 보았음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사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어두운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고자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빛이 있는 동안에 너희는 그 빛을 믿어서,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 12:36)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믿고 빛의 자녀로 살도록 부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은 그 빛을 비추게 되어 있습니다. 달이 스스로 빛을 내지는 못하지만 태양 빛을 받으면 환히 빛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주님의 찬란한 빛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그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인들을 그려 놓은 성화를 보면 대개 머리를 둘러싼 후광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그분들이 주님의 빛을 내면에 받아 그만큼 잘 발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일설에 의하면 한민족은 ‘빛의 자손’이라 불려야 할 만큼 본래 그 뿌리가 빛과 관련이 많다고 합니다. 가령 단군신화에는 천제(天帝)인 환인과 그의 아들 환웅이 나옵니다. 이들 환인(桓因)과 환웅(桓雄) 앞에 붙은 ‘환(桓)’자는 ‘환하다’는 의미로 ‘광명’을 상징한답니다. 환인은 흔히 하느님으로 불렸고 이때 하느님에는 ‘환한님’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는 분석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이란 이름에도 ‘광명’의 뜻이 들어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중국 고문헌에 나오는 조선이란 이름의 본래 명칭은 발조선입니다. 발조선의 ‘발’이 ‘밝다’에서 나왔음을 고려하면 발조선은 광명의 나라인 셈입니다. 앞서 말한 환(桓)과 한(韓)이 같다면 한국은 ‘환한 나라’ 곧 ‘빛의 나라’이고 한민족은 ‘빛의 민족’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빛의 나라라고 해서 현재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도덕적으로 더 우세하다거나 어둠이 덜한 것도 없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 빛의 나라 백성들처럼 살아야할 텐데 현실은 이와 동떨어져 있습니다. 아무리 시조가 하느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지라도 빛의 자녀가 자동으로 되는 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하고 생각하지 말아라...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마 3:9)고 일갈한 바 있습니다. 스스로가 변화되지 않고는 결코 ‘빛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조명

 예언자 미가는 주전 8세기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을 하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히스기야 왕 시절 앗수르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였을 무렵에도 예언하였습니다. 미가는 역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예루살렘과 유다 지도자들 가운데 만연한 죄악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거듭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엄하게 징벌하십니다. 때로 주님의 진노는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드실 만큼 혹독합니다. 예루살렘 도성의 지도자들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재앙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밭 갈듯 뒤엎고 예루살렘을 폐허더미가 되게 하고 성전이 서 있는 산은 수풀만 무성한 언덕이 되게 하신다.”(미 3:12)고 선포합니다. “설마 주님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망하게 하시진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죄악을 일삼던 자들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주님은 실제로 예루살렘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히스기야 왕 시절 앗수르 산헤립이 침공했을 때 예루살렘은 거덜 나다시피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가까스로 명맥은 유지했으나 주전 586년에는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 의해 아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학자는 본문의 배경을 바벨론 포로기 직후라 봅니다. 즉 미가가 예언했던 때보다 약 2세기가 흐른 뒤의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한 타르굼은 9절 앞에다 “예루살렘은 말한다”라는 문구를 첨가시켜놨습니다. 본문의 ‘나’를 예언자 미가가 아닌 예루살렘으로 본 것입니다. 이는 본문의 배경이 예루살렘이 멸망한 상태임을 뒷받침합니다.

화자가 예언자 미가이든, 바벨론 포로기의 익명의 서기관이나 예언자이든 간에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립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넘어졌으나 반드시 다시금 일어난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 곧 나의 빛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주님께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당하기 힘든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진 않습니다. 미쁘신 주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서 진노가 다 지나가고 구원의 빛이 비추기까지 어둠 속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냅니다. 확신에 찬 그의 다음 기도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마침내, 주님께서는 나를 변호하시고, 내 권리를 지켜 주시고, 나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신앙인은 심히 고통스럽고 캄캄한 현실에 놓일지라도 그 가운데서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하나님이 구원의 빛으로 인도해 내실 것을 확신하며 참고 기다립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주님께 지은 죄악을 철저히 성찰하고 회개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구원해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며 ‘빛’을 제일 먼저 만드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넷째 날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해와 달과 별들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빛은 존재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이 ‘태초의 빛’이 어떤 빛인지 정확히 알긴 힘들지만 태초의 빛이 생겨남으로써 어두움이 심연을 덮고 혼돈과 공허로 가득 찼던 세계에 비로소 서광이 비치고 질서가 생깁니다. 주님의 조명이 없이 우리 삶은 “어두움이 심연을 덮고 혼돈과 공허로 가득 찬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조명을 받는 자라야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시 27:1) 하고 다윗처럼 노래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로

 예언자 이사야는 말합니다. “해는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며, 달도 더 이상 밤을 밝히는 빛이 아닐 것이다. 오직 주님께서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 주님께서 몸소 너의 영원한 빛이 되시며, 네가 곡하는 날도 끝이 날 것이므로,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으며, 다시는 너의 달이 이지러지지 않을 것이다.”(사 60:19-20) 밧모섬의 요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 주 하나님께서 직접 모든 사람을 비추시기 때문에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다(계 22: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그의 빛으로 삼는 사람은 더 이상 어둠속을 헤매지 않게 됩니다. 삶의 목적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달려가지 않습니다. 원수의 조롱과 멸시, 뜻밖의 고난 가운데 자포자기하며 주저앉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주셨기”(고후 4:6) 때문입니다.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이 이미 빛이며, 빛의 자녀입니다. 에베소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 5:8)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4)고 가르치셨습니다. 생명과 진리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빛이며 빛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환한 대낮에 작은 불꽃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캄캄한 밤중이라면 그 불꽃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 강한 빛을 발휘합니다. 예전에 백운산 휴양림에 겨울캠프를 떠났을 때가 떠오릅니다. 눈길을 헤치고 정상까지 등산을 하다가 그만 날이 저물고 말았습니다. 길이 잘 보이지 않아 어떻게 내려가야 할지 갑갑했습니다. 팀별로 나뉘어 가느라, 함께 한 사람이 세 명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정은이란 학생이 휴대폰 손전등을 켜자 길이 보였습니다. 그 작은 휴대폰 손전등이 아니었더라면 산중 밤길을 헤매느라 고생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불꽃이 별거 아닌 것 같아도 누군가에는 생명을 좌우하는 등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한평생 주님을 생명의 빛으로 삼고 그 빛 가운데 걸어가십시다. 하나님이 비추시는 구원의 빛으로 우리 마음을 밝히고 모두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십시다. 혹시 여러분이 주님 손을 놓을지라도 그분은 여러분의 손을 놓지 않습니다. 올 한해도 주님의 미쁘심을 깊이 신뢰하며 나아가십시다. 우리 모두가 오직 하나님을 빛과 구원 삼아 현실의 고난과 어둠을 헤치고 마침내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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