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3/12/29(일)
소통의 자리로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한 분이신 아버지께 속합니다. 그러하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내가 주님의 이름을 내 형제자매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찬미하겠습니다”하고 말씀하시고, 또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히 2:10-18>



불통의 시대

 어느덧 한해 끝자락에 섰습니다. 흔히 ‘다사다난’이라 말하지만 저는 작년 12월 19일에 시계가 멈춰버린 듯한 1년을 보낸 기분입니다. 국정원, 경찰, 국방부 심리전단, 선관위 등 국가기관을 총동원한 관권부정선거가 드러났건만 그 최대 수혜자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며 여태 딴전을 피웁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들이 무려 반년 이상 매주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서울 시청 앞에서 “철도 민영화 반대”를 외치며 노동자들을 비롯한 시민 10만 여명이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1만 5천여 경찰을 동원해 차벽을 세우고 어떻게든 시위 확산에 주력하는 모습입니다. 종교계의 중재노력마저 뿌리친 정부의 강경 일변도 대처에 시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한 치 양보 없는 이 같은 대결구도는 온 나라의 불행입니다. 최근 한 네티즌은 프랑스 혁명기 루이 14세 황제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패러디해 박 대통령에게 ‘말이 안통하네 또’라 별명을 붙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린 시민들을 보고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한 것으로 악명 높습니다. (사실 그는 거리의 굶주린 아이들을 보고 신하에게 프랑스 빵의 일종인 “브리오슈를 주세요”라 말했답니다. 혁명군들이 왕비를 증오한 나머지 대중을 선동하고자 그 발언을 왜곡해 퍼뜨렸다는군요.) 민주공화국의 수반이라면 누구보다 국민들 외침을 귀 기울여 듣고 그것을 국정에 반영하고자 당연히 힘써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동안 박 대통령에게서 그 같은 노력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보수 언론조차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재임 중 기자회견 한 번 안한 대통령은 처음이라 지적합니다. 대통령이 불통이면 정부 각료들이라도 국민들과의 소통에 힘써야할 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국무총리든 장관들이든 사회 현안을 놓고 국민들과 진솔한 소통에 힘쓰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대자보가 전국의 여러 학교에 나붙은 것을 보더라도 국민들이 얼마나 정부의 불통에 울화통이 터질 지경인지 알 수 있습니다.

침팬지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은 동물학 한 번 배워보지 못하고도 최고의 동물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침팬지의 서열형성, 도구사용, 성생활, 폭력성 등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학사학위도 없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제인 구달은 “내가 침팬지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대부분 감정이입을 통해 얻은 것이다.”고 말합니다.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 전까지만 해도 동물 행동학계에서는 관찰하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게 금기시 되었답니다. 그렇게 하면 ‘감정이입’이 되어 객관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제인 구달은 이 금기를 깨고 자신이 관찰하는 침팬지들에 이름을 붙여줬고 오히려 감정이입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침팬지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일부러 침팬지처럼 행동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냉정하고 객관적 자세”를 취했다면 알아내지 못했을 베일에 싸인 침팬지 행동들을 밝혀냈습니다. 소통은 상대방이 되어보는 것 곧 역지사지에서 시작됩니다. 제인 구달은 침팬지를 만나고자 매일 새벽 같은 옷을 입고 동일한 장소에 나가 기다린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가 침팬지들이 있는 자리로 가서 그들과 함께 호흡했기에 침팬지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맏형 예수

 지난 수요일이 성탄절이었습니다만, 성탄절이 왜 그리스도교 최대 명절이 되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화육사건’ 또는 ‘육화사건’이라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관광을 위해서이거나 천사처럼 메신저 역할이나 하고 돌아오라는 취지가 아닙니다. 소통과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이자 보존자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분이 아니라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존하십니까? 세상이 사람들의 온갖 죄악으로 오염되어 파멸로 치달을 때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내심으로써 창조질서를 보존하고자 하셨습니다.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일컬어 ‘구원의 창시자’(아르케고스 /영도자)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되 왕자로 태어나 편안한 생활을 하도록 보내신 게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되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태어났을 때부터 십자가에 처형되시기까지 몸소 많은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구원의 창시자’로 세상에 오셨지만 이를 위해 인간이 당하는 시험, 고난, 죽음을 직접 맛보셔야 했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히 4:15) 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자녀의 영광에 이끌어 올리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 일을 위해 그는 자신을 철저히 낮춰야 했고 인간이 당하는 시험, 고난, 죽음도 직접 겪으셔야 했습니다. 같은 처지가 되어보지 않고는 동병상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몸소 어려움을 겪어 보셨기에 “우리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게 되신 것입니다(히 4:15). “거룩하게 하시는 분과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에게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저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보되 일반 대제사장과는 차원이 다른 분이라 말합니다. 마카비 시대 이후, 대제사장직을 놓고 암투가 끊이지 않았고 혈통과 상관없이 대제사장에 오르는 일이 심심치 않게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에 앞장선 대제사장 안나스나 그의 사위 가야바의 경우를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고자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최대한 이용한 자들입니다. 대제사장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인식이 좋을 리 없습니다. 한데 오늘 본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냥 대제사장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라 하였습니다. 무자비하고 불성실한 대제사장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대제사장이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백성을 위한 희생제사만 들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면서도 스스로가 십자가에 달려 희생제물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은 피와 살을 갖고 태어나신 우리의 형제이셨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맏형과도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을 형제자매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11절). 여기서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훤히 아는 사람을 남들 앞에서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형제자매인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시인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감정이입

예수님은 죽음과 악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러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피와 살을 가진 예수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희생제물로 내 놓으심으로써 죽음과 악마의 지배가 무력화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거대한 강에 안전하게 건너는 다리가 놓인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로써 형제적 유대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악마는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이 열렸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은 사람과 소통하고자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는 구원의 창시자로서 시험과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습니다. 바로 그런 경험을 하셨기에 우리를 깊이 이해하시고 죽음과 악마의 포로상태에서 해방시키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해서는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이시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성실하신 대제사장이시라 하였습니다. 즉 자비함과 성실함이 예수님이 지니신 두 가지 기본 태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이 같은 소통의 자세를 본받아야합니다. 저는 이것을 “구원의 감정이입”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올리고자 자기를 철저히 비우고 낮추셨습니다. 이 같은 감정이입이 있었기에 우리가 그의 형제로 인정받아 하나님과의 화해하여 구원받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해체하고자 우리 스스로를 비우고 낮춰 구원의 감정이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하지 않고는 교회는 복음의 은총을 나눌 수 없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구원의 공동체로 자리매김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로 나아가 고통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함으로 구원의 감정이입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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