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3/10/27
눈을 떠서 보아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마음의 욕정대로 하도록 더러움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니,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롬 1:18-25>



우상 공장의 활기

 시절이 하 수상하니 요즘 역사의 시간이 족히 수십 년은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과연 21세기를 사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지난 목요일(31일), 일본에서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야마모토 다로(38세, 무소속)라는 교토의 초선 참의원이 아키토 일왕이 개최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일왕과 악수 후에 편지 한 통 건넨 일로 일본 정가가 몹시 시끄럽다고 합니다. 야마모토 의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어린이와 노동자, 식품 안전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임을 알리고자 이 편지를 일왕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일본 정치권이 발끈한 표면적 이유는 일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속내는 야마모토가 신적 존재인 왕에게 편지를 전달함으로써 불경죄를 저지른 데 대한 거센 분노로 알려졌습니다. 일왕이 일본에서 아무리 신적 존재로 숭배된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편지 한 통 전하는 게 어째서 ‘불경죄’가 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까지 일왕은 ‘천황’으로 불리며 정치, 국방, 외교 등 모든 전권을 휘두르며 신처럼 군림하였습니다. 하지만 패전한 뒤, 일왕은 1946년 미국의 요구로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공식 선언하고 실권을 넘긴 다음 상징적 존재로 남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일왕 스스로도 인간이라고 선언한 마당에 여전히 그를 신처럼 떠받드는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행태는 딱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현대를 살면서도 사고구조는 아직 중세에 머물러 있으니 말입니다. 계속되는 망언과 야스쿠니 신사참배도 그래서 여태 중단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인간에 대한 신격화가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현재 북한과 남한도 죽은 독재자 숭배 열기가 대단합니다. 북한에서는 사망한 김일성과 김정일이 신처럼 군림하는 중이고 남한에서는 독재자 박정희가 점차 신격화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가령 그의 고향 구미에서는 매년 성대한 탄신제가 열리는가 하면 박정희 동상도 있어 평소 그 앞에 헌화하고 절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것도 모자랐던지 지난주에는 서울의 한 교회에서 ‘제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가 열려 교계 안팎의 우려와 비난이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행사를 안 하다가 정권이 바뀌니 갑작스레 시작하는 것 자체도 볼썽사납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추모예배 영상을 보면 강대상에다 십자가 대신 박정희 대통령의 큰 영정을 걸어놓고는 참석자들이 고인의 애창가인 ‘나의 조국’을 합장합니다. 설교를 맡은 목사는 “우리나라는 독재를 해야 된다”고 천연덕스레 외쳐대고 영정 앞에 헌화를 하는 순서까지 있습니다. 전체적인 예배 자체가 하나님이 아닌 고 박정희 대통령을 향하고 있어 전형적인 우상숭배 외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종교 개혁가 칼뱅은 “인간은 누구에게나 그 마음속에 신성을 느끼는 종교성이 있다....인간의 심성은 끈임 없는 우상의 창조공장”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조차 하나님 대신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단지 무슨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거기에 직접 절하는 일만이 우상숭배인 것은 아닙니다. 그 대상이 국가, 민족, 이념 등 어떤 것일지라도 신성이 부여되고 사람들이 그 지배를 받는다면 이미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살펴보면 우상 공장은 지금 활기를 띄며 더욱 크게 발전하는 상황입니다.


몽매한 사람들

사도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 해당되는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합니다. 하나님을 단지 ‘사랑과 은총이 많으신 분’으로만 알았던 분들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표현이 좀 낯설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노를 거치지 않는 사랑과 은총은 십자가 없는 부활만큼이나 위험천만합니다. 십계명 1-2 계명을 보세요. 이들 두 계명은 우상숭배 금지가 주요 골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끝내 어떤 형상을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는 자들에 대해 “본인 뿐 아니라 삼 사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리겠다”(출 20:5)고 경고하십니다. 이 대목에서 눈여겨 봐야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등 하나님께 따라 붙는 좋은 형용사가 무척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니까 이상하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질투는 좋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질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질투는 냉담했던 마음이 중심에서부터 불붙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질투는 그의 백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열정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질투하시겠습니까? 주님 대신 우리가 우상을 섬겨서 시샘하시는 게 아닙니다. 인간을 그분의 형상을 닮은 최고의 창조물로 지으셨건만 그들이 어리석게도 쇠붙이나 나무, 돌조각 또는 사람이나 짐승 따위를 신이라 여기며 섬기니 심히 마음 아프신 것입니다.

우상(ειδωλον)이란 단어의 헬라어 어원을 찾아보면 ‘보았다’(ειδον)라는 동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대개 눈에 보이는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이십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고자 시도해왔습니다. 가령 모세가 십계명 돌 판을 받고자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였습니다. 모세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앞장서서 우리를 이끄실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놓고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어떤 신을 찾았던 게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인이나 다름없던 모세가 사라지자 하나님이 자신들을 떠나실까봐 몹시 불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확신을 갖고자 주님의 형상을 금송아지 형태로 만들어냈습니다. 이에 산 아래로 내려온 모세는 크게 분노하여 돌 판을 내던져지고 금송아지를 부숴버립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께서 호렙 산 불길 속에서 당신들에게 말씀하시던 날, 당신들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십시오.”(신 4:15) 우상을 만드는 일은 영적인 하나님을 물질로 바꿔 놓는 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화석화 하는 것이며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바람 같은 주님을 비좁은 공간에 가두는 불경죄를 범하는 일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인간이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개탄합니다. 이는 인간이 무지몽매해져 영원하신 하나님, 숨어계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낯선 하나님을 자신에게 익숙한 형태로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두 눈 부릅뜨고

 사도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그 눈부신 광채 때문에 한동안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너를 건져내어, 이방 사람들에게로 보낸다. 이것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서,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고, 사탄의 세력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 그들이 죄사함을 받아서 나에 대한 믿음으로 거룩하게 될 사람들 가운데 들게 하려는 것이다.”(행 26:18) 많은 이방인의 눈을 열어주게 하고자 바울은 잠시 동안 눈이 멀어야 했습니다. 그는 랍비 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려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던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비록 이방인들처럼 보이는 형상의 우상은 섬기진 않았을지라도 유대인의 율법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만민의 구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환히 깨닫지 못한 채 오히려 그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물입니까? 독일이나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그럼에도 그들 눈에 뭔가가 씌워지니 율법에 얽매여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히틀러 같은 광기어린 독재자나 천황을 신처럼 떠받드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주님의 의를 이루고 이방에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을 이끌어 내며, 어두운 영창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기 위함입니다(사 42:6-7) 하지만 이 일을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자연만물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어두운 우리 마음에 진리의 빛이 환히 비춰져야 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지 않고 파악하니 생각은 공허하고 내용이 없으며 개념 없이 보기만 하니 마음은 맹목적이다.” 보는 눈이 없으면 아무리 힘들여 아름다운 곳에 가더라도 헛수고입니다. 들을 귀가 없으면 아무리 귀한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시끄러운 잡음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진리에 눈 뜨려면 우리 어두운 마음에 등불을 켜야 합니다. 계속 복음의 기름을 공급하여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진리와 자유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늘 모시고 우리 안에 엄습하는 어두운 것들을 몰아 내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망대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이 세상을 주님의 눈과 마음을 품고 바라보며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의 의를 이루고 진리의 빛을 밝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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