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3/3/24(일)
더 귀중한 일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 대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찼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요 12:1-8)



‘고통의 집’에서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는 마음 깊이 ‘사랑하시던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어 그가 안장된 곳으로 가실 때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습니다(요 11:35). 예수님이 나사로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 13:23; 19:26; 20:2; 21:7, 20)라는 익명의 인물이 계속 나옵니다. 분명 열두 제자에 드는 제자인데 이름은 나오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 제자가 누구인지 밝히고자 지금껏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대개 그 제자를 ‘요한’이라 보기는 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핵심 제자 네 사람 중에 베드로와 안드레를 언급합니다. 하지만 요한과 야고보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그들은 단지 ‘세베대 아들들’(요 21:2)로 등장할 뿐입니다. 요한과 야고보 두 사람 중에 요한은 요한서신을 써서 예수님의 새 계명 곧 ‘서로 사랑’에 대해 유난히 강조한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때문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자연스레 요한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같은 시각은 고대 교회 시절부터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요한’이 아닌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로 보는 사람들도 일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자체가 나사로를 일컬어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요 11:3, 5, 36)이라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다니 마을 나사로 관련 이야기가 끝난 바로 다음 장인 요한복음 13장부터 갑자기 등장합니다. 나사로가 실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였는지는 아직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그는 예수님의 친구였고 아끼고 사랑하시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시점에 그를 무덤에서 살려내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 이후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시 광야 근처 에브라임이란 마을로 가셔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십니다. 그러다가 ‘유월절 엿새 전에’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로 다시 가십니다. 베다니란 히브리어 ‘베트 아니야’에서 나왔는데 ‘고통의 집’ 혹은 ‘고뇌자의 집’이란 의미입니다. 나사로가 사망하여 그의 누이들과 많은 문상객이 슬피 울던 상황에서는 베다니란 마을 이름이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베다니를 찾았을 때에는 분위기가 반전되어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죽었던 자신을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사하여 나사로가 동네잔치를 베푼 것으로 보입니다. ‘고통의 집’이 어느덧 ‘기쁨의 집’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은 곧 전개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주님의 죽음이 많은 사람에게 잠시 슬픔과 고통을 안겨줄 것이지만 머지않아 큰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리라는 점을 여기서 예감할 수 있습니다.


최고의 대접

본문은 예수님이 베다니 나사로의 잔치에 참석하신 날을 ‘유월절 엿새 전’이라 합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km쯤 떨어진 마을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를 떠나 곧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작정이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들어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셨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마지막 만찬의 기사가 세족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눠 주시며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하신 예수님 말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네 집에서 열린 잔치는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실질적인 마지막 만찬 장면이나 다름없습니다. 저자가 이 잔치를 굳이 유월절과 관련시킨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최고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셨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날이자 각 가정 장자의 죽음 대신 어린양을 잡아 대속하던 날이었습니다. 바로 이 같이 뜻 깊은 날을 불과 엿새 앞두고 예수님은 나사로네 집 잔치에 참석하신 것입니다. 이 잔치에서 마르다는 식사 시중을 드느라 무척 바쁩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 일행은 또 다른 어느 날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초대를 받아 그들 집에 가신 적 있습니다. 그날도 마르다는 식사 시중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마르다는 식사 시중들고 마리아는 예기치 못한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식사 중이던 예수님께 다가와 매우 값지고 순전한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털로 닦아주기도 하였습니다. 이 장면은 사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으나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가령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을 마태와 마가는 익명으로 처리했고 누가는 ‘죄 많은 여인’이라 말합니다. 오직 요한복음만이 여인의 이름을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 말합니다. 이 향유 여인을 보도한 사복음서 가운데 어느 본문이 가장 정확한 지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점은 어떤 여인이 예루살렘 입성을 불과 며칠 안 앞둔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이 여인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로 보고 있는데 이 마리아는 사건도 나기 전에 11장에서 다음과 같이 먼저 언급이 됩니다(요 11: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은 여자요..” 그는 자신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려” “주님께서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신 뒤 벌인 잔치에서 다시금 예수님 발치에 엎드려 그 발에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습니다. 애초 이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라 했습니다. 마리아는 잔치의 주빈인 예수님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안긴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손님이 오면 보통 발 씻을 물을 내주었습니다. 발은 스스로 씻었고 손님에게 더욱 극진한 대접을 하는 집에서는 종들이 발을 씻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인, 그것도 여성이 직접 손님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물도 아닌 값비싼 순 나드 향유로 발을 씻었으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얼마 전까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악취가 풍겨나던 그 집은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은 향유로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그를 얻으라.

 이 장면을 지켜본 가룟 유다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며 마리아를 핀잔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쏟아 부은 향유 값이 대략 삼백 데나리온에 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돈은 일용노동자 거의 1년 품삯에 해당하는 거액입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의 말 같은 불평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마리아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쏟아 부은 것일까요? 우선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준 것에 대한 보답이자 감사의 차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이라면 잔치를 벌인 일로 족하지 굳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쏟아 부어 낭비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무슨 의도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요한은 가룟 유다의 불평에 대해 간략히 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가룟 유다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고 도둑놈이라 돈을 빼돌리고자 그 따위 소릴 한다는 겁니다. 세리 출신 마태도 있었는데 어째서 가룟 유다가 돈 자루를 맡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악평과 달리 가룟 유다가 실제로 도둑이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는 은 삼십에 스승을 팔아넘기긴 하였으나 그가 먼저 돈을 요구한 게 아니라 유대 집권자들이 그 돈을 선뜻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쏟아 부은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 준비’를 위함이라 설명하십니다. 실제로 그런 의도였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곧 이어지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과정을 보면 그와 같은 효과를 보이는 건 틀림없습니다. 마리아는 돈으로는 도무지 계산할 수 없는 예수님을 얻고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은 것입니다.

신학자 피터 리브스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는 있으나 / 그 사람 마음을 살 수는 없다. ....돈으로 지위는 살 수 있어도 / 가슴에서 우러나는 존경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섹스는 살 수 있어도 / 진정한 사랑은 살 수 없다...돈은 인간에게 꼭 필요하지만 / 돈만 가지고는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것은 살 수 없다. / 진정한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삼백 데나리온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한 분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생 최고의 보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얻고자 돈도 체면도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고 돌아가 그 밭을 사고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한 한 소작농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얻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알량한 명예, 지위, 재물, 권력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면서도 자신의 영혼을 지키는 일에는 너무 소홀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최대의 보물입니다. 마리아처럼 그분을 얻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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