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위솔
2013/1/27(일)
환란을 영광으로  

여러분이 그것을 읽어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지나간 다른 세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려주지 아니하셨는데, 지금은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성령으로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 비밀의 내용인즉 이방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 사람들과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함께 한 몸이 되고, 약속을 함께 가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이 작용하는 대로 나에게 주신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는 비밀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모두에게] 밝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리시려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란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엡 3:4-13>



만천하에 드러난 비밀

오늘은 신년주일이자 교회력으로는 주현절입니다. 주현(主顯, Epiphany)이란 ‘주님의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디어 나타났음을 기리는 절기가 주현절입니다. 이 주현절을 동방정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칭합니다. 이는 가려져 있던 예수님의 빛이 어두운 세상을 환히 비추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동방정교회나 서방교회 곧 가톨릭이나 주현절 날짜는 1월 6일로 동일합니다. 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주현절을 예수님의 수세일로, 서방교회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한 날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개신교는 서방교회 전통을 따르기에 주님의 신성이 아기 예수의 탄생 때부터 이미 드러났다고 봅니다. 반면 동방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임재가 있었고 그때부터 공생애가 시작되기에 주현절을 예수님 수세일로 잡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공식적으로 드러난 시점이 언제냐에 대해서는 이처럼 교회 전통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현절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난 날”로 지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온 세계에 대한 구원의 계획이 분명히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구약의 여러 예언자가 계시의 말씀을 많이 전해 주었으나 주로 유대인을 향한 것이었고 만민을 위한 복음이라 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오랜 세월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리스도의 비밀’이 훤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 자신이 구원의 복음이자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 빌립이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 14:8-10a) 요한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로고스 찬가’는 예수님의 나타나심 곧 성육신 사건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이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의 은혜와 진리를 맛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이야말로 온 세상을 비추는 생명과 구원의 빛이라고 고백합니다. 주현절을 맞아 구원의 새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새롭게 기쁨으로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비밀’(헬, 뮈스테리온)이란 말을 네 차례나 언급합니다. 3절에 나오는 ‘비밀의 계시’까지 포함하면 짤막한 단락에서 다섯 차례나 ‘비밀’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비밀이란 단어는 27회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에 6회나 오고 특히 본문에 집중적으로 나온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체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기에 바울은 비밀을 거듭 말하는 것일까요? 프랑스 속담에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은 신의 비밀이고 세 사람 사이의 비밀은 모든 사람의 비밀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비밀을 만민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알려졌지만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밝힙니다. 사실 ‘뮈스테리온’이란 말은 그레코-로마 사회에 널리 유행하던 밀의종교에서 즐겨 쓰던 용어입니다. 오시리스, 미트라스, 디오니소스 따위를 숭배하던 밀의종교에서는 입문자 중심으로 그들의 종교의식을 비밀스레 진행했습니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밖에 나가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밀의종교’라 불립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시 널리 쓰이던 ‘뮈스테리온’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비밀을 오히려 만민에게 공개합니다. 그 비밀이 무엇인지는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곧 이방사람들도 유대인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공동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구원의 상속자로 알려졌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도 복음을 통해 공동의 상속자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 같으나 바울 시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유대교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이방인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이제 구원의 지평이 유대인을 넘어 만민에게 확장되었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보물을 간직한 사람

바울은 “나는 이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일꾼이 되었다는 상당한 자부심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는 자신을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일컫습니다. 지나친 자기 폄하로 보이지만 그냥 빈말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부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고전 15:9) 또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딤전 1:15) 말한 적도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볼 때 그는 사도나 복음 전도자가 되기에는 실격자였습니다. 지난날 주님의 교회를 심하게 박해하고 복음 전도를 훼방하던 자가 사도나 복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불러 “복음을 섬기는 일꾼”이라는 직분을 순전히 ‘은혜의 선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이방사람에게 널리 전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바울에게 기꺼이 계시해 주셨습니다(갈 1:16). 바울은 스스로를 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평가했으나 그리스도의 비밀을 간직하고 전하는 사명을 받은 뒤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자신은 비록 볼품없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보배가 있기에 그 누구 앞에 서더라도 주눅들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방에서 난타 당해도 움츠려 들지 않고 온갖 환란이 닥쳐와 답답한 상황이 되어도 결코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고후 4:8).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한, 주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신 것처럼 자신 또한 살리고 세워주시리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고후 4:14). 여우가 다른 동물들 앞에서 왜 큰 소리 칩니까? 호랑이가 뒤에서 떡 버티고 서서 자신의 배경이 되어주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기초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도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 편이라면 누가 감히 우리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롬 8:31) 그 무엇이 우리를 꺾어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고난 속에서도 담대히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에베소 교우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바울의 투옥으로 에베소 교우들은 크게 낙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교우들은 주님의 사도가 이처럼 큰 환란을 겪는다는 사실을 선뜻 납득할 수 없어 동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야 복음을 전하다 투옥되거나 처형당하면 주님을 위해 박해받고 순교 당한 줄 알고 칭송하지만 바울 시대는 아직 그렇지 않았습니다. 초기교회 시대라 “우리가 믿는 게 뭔가 잘못되었나 보다” 이렇게 생각하며 신앙적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생겨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당하는 나의 환난을 보고서, 여러분이 낙심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하는 환난은 여러분에게는 영광이 됩니다.”(엡 3:13) 저는 이 말씀을 보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은 김병곤 선생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그는 불과 스물두 살 나이로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구형을 받았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저에게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이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재판받은 이철, 유인태, 황인성 같은 선배들은 검사의 사형 구형에 사색이 되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판인데 김병곤은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답니다.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판결받은 사람 8명이 판결 받은 지 20시간 만에 처형되던 서슬 퍼런 유신시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또한 환난이 닥쳐온다고 낙심 말고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라 가르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 무수히 얻어맞고 투옥되었으나 좌절하기는커녕 기뻐하며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감옥 안에서 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진즉 꺾여 항복하고 말았을 텐데 그는 끝까지 꿋꿋이 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올해 혹여 많은 풍파에 시달리더라도 담대한 신앙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한 그 누구도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환난을 당했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바울이나 스데반처럼 오히려 그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고난을 뚫고 나가 마침내 승리의 면류관을 얻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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