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위솔
2012/10/17(수)
포도원의 여우들  

의로운 사람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복이 있고, 그들이 한 일에 보답을 받고,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여라. 악한 자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그대로 보복을 받을 것이다. “아이들이 내 백성을 억누르며, 여인들이 백성을 다스린다. 내 백성아, 네 지도자들이 길을 잘못 들게 하며,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구나.” 주님께서 재판하시려고 법정에 앉으신다.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려고 들어오신다. 주님께서 백성의 장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을 세워 놓고, 재판을 시작하신다. “나의 포도원을 망쳐 놓은 자들이 바로 너희다.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해서, 너희 집을 가득 채웠다. 어찌하여 너희는 나의 백성을 짓밟으며, 어찌하여 너희는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을 마치 맷돌질하듯 짓뭉겠느냐?” 만군의 하나님이신 주님의 말씀이다. <사 3:10-15>



날뛰는 강도들

  태풍 산바가 휩쓴 날 저녁, 몇몇 교우와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를 보았습니다. 태풍 피해로 가뜩이나 심란했는데 아뿔싸, 영화는 한술 더 뜨더군요. 시종일관 고문당하는 기분은 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너른 영화관에 관객이라고는 우리 외에 두어 사람이 전부였던 이유가 그래서였겠지요. 주인공은 서른 살 먹은 청년 강도입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평생 고아로 살아왔고 자신의 이름처럼 실제 강도짓을 일삼습니다. 사채업체의 수금원으로 일하며 피도 눈물도 없는 저승사자 노릇을 합니다. 기일까지 열배의 돈을 갚지 못하면 보험금으로라도 대신 받아내고자 채무자를 신체 불구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지요. 오히려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300만원의 급전을 빌려 쓴 사람들을 쓰레기 취급합니다. 이런 강도를 어머니 아닌 어머니가 등장해 자속(自贖)의 길로 이끕니다. 잘 아시다시피 <피에타>는 세계 삼대 영화제의 하나인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도대체 왜 이 영화가 세계적인 수작으로 뽑혔을까요? 돈이라면 뭐든 하겠다는 오늘의 막장 현실을 적나라하게 잘 그려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단지 한국만이 아니라 글로벌 경제위기에 처한 세계인이 크게 공감할만한 내용이라 가능했을 것입니다.

강도는 ‘돈이 뭐냐’고 묻습니다. 이때 그의 엄마를 자처하는 여자는 돈을 일컬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짤막히 답하지요. 실제로 강도가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것도, 그가 사채 수금원이 되어 채무자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것도, 채무자들이 대출금 갚지 못해 불구가 되거나 자살을 택한 것도 다 돈 때문입니다. 돈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신체절단과 자살을 부르며, 심지어 영혼까지도 망가뜨리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떨칩니다. 감히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드는 게 바로 돈의 신(神)인 물신(物神)입니다. 한데 최근 들어 경기불황 심화로 불법 사금융 범죄가 날로 폭증하는 추세랍니다. 올 상반기만도 작년의 경찰 단속건수보다 더 많은 수치를 기록(6월까지 4841건)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서민들 삶이 팍팍하다는 증거이겠지요. 하지만 고리대로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을 짜내 자기 배를 불리는 강도들은 오늘날에야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닙니다.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도 사채업자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등쳐먹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12절에서 “아이들이 내 백성을 억누르며, 여인들이 백성을 다스린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백성을 억누르며 여인들이 백성을 다스린다니까 그거 참 멋진 세상이라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아마존 일부 부족은 일처다부제로 모계사회를 이루고 산다고 알려졌고, 스페인 갈라시야 지방에는 어린이 공화국 ‘벤포스타’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아이들과 여인들의 지배는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깁니다. ‘아이들’과 ‘여인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오렐과 이솨)는 ‘학대하는 자’와 ‘고리대금업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학대하는 자들이 내 백성을 억누르며, 고리대금업자들이 백성을 다스린다.”는 탄식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주님이 이 같이 탄식하시는 것입니까?
 

망가진 포도원

 이사야는 유다 왕 웃시야 때 소명 받아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 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주전 8세기 중반인 이즈음 남북왕국은 솔로몬의 통일왕국 이래 최고의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당시 고대근동의 열강이던 아람(시리아)과 앗시리아는  국내의 복잡한 사정으로 해외 정복전쟁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 틈을 타서 유다와 이스라엘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정치적 안정을 누렸습니다. 국왕은 전쟁에 나가 승리하여 영토를 넓힌 장수나 자신의 신복에게 토지를 나눠주곤 하였습니다.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자신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점차 대농장을 가진 자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단위면적당 수익률이 가장 높은 현금작물 위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특히 수출이 잘되는 밀, 올리브, 포도주 재배에 주력함으로써 전통적인 농사방식에 일대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산악지대에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주로 계단식으로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는데 주기적으로 가뭄 같은 자연재해에 시달렸으므로 위험성을 줄이고자 일부러 밭에 여러 작물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대농장 소유주들이 현금작물 위주의 농사를 강요하면서 휴경이나 윤작으로 땅을 비옥하게 만들던 경작방식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가뭄이나 흉년으로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지면 동네 사람들이 무상으로 빚을 빌려주곤 하였습니다. 자신들도 언젠가 얼마든지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율법이 동족에게 이자 받는 것을 금하기 때문에 상부상조하는 차원에서 무상 대출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지배 엘리트들은 큰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 주었습니다. 만일 갚지 못하면 가차 없이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이사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아모스는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다”(암 2:6)고 고발합니다. 욥이 고대근동의 사회적 불의를 고발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고아의 나귀를 강제로 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부가 빚을 갚을 때까지, 과부의 소를 끌어가는 사람도 있구나. ...아버지 없는 어린 아이를 노예로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빚을 못 갚는다고 자식을 빼앗아 가는 자들도 있다.”(욥 24:3, 9) 욥은 동방 우스 땅 사람이니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세계의 비참한 상황이 그랬나 보다하고 무심코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지배 엘리트들은 돈에 눈이 멀어 나자 동족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라졌습니다. 대출하는 사람들은 그 돈으로 무슨 투자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생존을 위한 대여입니다. 그럼에도 인정사정없이 그들을 몰아세워 밭과 재산, 마지막으로 몸뚱이까지 다 빼앗아 가곤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다의 이 같이 만연한 사회적 불의를 보시며 그들을 법정에 세우고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듯 말씀하십니다. “나의 포도원을 망쳐 놓은 자들이 바로 너희다.”


여우를 잡으라.

 하나님의 포도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5장에 나오는 유명한 ‘포도원의 노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라(사 5:5)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포도원인 이스라엘이 지금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은 포도농사가 잘 되는 지역입니다. 오늘날도 포도원들이 많습니다. 그럼 어떤 경우에 포도농사를 망치게 됩니까? 가뭄과 흉년으로 혹은 도둑이나 들짐승의 침입으로 포도농사를 망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농부들은 포도원 주변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방비를 위해 담장과 망대를 세워 포도원을 지킵니다. 아가서에는 “여우 떼를 좀 잡아 주오. 꽃이 한창인 우리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새끼 여우 떼를 좀 잡아 주오.”(아 2:15) 하고 노래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포도와 여우가 무슨 상관있기에 새끼 여우 떼를 좀 잡아 달라고 하는 것일까요? 여우는 들쥐나 곤충, 물고기 같은 것을 즐겨 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또 식물 가운데는 특히 포도를 좋아합니다. 녀석은 포도원 주변에 굴을 파고 살면서 포도 꽃이 한창인 3-4월 담장에 서식하는 들쥐를 잡아먹거나 포도나무를 갉아먹기도 합니다. 이런 여우를 그대로 두면 들쥐를 잡는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며 포도원을 망쳐 놓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이 포도원을 망쳐 놓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짓밟고 약탈해 자신들의 집을 가득 채웠다며 책망하십니다. 백성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모범이 되어야할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충실한 생활을 해야 하고 백성들을 주님께서 가르치신 의의 길로 잘 인도해야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도리어 백성들을 탈선하게 만들고 약탈하며 짓밟았습니다. 포도원을 망가뜨리는 여우같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말에서 ‘여우 짓’은 교활하면서도 귀여운 행동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서 여우는 교활한 동물이라기보다는 “어리석고 파렴치하며 파괴하는 자”라는 이미지가 강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두 차례 여우를 언급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말씀하셨고 갈릴리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를 일컬어 ‘여우’라 칭하신 적 있습니다(눅 13:32). 또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을 일컬어 “폐허 속의 여우와 같다”(겔 13:4)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나 거짓 예언자들 모두 이스라엘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익을 위해 백성과 나라를 망가뜨렸습니다. 오는 12월 대선의 최대 이슈 중 하나는 경제민주화입니다. 경제민주화는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헌법 119조 2항에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 돼 있습니다. 빈부격차와 양극화 해소를 위해 경제민주화가 시급하다는 것은 적어도 현재 여야 모두가 공감하는 상황입니다. 재벌들이 정부의 온갖 지원과 특혜를 입어 배를 불리는 사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돌아갔습니다. 가령 재벌들의 법인세를 인하한 만큼의 세금을 충당하고자 유류세나 담배세 같은 게 크게 올랐습니다. 또한 재벌슈퍼(SSM)가 골목상권을 장악하면서 자영업자들은 빈곤층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사야 시대 유다 왕국은 외형적으로는 매우 부강한 상태였지만 여우같은 지배 엘리트들로 인해 내부적으로는 골병들어 곪아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복되게 살라고 허락하신 이 땅을 허물고 망치는 여우들을 잡으십시오. 또한 우리 내부에 그러한 여우들이 틈입하지 못하게 잘 방비하여 모두가 소담하고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거두어 맛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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