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2/9/11(화)
진실을 향한 용기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납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한 바 “주님께서는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인정을 받으시고 재판을 받으실 때에 주님께서 이기시려는 것입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내가 말해 본 것입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음과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 더욱이 “좋은 일이 생기게 하기 위하여,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롬 3:1-8>



거짓의 자손

 최근 코미디 같은 사건 하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중졸 학력으로 줄곧 서울법대 출신 행세를 해오던 미래저축은행 김찬경 회장이 고졸임에도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을 사칭한 사기꾼에게 거액의 돈을 뜯긴 것입니다. 일명 ‘허박사’로 알려진 이 사기범은 김 회장의 불법 대출 사실을 파악하고 그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돈을 뜯어냈다고 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밑에 쏘는 놈 있다”더니 딱 그렇게 되었습니다. 김 회장의 평생에 걸친 사기행각은 황당무계합니다. 그는 군 복무시절 만난 한 서울법대 출신 동기에게 자신도 검정고시로 서울법대에 합격한 뒤 곧바로 입대했다며 친분을 맺었습니다. 제대 후에는 그 친구의 소개로 복학생 모임에 참석해 활동하다 대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법대  학장의 주례로 명문대 출신의 간호사와 결혼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1984년 졸업 앨범 제작과정에서 사기행각이 들통 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바 있습니다. 그때 거짓의 탈을 벗고 마음을 고쳐먹었다면 오죽 좋았겠습니까? 그는 그런 일이 있고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짜 서울법대생 행세를 하며 사귄 동기들과 계속 연락하며 지냈고 그 인맥을 활용해 건설업과 광산업으로 꽤 돈을 벌었습니다. 외환위기 때는 저축은행들을 인수하기에 이르렀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올해 은행 부실로 퇴출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러자 지난 5월 고객 돈 200억을 인출해 중국으로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혀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거짓의 모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의 말로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틴 루터킹은 “한 가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곱 가지의 거짓말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하나의 거짓은 곧 무수한 거짓을 양산하게 마련입니다. 고로 움트는 거짓을 그대로 놔둘 경우 그 자리에 머지않아 악이 번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2005년 황우석 교수 논문조작 사건이나 2007년 신정아 씨의 학력위조 사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수십억 공천 뇌물을 받아 구속된 양경숙 씨의 학력과 경력이 위조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되는 것입니까? 우리 사회가 그만큼 투명하지 않고 도처에 거짓과 불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설사 거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해관계가 얽혀 슬쩍 눈감아 주어서일 것입니다. 이제 대선이 가까워 오면서 대선주자들에 대한 검증 차원의 진실공방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집니다. 하지만 국민들이 실제 얼마나 진실한 지도자를 원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불편한 진실’이란 말이 있듯 진실 앞에 정직히 서려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할 정도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난 대선 때 다수 국민들은 BBK 실소유주로 강한 의혹을 받던 현 대통령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진실’이 밥 먹여주냐”며 묻지마 투표로 실익을 챙기려 했습니다. 경제 대통령이 되어 잘 살게 해주겠다는 MB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것입니다. 스스로 BBK를 설립했다고 말하는 강연 동영상이 나왔음에도 어설픈 거짓 해명을 곧이들었습니다. 그 쓰라린 대가를 지난 4년 넘게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그러고도 여전히 허황된 환상을 깨고 실체적 진실을 찾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통감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히틀러는 “일반대중은 사소한 거짓말보다는 거창한 거짓말에 더 쉽게 속을 것”이라 했습니다. 자신을 천지인을 포괄하는 참부모이자 재림주이고 메시아라 주장한 통일교 교주 문선명 씨의 사례가 이것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거짓의 아비’인 악마에게 홀려 살기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행하며 거짓된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살아가는 게 당연합니다(요 8:44).


착한 거짓말?

 일설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 평균 200번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일컬어 “진화의 원동력이자 생존전략이며 ‘일종의 사회적 윤활제”라 적극 평가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거짓 없는 인간의 삶이란 너무 무미건조하고 진부하며 팍팍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에게 거짓이란 불가피하기에 다만 어떤 거짓말을 하느냐를 놓고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거짓말 자체를 무조건 나쁘게 보지 말고 하얀 거짓말이냐, 검은 거짓말이냐를 구분해 그 유해성을 평가하자는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선의의 거짓말은 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아 끌어대기도 합니다. 가령 아브라함은 그랄 땅에 이주해 잠시 머물 무렵 자신의 아리따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해서 그랄 왕 아비멜렉을 속였습니다. 아내라고 했다가는 자기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아비멜렉이 그를 불러 왜 자신을 속였냐고 호통 치자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내 아내를 뺏으려 할 때 나를 죽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사실 내 아내는 이복 누이이기에 나의 누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창 20:11-12) 아브라함은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므로 사회적으로 늘 불안한 소수자의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자 이방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소개하곤 했던 것입니다. 한데 아브라함에 따르면 사라가 그의 이복누이도 되기에 ‘내 누이’라 소개한 말이 전적인 거짓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잘못이라면 꼭 했어야할 ‘내 아내’라는 소개를 하지 않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 편을 들어 아비멜렉을 꾸짖으시고 그 집안의 여인들을 징계하십니다.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여호수아는 그 성에 정탐꾼 두 사람을 파견합니다. 그들은 하마터면 경비대에 잡힐 뻔했는데 창녀 라합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났습니다. 그때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 두 사람이 자기 집에 오긴 했으나 조금 전에 떠났다며 어서 뒤쫓아 가 보라고 둘러댑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창녀 라합은 정탐꾼들을 호의로 영접해 주어서,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망하지 않았다”(히 11:31)며 라합을 칭송합니다. 아브라함과 라합, 둘 다 거짓말을 하였음에도 주님이나 성서 기자에게 질책 받기보다는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16세기 헨리 가넷(Henry Garnet 1555-1606)이란 예수회 사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양심에 비추어 부끄럼 없이 거짓말하는 방법을 개발해 교본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른바 ‘심중유보(心中留保, Equivocation)’라는 불리는 두 가지 의미로 말하는 어법입니다. 이것은 동료 보호나 부당한 압박에 저항할 목적 등 거짓말 사용이 불가피할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넷은 심중유보 어법의 성서적 근거를 예수님에게서 찾아냅니다. 초막절이 가까웠을 때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유대로 가셔서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시라 권유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다며 이번 명절에는 올라기지 않겠다”(요 7:8)고 답하십니다. 그런 다음 ‘아무도 모르게’ 슬그머니 혼자서 초막절 명절에 유대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혹자는 이 일을 놓고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신 명백한 증거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넷은 예수님이 심중유보의 어법에 따라 말씀하셨기에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니라고 봅니다. 즉 “나는 아직 내 때가 차지 않았으므로, (너희들과 함께는)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요 7:8)는 말씀에서 ‘너희들과 함께는’이란 말이 생략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아브라함처럼 해야 할 말을 마음속으로 생략하고 대답하신 것이라 거짓말을 하신 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좀 억지스럽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과 양심에 비추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는 가넷의 철저한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진실의 소리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다 죄악 가운데 살면서 거짓말을 하는데 익숙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선한 의도로 하는 거짓말도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돋보이게 한다면 그건 권장할만한 좋은 일 아니냐고 궤변을 늘어놓는 자들이 있었나 봅니다. 이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여 유대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겼기에 십자가의 구원사건이 일어났으니 유다의 큰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와도 같습니다. 바꿔 말하면 아동 성폭행을 저질러 사회적으로 경종을 울린 한 흉악범이 자신의 범행으로 경각심을 얻게 되었으니 오히려 자신에게 감사해야할 일 아니냐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울은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 말합니다. 우리의 거짓과 사악한 행동으로 결코 선한 일을 도모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기자도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알을 보려는 이는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혀를 조심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입술을 조심하라”(벧전 3:10)고 교훈합니다. “거짓말쟁이가 되느니, 차라리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 낫다”(잠 19:22)는 잠언의 경구도 있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만연한 세계에서 진실을 말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들은 마지막날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계 22:15). 폭력과 거짓이 난무한 이 세상 가운데 살면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용감하게 늘 진실의 목소리를 내고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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