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2/8/26(일)
심장에 새기라  

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오늘 내가 당신들에게 주는 이 모든 율법과 같은 바른 규례와 법도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당신들은 오로지 삼가 조심하여, 당신들의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평생 동안 당신들의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한 그것을 당신들의 자손에게 길이 알리십시오. 당신들이 호렙 산에서 당신들의 하나님이신 주님 앞에 섰던 날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을 나에게로 불러 모아라. 내가 그들에게 나의 말을 들려 주어서, 그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나를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또 이것을 그들의 아들딸에게 가르치게 하려고 한다.’ <신 4:7-10>



망각의 강가에서

  며칠 전 초등학교 4학년인 공부방 여학생 두 명이 퀴즈를 내달라 졸랐습니다. 무슨 문제를 낼까 잠시 고민하다가, 8. 15와 6. 25가 각각 몇 년도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리는 날인지 물어보았습니다. 내 딴에는 너무 쉬운 문제를 냈다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 애들은 답을 몰랐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한참 시간을 주었으나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8. 15가 광복절인 줄은 겨우 기억해냈습니다. 하지만 그게 언제 일어난 무슨 사건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겨 식민지였다가 36년 만에 해방된 날이라며 그게 몇 년도에 일어난 사건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입니다. “1987년 아니에요?” 8.15와 6.25를 모르는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집, 학교, 교회, 어디에서건 여태 배운 적이 없으니 아직 모르는 거겠지요. 이게 비단 우리 공부방의 초등학생들만의 실태는 아닐 겁니다. 역사교육이 너무 소홀히 되고 있다는 지적이 어제 오늘 나온 것은 아니니까요. 다행히 작년에 <한국사>가 고교 필수과목이 되었지만 수능시험에서는 아직 선택과목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학생들에게 8.15, 6.25, 4.19, 5.18 같은 날은 밸런타인데이나 빼빼로데이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는 게 어쩌면 당연합니다.

성서공회 총무를 역임한 민영진 박사가 1970년대 이스라엘에 유학하던 시절 큰 아들을 국립 초등학교 1년에 입학시켰습니다. 한데 아들이 학교서 받아온 국어책 첫 장에 적힌 다음의 글귀를 보고 깜짝 놀랐다합니다. “우리 조상은 파라오의 노예였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학생들에게 굳이 그런 수치스런 역사를 가르쳐 어쩌자는 거냐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린이들일수록 되도록 밝고 긍정적인 내용을 먼저 접하게 하는 것이 교육상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도 지난날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의 노예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좋아서 가르치진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수치스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에서 어린 아이 때부터 일부러 각인시키지 않나 생각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의 역사는 출애굽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가르치려면 그들 조상이 긴 세월 이집트 노예살이를 했다는 사실을 감출 수 없지요. 최근 들어 이스라엘에서도 역사교육이 흐지부지 되어 젊은 세대가 뿌리를 잘 모른다는 지적이 많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에 비해 크게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 자체가 동일한 혈통이나 언어, 사는 지역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유대인 여부는 토라와 탈무드 및 유대문화를 얼마나 잘 간직하고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 납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토라를 배우고 안식일과 유월절, 대속죄일 같은 각종 절기를 지키며 유대인으로 자라는 아이들이 그들 역사를 웬만큼 알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기억이다

 요즘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계기로 독도영유권을 둘러싼 외교 마찰이 가히 점입가경입니다. 고(故) 장준하 선생의 묘역을 이장하면서 유골에서 발견된 타살 흔적을 놓고도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사인규명 재조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역사란 결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현재 안에 살아 있다”고 했습니다. 완료형이 아닌 현재 진행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명백한 진실이라도 가려지고 왜곡되고 잊히는 순간 그럴싸한 거짓에 의해 대체되고 맙니다. 진실 자체가 스스로를 거짓에서 지켜내지는 못합니다. 누군가 그것을 끈질기게 기억해야하고 조작된 거짓에 맞서 잘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잊혀 가는 진실을 지켜내려는 기억의 투쟁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에는 홀로코스트(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의 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인 야드바쉠이 있습니다. 이 기념관에는 학살된 유대인들이 남긴 각종 유품과 사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마지막 출구에는 다음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기억은 우리를 자유케 하나 망각은 우리를 다시 포로로 만든다.” 예수님은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2)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야드바쉠 기념관의 명구는 예수님 그 말씀에서 ‘진리’를 기억으로 살짝 바꿔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지난 과거에 매여 있느냐며 그럴 여력이 있거든 미래를 위해 쏟으라합니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지난 어두운 과거는 괄호를 치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시간은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거는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규정하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것을 괄호 치면 자기 정체성이 사라져 미래는 더욱 암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디에서건 올바른 기억이 상당히 중요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랍비 헤셀은 말합니다. “기억은 신앙의 근원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실제로 기억 없는 신앙이란 거의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공동의 기억이 있기에 애써 그분을 찾습니다. 그분을 향한 우리의 기억이 다 지워지고 말았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감사, 찬양, 경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를 지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이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고자 힘쓰는 사람입니다. 역으로 하나님을 떠나 유리방황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에게 어떤 은혜와 사랑을 베푸셨는지 잊어버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까맣게 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그 세대 사람들이 모두 죽은 뒤에 일어난 새로운 세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돌보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삿 2:10) 여호수아는 늙어 죽기 전에 온 이스라엘을 세겜에 불러 모아 출애굽 여정을 간단히 회고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고 없더라도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라며 백성들과 언약을 맺습니다(수 24). 그런데 그 세겜언약이 어느덧 다 잊히고 심지어 하나님과 출애굽 사건조차 모르는 세대가 생겨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전승이 단절되어 하나님을 망각한 세대는 우상숭배와 같이 주님 보시기에 악한 행동을 일삼다가 심판과 멸망을 자초하곤 합니다.


마음 판에 새기라

신명기는 모세가 말년에 요단 강 동쪽 모압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만큼은 잊지 말고 꼭 지키라며 신신당부한 말씀입니다. 그런 만큼 ‘기억하라’는 명령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 말씀에서도 기억을 매우 강조합니다. “당신들은 오로지 삼가 조심하여, 당신들의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정성을 기울여 지키고, 평생 동안 당신들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한 그것을 당신들의 자손에게 길이 알리십시오.” 성서의 기억하라는 명령은 단지 옛 일을 회고하라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가령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라는 지시는 출애굽 여정을 흘러간 옛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듯 회고하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출애굽 사건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생히 살려내어 동참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고 그분과 다시 만나라는 명령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기억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머리로 잘 기억해두라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지키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쉐마로 불리는 신명기 6장 말씀에서 모세는 엄히 명합니다.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에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신 6:6-7) 이는 주님의 율법을 철두철미 기억하고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은 가슴 판에 새겨 넣으라는 뜻과도 같습니다.

돌비석에 새겨도 되고 어떤 조형물로 만들어 기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가시적인 것들보다는 마음에 새기는 것을 더 중시하였습니다. 기억을 돕는 외부의 어떤 장치들에 의존하기 보다는 생생히 살아 있는 심장의 기억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주전 586년 남유다 왕국이 신바벨로니아의 느브갓네살 군대에 멸망하였을 때 예루살렘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했습니다. 머나 먼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간 유대 포로민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성전 없는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나타난 자들이 바로 이른바 ‘신명기 사가’로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야웨만이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신앙으로 모세의 신명기 법전과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였습니다. 낯선 이역만리의 바벨론 제국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온갖 설움을 당하면서 처절한 기억의 투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들은 출애굽의 위대한 대장정과 시내 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정신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그 길에서 탈선하여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에 열을 올렸기에 오늘날과 같은 끔찍한 재앙을 만나게 되었다고 유다왕국의 멸망 원인을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신명기 사가들이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 세월 각 나라들을 떠돌았음에도 끝내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숱한 역경을 헤치고 다시 하나 되어 나라도 재건하였습니다.

우리만 하나님을 기억하려 애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보라,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은 늘 내 앞에 서 있다.”(사 49:15-16) 사람들은 조금만 힘겨운 시련이 닥쳐와도 주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잊고 계신다고 푸념을 늘어놓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의 자녀들을 버리거나 결코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평안하고 안락해졌다고 교만하여 주님을 망각하고 그 길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만났던 아름다운 순간이 언제입니까? 그 기억을 잊지 마십시오. 한 평생 주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정성 다해 섬기며 신앙의 단절 없이 자손 대대로 전승하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비천할 때에 기억하셔서 구원해주신 주님의 크신 은총이 날마다 더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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