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2/7/1(일)
첫 열매 감사  

“그로부터 일곱 이레를 세는데, 밭에 있는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시작하여 일곱 이레를 세십시오. 그리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복을 따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가지고 와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칠칠절을 지키십시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그곳에서, 당신들과 당신들의 아들과 딸과 남종과 여종과, 성안에서 같이 사는 레위 사람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까지도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지키십시오.”
                                                         <신 16:9-12>



‘감사’의 염치

 며칠 전 이주노동자 한 분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한국에 체류한지 벌써 십 수 년은 족히 넘은 분입니다. 거의 잊을 만하면 뜬금없이 연락해 이런저런 도움을 요청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SOS 전화였습니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으나 내내 참았던 한 마디 쓴 소리를 했습니다. “평소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왜 이리 꼭 어려운 일 생길 때만 연락하느냐”고. 그제야 “조만간 시간을 내 한 번 찾아뵙겠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간혹 이주노동자들의 도움 요청을 받을 때, 어지간하면 시간을 내어 최대한 도와주려 합니다. 그들의 열악한 처지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고도 ‘감사’는커녕 당연한 듯 그저 이용만 하려드는 얌체 같은 사람들을 볼 때면 얄밉고 실망스럽습니다. 우리 속담에 “줄수록 양양, 먹을수록 냠냠”이란 말이 있지요? 어떤 사람이 이웃의 사는 처지가 딱해 매달 얼마씩 생활비를 보태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만하면 됐다 싶어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더니 앞서 도움을 받던 사람이 벌컥 화를 내더랍니다. 매달 보내준 돈으로도 살기가 힘든데 더 보내지는 못할망정 왜 그새 지원을 끊느냐는 거였습니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도움에 크게 감사했으나 계속 도움을 받다보니 당연하게 여기고는 부족하다며 자꾸 더 달라고 외려 불평하더라는 것이지요. 잠언에도 유사한 경구가 하나 있습니다. “거머리에게는 ‘달라, 달라’하며 보채는 딸이 둘이 있다”(잠 30:15) 이미 받은 복만도 매우 큰데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더 달라고 하나님께 밤낮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얌체 같은 사람들보고 하나님이 참다못해 이렇게 말씀하신답니다.
“이젠 네가 좀 줘봐라!”

사람이 감사를 모르면 ‘달라, 달라’라는 두 딸을 둔 거머리가 되고 맙니다. 감사는 사람으로서 지녀야할 최소한의 염치입니다. 반드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해야하는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란 말은 일상의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요구입니다. 이는 평소 당연하게 생각하던 일들에서조차 늘 감사할 조건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감사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개인적 생각에서 나온 과장된 권고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했습니다. 기독교인치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다들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울에 따르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확실한 뜻 가운데 하나가 ‘늘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빌 4:11)고 했는데 그 비결이 바로 ‘감사생활’이 아닐까 합니다. 항상 감사를 잊지 않았기에 선교 여정 중에 숱한 고초를 겪고도 넉넉히 견디어낼 수 있었겠지요. 바울은 묻습니다. “그대가 가진 것 중에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고전 4:7) 우리 가진 것 모두가 하나님 은혜로 받은 것이니 감사해야지 스스로 얻은 것 마냥 남에게 으스대며 자랑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찬양하거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지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진 자들(롬 1:21)에게는 주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는 자들이 있기에 이 같은 경고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이는 심히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을 어기고 어떻게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칠칠절을 지키라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많은 교회가 맥추감사주일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대부분의 교회가 맥추감사주일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맥추감사주일을 그만 지키자고 총회가 결의한 일도 없는데 흐지부지 그렇게 되었습니다. 흔하디흔했던 보리타작이 사라지면서 맥추감사주일도 점차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보리나 밀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아야 맥추감사가 실감날 텐데 그 환경적 기반이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맥추감사주일은 성서의 칠칠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칠칠절이란 무교절부터 7주간을 지난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추수절기를 말합니다. 그래서 50이란 의미로 ‘오순절(五旬節)’이라 부르기도 하고 보리추수를 하는 시기의 절기라 ‘맥추절’이라 칭합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초막절과 함께 이스라엘 삼대 순례절기 중 하나였습니다. 이 삼대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주님께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열흘 뒤인 오순절에 성령이 예루살렘 교회에 임했다고 전해줍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여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만나 전도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그날따라 왜 이렇게 각국에서 몰려온 유대인들이 많았을까요? 칠칠절(오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순례절기이니만큼 세계 도처의 많은 남성 유대인이 모여와 예루살렘이 와글와글 한 상태였던 것입니다.

유월절과 수장절의 경우는 일주일 이상 절기가 계속됩니다. 반면 칠칠절은 딱 하루 동안 지키는 절기입니다. 바로 이날에 성령이 강림한 것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의문이 생겨납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기에 기독교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킵니다. 그런데 왜 7월 첫 주에 다시 맥추감사주일이 있는 것일까요? 유대인의 오순절에 성령 강림사건이 일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성령 강림절과 별개로 7월 첫 주를 맥추감사주일로 지키기로 하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국의 밀 수확의 시기가 팔레스타인과 달리 6월말경이라 그 시기를 늦춘 것입니다. 그런데 보리나 밀농사 자체가 희귀해졌으니 의미가 크게 퇴색하고 말았습니다. 유대인들도 칠칠절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느냐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농사절기에서 시작된 칠칠절에 새로운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칠칠절은 추수절기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주님으로부터 토라를 받은 날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래서 칠칠절이 되면 유대인들은 저녁식사 이후 회당에 모여 랍비의 토라 강독을 듣고 동이 틀 무렵까지 토라 공부에 몰두한답니다. 어찌하여 칠칠절이 토라를 받은 날로 알려졌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이집트를 탈출해 50일 만에 시내 산에 도착했다는 계산 때문입니다(출 12:2-3; 19:1). 유대인들은 나라가 망해 더 이상 농사짓기 어려워지자 칠칠절을 ‘하나님께서 토라를 주신 날’로 기리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농사로 거둔 열매가 없더라도 주님 말씀을 읽고 지킴으로써 그 열매를 드리겠다는 그들의 굳은 신앙적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는 보리와 밀농사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맥추감사주일을 지키지 않는 우리를 반성케 합니다. 칠칠절에는 모든 남종과 여종, 떠돌이, 레위인, 고아, 과부까지 모두 함께 주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외된 사람 하나 없이 다함께 즐거워하는 해방의 축제가 바로 칠칠절이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예배축제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다시 살려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첫 열매’를 드림  

 얼마 전 남한 인구가 5천만에 이르렀다지요? 그런데 5천만이나 되는 인구 가운데 전업 농민은 이제 300만 명도 채 안됩니다. 여수만 해도 그나마 조금만 움직이면 논밭을 볼 수 있지만 대도시에서는 농사와 담쌓고 사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밀의 맏물’ 곧 첫 열매를 거둘 때 추수절을 지키라(출 34:22)는 말씀은 별 나라 이야기 같이 들릴  것입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최근 들어 부쩍 도시농업이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파트 베란다를 이용해 상자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여수시가 실시하는 도시민 체험농장에 참여하는 사람만 해도 예년에 비해 몇 배나 늘었습니다. 이번에 솔샘 텃밭에서 감자를 수확하고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꼭 밀과 보리가 아니라도 봄철에 씨 뿌려 거둔 농작물들에 대한 추수감사 예배는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실제로 농부들은 5-6월에 딸기, 수박, 참외, 매실, 벌꿀 등 가을철 못지않게 많은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한 해의 중간결산 차원에서 이런 열매들에 대해 추수감사를 드린다면 ‘감사생활’을 환기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성서는 한해  ‘맏물’을 주님께 드리는 일을 매우 중시합니다. 가령 잠언은 “너의 재산과 땅에서 얻은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잠 3:9)고 명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을 위한 성물 곧 그 소산의 ‘첫 열매’(렘 2:3)라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에 따르면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 공동체의 규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해마다 우리 밭에서 나는 맏물과 온갖 과일나무의 첫 열매를 주님의 성전에 바친다.”(느 10:35) 이 모두는 성서가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일을 얼마나 강조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리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 ‘맏물’을 자신의 것으로 성별하셨다는 일차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보다는 하나님이야말로 우리가 받아 누리는 모든 은혜의 열매에 대해 가장 먼저 감사받아야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시화, 산업화된 세상에서 산다고 해도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첫 열매’를 드리는 맥추감사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맥추절에는 햇밀을 거두어 만든 빵 두 덩이를 주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맏물로 만든 빵 두 덩이를 주님께 드림으로 축제의 절정에 이릅니다. 올해 상반기를 무사히 지나며 주님께 드릴 나의 맏물은 무엇인지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추수감사의 제사로 은혜 가득한 한해를 이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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