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바위솔
2012/5/13(일)
선한 불화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나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10:34-39>


두 가지 ‘불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시성(詩聖)이라면 대번 호메로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동시대 인물 가운데 헤시오도스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음유시인이던 호메로스는 그의 작품에서 주로 전쟁 영웅이나 귀족들에 대해 노래합니다.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같은 웅장한 민족 대서사시를 남겼으나 평범한 백성들의 삶과는 아무래도 괴리가 있습니다. 한데 헤시오도스는 자신이 농민 출신인데다 계절에 따른 농민의 생활을 담은 《노동과 나날》이란 서사시집을 남겼습니다. 그는 시인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체계적인 시 쓰기 교육을 받아 성장한 전업 시인도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헬리콘 산기슭에서 목동생활을 할 무렵 무사이 여신들의 소명을 받아 시인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무사이 여신들은 제우스의 여덟 딸들로 시와 예술을 관장합니다. 이런 여신들의 부름을 받아 시인이 되어선지, 헤시오도스는 한 전쟁영웅을 기리는 경연대회에서 호메로스와 겨뤄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습니다. 《노동과 나날》은 노동의 신성함과 정의로운 삶을 주제로 합니다. 헤시오도스에게는 페르세스라는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페르세스는 부친에게 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재판관에게 뇌물을 써서 형의 재산마저 가로채려 합니다. 이에 헤시오도스는 게으르고 탐욕스런 자신의 동생에게 불의한 삶을 그만두고 부지런히 농사지으며 정의롭게 살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그 방법도 친절히 알려줍니다.

헤시오도스는 자신의 동생을 설득하고자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에리스(Eris)가 있다고 말합니다. 에리스는 밤의 여신 뉙스가 낳은 ‘불화의 여신’입니다. 그런데 이 에리스가 두 종류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악한 전쟁과 불화를 조장하는 해롭고 위험한 에리스”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의 경쟁심을 유발해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선한 에리스랍니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사악한 에리스의 꼬임에 넘어간 사람은 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싸움 구경이나 하거나 분쟁에 휘말려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선한 에리스를 추구하다보면 게으름을 벗고 더 행복한 삶을 누리는 복을 얻습니다. 헤시오도스는 인류가 다섯 종족 즉 황금, 은, 청동, 영웅 종족시대를 거쳐 철의 종족에 이르렀다 합니다. 철의 종족시대에는 밤낮 수고와 고통이 끊이지 않고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무너져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 친절이 사라지고 자식들은 늙은 부모를 돌보기는커녕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휘두릅니다. 정의롭고 정직한 사람은 주목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정의는 주먹에 있고,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사라진” 세상이 바로 철의 종족이 사는 시대입니다. 헤시오도스는 이런 암울한 세상을 바꾸려면 자연의 순리에 따라 성실히 농사짓는 생활로 정의를 세우는 일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평화 아닌 칼을

  흉포한 세상에 대한 헤시오도스의 묘사는 부패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 미가의 고발과 유사합니다. 미가는 헤시오도스처럼 주전 8세기 말에 활동했고 농민출신 예언자로 추정됩니다.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뿐이다.…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아라. 친구도 신뢰하지 말아라. 품에 안겨서 잠드는 아내에게도 말을 다 털어놓지 말아라.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일 것이다.”(미 7:2, 5-6) 이로써 주전 8세기 말 그리스나 이스라엘 사회의 형편이 비슷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불신풍조가 만연한 무법천지인 세상 가운데서 미가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일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만이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붕괴된 상태, 곧 절망의 백척간두에서 다만 하나님의 구원을 갈구하며 기다리는 예언자의 절절한 심정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미가의 예언을 인용하시면서도 그것을 살짝 비틀어 사용하십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 말라며 평화 아닌 칼을 주러왔다고 말씀합니다. ‘평화의 왕’으로 알려진 예수님 자신이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나는 평화 아닌 칼을 주려고 왔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 5:9)고 가르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이스라엘의 여러 고을로 파송하실 때에는 어느 집에 들어가 유숙하든지 평화를 비는 인사를 하라(마 10:12)고 지시하시기도 했습니다. 평화의 길을 모르고 전쟁의 길로 치닫는 예루살렘을 보시고는 탄식하며 우시셨습니다(눅 19:42). 그 뿐입니까?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실 때 제자 중 하나가 칼을 휘두르며 방어에 나서자, 그에게 칼을 거두라며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한다”(마 26:52)고 일침을 놓기도 하셨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찾아보아도 예수님이 칼로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그러라고 가르치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평화의 삶을 살라고 시종일관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는 분이 평화 아닌 칼을 주러왔다고 하시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미가는 아들, 딸, 며느리가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를 경멸하고 대들고 다투는 현실을 개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자신이 아들, 딸, 며느리가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와 맞서 갈라지게 하러왔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과 도마복음에도 평행구절이 있는데 도마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거니와, 저들은 내가 이 땅에 분쟁을 불과 칼과 전쟁을 주러 왔음을 모르고 있느니라. 다섯 식구가 있는 집에 셋이 둘에게 맞서고, 둘이 셋에게 맞서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니, 모두가 홀로 서리라.”(도마 16) 평화 아닌 칼과 불화를 주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세 복음서에 나온다는 사실은 그 진정성을 드러냅니다. 말하자면 누군가 예수님이 하지도 않은 말씀을 끼워 넣거나 왜곡한 게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같은 말씀을 하셨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왜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가 맞서 갈라지게 만들려 하시려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십계명만 보더라도 하나님과 관계된 네 계명을 제외하고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신명기에는 부모 말을 전혀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며 반항만 하는 자녀의 경우에는 성읍 모든 사람이 공개처형을 하라(신 21:18-21)는 규정마저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율법을 모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를 갈라지게 하러왔다고 선포하시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람은

 물론 예수님도 부모님을 잘 공경해야 한다고 보셨습니다. 그러시기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신의 제자들은 왜 장로들의 전통을 어기느냐?”고 따질 때 다음과 같이 반박하십니다. “너희는 왜 너희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부모를 욕하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부모님에게 고르반(내게서 받으실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되었습니다)하고 말만 하면 제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너희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다.”(마 15:3-6)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을 핑계 삼아 부모님을 제대로 공경하지 않는 유대 지도자들의 위선을 호되게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이 임박했을 때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잘 모시라고 맡기시기도 했습니다(19:26-27). 그런 예수님이 아들, 딸, 며느리가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와 맞서 갈라지게 하려고 오셨다는 데에는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습니다. 예수님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매우 임박했음을 알리는 하나의 전조 예고에 해당합니다. 평소에는 장가가고 소도 사야하고 논밭에 나가 일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종말이 코앞에 닥친 상황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이런 때에 “지붕 위에 있는 사람은 제 집 안에 물건을 꺼내려 내려오지 말아야합니다.” 또한 “밭에 있는 사람은 제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아서지도 않아야합니다.”(마 24:17-18) 민방위 훈련만 해도 통행이 금지되는데 곧 세상 종말이 닥친다면 이건 엄청난 비상상황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행하던 유대 묵시문학은 세상 종말이 임박하면 대개 가정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순차적인 붕괴가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견지에서 젊은 세대와 늙은 세대의 충돌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가정의 질서와 조화, 자식과 부모의 원만한 관계를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전제가 있습니다. 그런 가정의 평화에 앞서 예수님을 먼저 더 사랑해야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시어머니로 표상되는 늙은 세대를 꼭 문자 그대로 볼게 아니라, 어떠한 사회개혁도 거부하는 기득권층이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로 말하자면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부류가 이에 해당하겠지요. 그들과 충돌이 두려워 지배 질서에 안주한다면 겉으로는 평온하게 보일지라도 그건 진정한 평화라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대나 가족 간의 갈등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십니다. 그 자신이 어머니와 형제들이 말리는데도 과감히 출가하여 대안의 하늘가족을 이루셨습니다. 그런 분이시기에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도록 허락해 달라는 제자에게도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에게 치르게 놔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명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자신의 모든 소유를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가족, 재물, 체면, 권력, 편견 따위에 그대로 매여 있는 상태로는 몸이 무거워 성큼성큼 앞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려 애쓰다가, 그분이 말씀하신 ‘선한 불화’를 일으키고 잘 감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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