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3/11(금)
그를 인정하라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지 말고, 주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여라. 그러면 이것이 너의 몸에 보약이 되어, 상처가 낫고 아픔이 사라질 것이다. <잠 3:5-8>


잔꾀의 부메랑

옐로스톤이란 미국의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그 면적만 해도 9,000㎢로 제주도의 4.8배이고 충청남도보다 더 넓은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입니다. 여기에는 화산과 온천, 폭포, 들소, 사슴, 고라니 등 온갖 생물이 번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생태보존 상태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랍니다. 1990년대만 해도 산불이 자주 나고 갈수록 숲도 황폐해져 공원 당국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숲이 자꾸 황폐해 가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사를 해보았더니 말라 죽어가는 활엽수의 수령이 대부분 70년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 도대체 192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나무들이 죽어 가는지 그 당시 기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1920년대에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늑대 10만 마리가 포획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언뜻 늑대와 숲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지만 혹시나 해서 늑대를 캐나다에서 31마리를 들여와 복원을 시켜보았습니다. 이처럼 늑대가 숲을 마음껏 뛰어다니기 시작하자 신기하게도 황폐해가던 숲이 점차 살아났습니다. 1920년대만 해도 늑대는 사람과 가축에게 해코지 하므로 백해무익한 맹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생각에 대대적인 소탕을 벌여 무려 10만 마리나 잡았겠지요. 한데 늑대가 없어지자 사슴들(엘크)이 크게 늘어 풀과 나뭇잎을 무분별하게 뜯어먹었고 숲이 점차 황폐해졌다고 합니다. 사냥으로 사슴의 개체수를 줄인다고 한들 먹이사슬에 의한 자동조절 기능과는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늑대가 사냥해 먹다 남은 사슴의 주검은 까치나 곰 따위가 뜯어 먹기에 다른 동식물들에게까지 두루 영향을 끼쳤습니다. 결국 늑대는 생태보존을 위해 꼭 필요한 맹수였음을 사람들은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내용의 논문이 작년 사이언스라는 유명한 과학 잡지에 실린 바 있습니다.

전도서의 현자 코헬렛은 말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개역, 전 7:29) 이 구절을 새번역에서는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라고 번역합니다. 이 성구는 지혜롭다는 인간이 잔꾀를 부리다가 그 부메랑을 맞는 오늘의 현실에 적중한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일제강점기에 호랑이, 늑대 따위를 대대적으로 남획하여 지금은 멧돼지 번성으로 농가의 피해가 너무도 크지 않습니까. 인간이 머리를 쓴다고 썼는데 그게 두루 유익하기보다는 환경을 파괴하고 더 살기 힘들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한들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감히 인간의 지혜가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고전 1:25). 하나님이 호랑이나 늑대 같은 맹수를 만드셨다면 그들이 뭔가 쓸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지 않습니까? 하찮은 모기나 개미 한 마리일지라도 뭔가 쓸모가 있으니까 지어내신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그 쓸모를 발견하고 깨닫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에게서 도망친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만나 예수 안에서 한 형제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때가 무르익자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몬 11)라고 말합니다. 주인에게 도망쳤기에 당시로서는 죽어 마땅한, ‘쓸모없는’ 한 노예를 바울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남이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함으로써 건축자의 요긴한 머릿돌로 사용하는 일이 복음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독초를 약초로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독초를 찾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약초를 찾아도 모자랄 판에 뭐 하러 독초를 찾아다닐까 하는 호기심에 끌려 봤더니 “독초가 곧 약초”임을 알려주더군요. 아무리 당장 인체에 해롭다고 할지라도 그 독성을 억제하는 법제 과정을 잘 거치면 훌륭한 약재가 된다는 사실을 몇 가지 사례로 소개하였습니다. 가령 제 어린 시절 도랑에서 고기를 잡을 때 때죽나무 열매를 돌로 찧어 웅덩이에 풀어 넣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면 미꾸라지, 중고기 같은 고기들이 기절하여 물 위로 동동 떠오릅니다. 그 열매에 독성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런 때죽나무 열매도 햇볕에 잘 말려 약재로 사용하면 각종 호흡기 질환과 염증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지난 추석 때 담양 부모님 댁에 갔더니 아버님이 하시는 양봉 벌통들 앞에 말벌들이 계속 찾아왔습니다. 그것을 방치하면 큰 말벌의 경우 잠깐 사이에 벌통 한 통은 꿀꺽할 정도 그 피해가 막심합니다. 하지만 그 말벌조차도 잡아서 약재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맹독이 법제 과정을 거치면 좋은 약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법제 과정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해 갈대바다를 건넌 다음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 들어갑니다. 가는 내내 목이 타 죽겠는데 물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물웅덩이를 하나 발견했으나 그 물을 마시려 했더니 맛이 써서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떤 나무 하나를 보여주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웅덩이에 넣었더니 그 쓴물이 단물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도 오늘날 말하는 ‘법제’의 한 과정을 암시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집회서에서 벤 시락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땅에 약초를 마련해 놓으셨으니 현망한 사람은 그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알아보도록 나뭇가지로 물을 달게 만들어 주지 않으셨더냐?”(집 38:4-5)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온갖 산야에 좋은 약재를 주셨습니다. 약초만이 아니라 독초까지도 다 유익한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해 놓으셨습니다. 그런 민간 의학, 대체의학을 공부하는 어떤 분의 글을 보니까 예전에는 산은 그냥 산이었는데, 알고 보니 “산은 그냥 산이 아니라 보물섬이더라.”고 썼더군요. 그 흔해빠진 쇠비름 하나만해도 장염, 당뇨, 수은중독 따위의 질병 치료에 좋다고 합니다. 더욱이 아직 연구조차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전인미답의 무수한 초목이 있습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되고 건강한 삶을 살라고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보약조차도 너무 많이 먹거나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이 먹으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가령 홍삼을 먹은 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차며 얼굴도 뜨거워지는” 증상을 보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체질이 홍삼에 맞지 않은 소양인이라 그렇답니다. 반면 독초를 먹어도 그게 부작용은커녕 오히려 약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말벌에 쏘였을지라도 어떤 분은 그 벌침 한 방에 죽을 수도 있고 다른 어떤 분은 오히려 그게 봉침 효능을 내서 건강에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이 땅의 약초들을 알아내서 건강을 도모하는 일이야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잠언은 그것보다 더 ‘생명의 근원’인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잠 4:23)고 봅니다. 마음이 평안하면 오는 병도 다 극복할 수 있지만 마음이 비뚤어지고 상처 나고 근심걱정으로 애태우면 그에게 백약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고 말씀합니다.  


중심을 잡고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네 ‘마음 다해’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음의 중심을 확고히 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 없이 나아가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이 가능합니까?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삶 곧 하나님께 닻을 내리고 동행하면 됩니다. 내 교만과 아집을 내려놓고 매사에 주님을 인정하면 됩니다. 사람도 인정받아야 힘을 얻고 삶의 활력이 생기지만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주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십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시자 아버지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당부합니다. “당신들 가운데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가, 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을 멀리하여, 다른 민족의 신들을 섬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 가운데 독초나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신 29:18)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데 쏠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무엇보다 주님께 우리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마음 다해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삶을 살면 주님은 우리를 가장 복된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중심에 들어와 계신다면 인생의 거센 파도와 태풍이 몰아친들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때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줄 몰라 허둥대는 것이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생명의 근원이신 그분이 우리의 앞날도 인도하실 것이므로 모든 역경, 고통, 상처를 견디고 이겨냅니다. 이 믿음으로 늘 주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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