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6/3/11(금)
복 받은 눈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들 밖에는 그리고 아버지를 계시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잇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눅 10:21-23>



가려진 눈

 이란의 자그로스 산맥 서쪽 케르만샤 도시 근처에 비시툰이란 산이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로이자 고대의 교역로 잘 알려진 ‘왕의 대로’가 지나는 곳입니다. 대략 500m의 암벽으로 만들어진 이 산의 중턱에는 높이 7m, 폭 18m 규모의 부조와 쐐기문자 형태의 글이 1,200줄 가량 새겨져 있습니다. 아래서 보면 부조에는 어떤 키 큰 사람이 오른 손을 들고 서 있고 그의 앞에 아홉 명, 뒤에 두 명의 사람이 약간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입니다. 16세기 프랑스의 가르당(Gardanne) 장군은 이 부조를 “그리스도와 그의 열두 제자”를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쐐기문자야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을 터이고 멀리서 부조를 보면 그렇게 보일만도 합니다. 하지만 이 베시툰 산 부조의 비밀은 19세기 영국의 장교이자 언어학자였던 롤린슨(H. C. Rawlinson)에 의해 풀렸습니다. 우선 그는 쐐기문자로 새겨진 글을 그곳 양치기의 도움을 받아 4년에 걸쳐 베꼈습니다. 지상에서 120m 높이의 절벽에 새겨진 글이라 그것을 베끼기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틈틈이 탁본을 만들어 마침내 전체를 베껴냈습니다. 그 뒤 무려 십년에 걸쳐 그 문자를 해독하는 작업에 매달려 1850년 드디어 그 내용을 판독해냈습니다. 그것은 고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그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새긴 ‘베히스툰 석비’였습니다.

이 석비의 판독으로, 무려 1700년 이상 베일에 싸여 있던 고대 수메르,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롤린슨보다 40년 먼저 쐐기문자 판독에 성공한 사람은 독일의 그로테펜트(G. F. Grotefend)라고 합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는데 당시 유럽의 탐험가들에 의해 알려진 쐐기문자를 온갖 노력 끝에 해독해냈습니다. 한데도 사람들은 그의 판독 성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교수도 아닌 고교 교사가 쐐기문자를 읽어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나 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그로테펜트는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결정적 열쇠를 제공한 사람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고대 수메르,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는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가령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 길가메시 서사시 따위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거고 그저 성경과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말하는 고대 근동의 역사를 아는 정도에 그쳤겠지요. 실제로 쐐기문자가 판독되기 전까지 그것을 ‘문자’라고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대의 장식 무늬가 아닐까 하고 막연히 추측하였을 뿐입니다. 무수한 쐐기문자로 적힌 토판이나 석비가 도처에서 발견되었음에도 오랜 세월 그것이 글인 줄도 몰랐습니다. 한 마디로 눈뜬 봉사였던 셈입니다.


창이 열리다

 애벌레들은 자신이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할 겁니다. 눈앞의 수풀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고 풀잎을 갉아먹으며 세월을 보냅니다. 간간이 주변에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볼 테지만 그들은 자신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곤충이라 여기지 않을까요? 눈이 있어도 자신이 누구이며 장차 어찌될 것인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눈감은 채 금전에 눈멀어 세속에 갇힌 삶은 이와 같습니다. “눈을 떠야 별을 보지”라는 북한 속담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데 그 상태로 어떻게 별이 보이겠습니까? 별을 보기는커녕 그런 꿈조차 꾸기 힘들 것입니다. 사실 별을 보려면 눈을 뜨기만 해도 안 되고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을 잘 관찰해야 별들이 영롱히 빛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스스로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냥 보이는 게 아닙니다. 눈이 감긴 상태로는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한 달 전 야간 운전을 하는데 갑자기 왼쪽 눈에서 굵은 검은 줄이 두어 차례 지나갔습니다. 그런 다음 왼쪽 눈이 뿌연 먼지가 낀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까지 계속 그러기에 병원에 갔더니 안구 안쪽 정맥 혈관이 터졌답니다. 천만다행으로 수술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책도 읽기 힘들고 글쓰기도 고역이었습니다. 한쪽 눈만 어두워도 이토록 생활이 불편한데 양쪽 눈 모두를 보지 못하는 맹인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건강한 두 눈을 갖고 사는 것이 큰 복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곧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넘는 군중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적도 일으키신 적 있는데 그것은 ‘칠병몇어’ 사건입니다. 보리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굶주린 사천 명을 먹이셨기에 ‘칠병몇어’ 사건이라 합니다. 이 이적 이후에 제자들은 남은 빵 조각을 일곱 바구니나 거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과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갈 때 그들은 모아둔 빵 가져오는 것을 깜박해 배 안에 빵이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배를 타고 가는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빵이 없음을 두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은 이 모습을 보시고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막 8:14-18)며 매우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오병이어, 칠병몇어를 체험하고도 빵 없음을 걱정하는 제자들을 나무라신 것입니다. 사실 빵이 없는 게 아니라 빵 한 개가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 빵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이 계시는데 더 이상 무슨 걱정이 필요합니까? 제자들은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히 배부를 수 있음을 두 번이나 경험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그새 그것을 망각한 나머지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는 꾸중을 들어야 했습니다. 눈이 가려져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아직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 바로 다음에 예수님은 벳새다로 가셔서 한 눈먼 맹인의 눈을 손을 대어 고치십니다. 그는 예수님이 손을 두 차례 눈에 얹자 차츰 시력을 회복하여 뚜렷이 보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보지 못한다고 호된 책망을 받지만, 벳새다의 맹인은 오히려 눈이 열려 밝히 보는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막 8:22-26). 본다고 다 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주님이 눈을 열어 주셔야 우리는 비로소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는데 아무리 주께서 심오한 계시를 주신다고 한들 그게 눈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눈을 뜨라

 어느 날 예수님은 일흔 명의 제자를 둘씩 짝지어 여러 지역의 마을에 파송하셨습니다. 각 가정마다 평화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전도 여행을 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떠나기 전 자신들이 과연 잘해낼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껏 예수님과 함께 다녔는데 이제는 두 명씩 모두 흩어져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셨고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갖고 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돈도, 식량도, 여분의 신발이나 옷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일 외에 그들이 기대만한 그 어떤 밑천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데 그들의 전도 여행은 놀랍게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큰 기쁨에 들떠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이름을 대면 귀신들이 두려워 속속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신바람이 났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귀신 축출 같은 사역보다 더욱 크게 기뻐할 일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가 된 사실에 있음을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주님께서 “너는 세상에서 무엇을 하였느냐?”고 캐물으시겠습니까? 그보다는 우리가 그분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먼저 보실 것입니다. 아무리 거창하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어도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말짱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선교 보고를 받으시고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그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여기서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 그리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은 그 당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 같이 소위 배울 만큼 배웠다는 자들일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무지렁인 예수님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 잘나고 똑똑하다는 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눈멀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고전 1:27)고 합니다. 또한 “이 세상의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고전 2:8)라고 하였습니다. 소위 본다는 자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눈 어두워 보지 못하였고 ‘철부지 어린 아이’ 같은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팔복 같은 복도 선포하셨지만, 이처럼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눈도 큰 복이라고 여기십니다. 제 아무리 많은 지식을 가진 자라도 예수님이 구원의 빛이자 세상의 소망임을 몰라보는 허다합니다. 그들의 지식이 오히려 눈을 가려서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의 눈먼 거지 바디매오는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에게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눅 18:42)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주님의 권능의 손길을 만나면 바디매오처럼 오랜 세월 감겼던 영안이 환히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신비한 복을 받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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