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10/1(목)
말문 트인 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들은 그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다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트집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의회에서 나가게 한 뒤에, 서로 의논하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소문이 사람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게,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합시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이 모두 그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므로,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할 방도가 없어서, 다시 위협만 하고서 놓아 보냈다. <행 4:13-21>



담대한 신앙인

인권 변호사로 널리 알려진 한승헌 변호사가 수년 전 모 일간지에 회고록을 연재한 적 있습니다. 그는 동백림 간첩단사건, 민청학련 사건, 통혁당 사건,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들을 도맡아온 팔순의 원로 법조인입니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본인이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20여 개월 구속되기도 하였습니다. 한 변호사는 30대 초반 약 5년간 서울지검 검사를 하다가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고 변호사를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1970년대 초반이라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붙잡혀 고초를 당하는 시국사범들이 계속 생겨났습니다. 한 변호사는 그들이 변호사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그 ‘차마 정신’으로 변호를 시작했답니다. 1974년 1월 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하였습니다. ‘긴급조치’는 유신헌법에 따른 대통령 권한으로써 “헌법상 보장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특별조치”를 말합니다. 긴급조치 1호는 그 위반자를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이 가능하고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의 비판을 봉쇄하고 언론의 자유를 막는 폭거였습니다.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된 지 불과 이틀 만에 이해학, 이규상 등 6명의 목회자들이 시국선언에 나섰습니다. 그들은 즉시 구속되어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한 변호사는 이들의 변론을 맡았는데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관인 현역 소령이 피고들에게 이렇게 호통하더랍니다. “왜 목사 전도사들이 하나님 믿으라는 전도는 안하고 정치 문제에 간섭해서 혼란을 일으키는가?” 그러자 피고 측에선 조금도 굽힘없이 “어찌하여 군인들이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망각하고 여기 와서 재판을 한다고 앉아 있는가?”라고 강펀치로 맞받아쳤습니다.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는 가족 외에는 누구도 방청이 엄금되었고 총을 찬 헌병들이 경계를 서 살 풍경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피고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그리스도의 진리에 입각해 신앙적 결단으로” 이 같이 행동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한 변호사는 이를 뒷받침하는 변론서를 작성하려면 자신도 성서와 기독교를 알아야겠다 싶어 성서와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찾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맘 편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사서 고생하는 것이 믿음의 신앙”이라 말합니다. “사서 고생하는 행함이 있는 신앙이 살아날 때 한국교회도 살아날 것”이라고도 일갈합니다. 이처럼 한 변호사는 유신독재 시절 하나님의 정의와 그리스도의 진리를 온몸으로 증언한 기독인들의 신앙실천에 감동하여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피고로 법정에 서서 한 변호사의 조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한 변호사야말로 피고들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셈입니다.


무엇이 옳은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한 지체 장애인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치는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보고 많은 사람이 솔로몬 행각에 몰려들자, 두 사도는 그들에게 예수가 바로 오리라던 그 예언자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여 남자 어른만 5천 명이나 되는 결신자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한 지 불과 얼마 안지나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유대 집권자들은 경악했습니다.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던 도중에 그들을 긴급 체포하였습니다. 그만큼 유대 집권자들이 사태를 매우 위중하다 판단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 집권자들이 두 사도를 체포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그들이 백성을 가르쳤다는 것, 둘째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자의 부활을 선전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율법학자나 성전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토라를 가르칠 만큼의 공인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다른 곳도 아닌 성전 동쪽 솔로몬 행각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니 묵과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더욱이 두 사도는 예수의 제자들로서 예수의 부활을 가르쳤기에 유대 집권자들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장애인을 고친 시각은 오후 세시였습니다. 그리고 두 사도가 체포당한 건 ‘날이 저물었을 무렵’입니다. 이로써 솔로몬 행각의 전도 집회가 약 3-4시간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 행각은 성전을 방문한 순례자들이 주로 쉬거나 토론하던 장소였습니다. 요한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의 성전 봉헌 절기인 수전절에 이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적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한때 스승이 백성들을 가르치던 솔로몬 행각에서 즉흥적 대중 집회를 열어 예수님보다 더 놀라운 전도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요 14:12)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실제로 그 말씀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그들을 체포한 사람들이 주로 사두개파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논쟁 상대는 바리새파였습니다. 반면 베드로와 요한은 바리새파보다는 사두개파와 정면충돌합니다. 바리새파는 부활의 신앙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님을 믿진 않았으나 죽음 이후 부활이 있다는 건 믿었습니다. 하지만 사두개파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제국과 유착하여 유대 집권층을 형성할 만큼 융통성이 많았으나 종교적으론 매우 보수적이었습니다. 오로지 오경인 토라만을 중시하였지 더 이상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완고한 태도를 견지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두개파와 부딪힌 까닭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절 이후인데다 무엇보다 장소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사두개파의 아성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여기서 두 사도가 예수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신앙을 선포하였으니 사두개파의 격분은 충분히 예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이튿날 두 사도는 산헤드린 공의회에 불려가 신문받았습니다. 이 자리엔 예수님을 체포해 신문한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참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한밤중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 안뜰에서 진행된 예수님에 대한 신문을 멀찍이서 모닥불을 쬐며 지켜본 적 있습니다. 그때 문지기 하녀와 대제사장의 종 및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당신도 그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지요?”라고 거듭 물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잔뜩 겁에 질려 “아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며 극구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만 그런 게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의 제자였음을 숨긴 채 다락방에 숨어 지내거나 고향에 돌아가 옛날처럼 고기잡이를 하였습니다. 이처럼 겁이 많고 소심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강림 사건 이후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딴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만 해도 산헤드린 공의회가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느냐?”고 묻자 조금도 주눅 든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외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에 힘입은 것”이라며 그의 부활과 그리스도이심을 거침없이 증언합니다. 유대 집권자들이 70여 명이나 모여 앉아 신문하던 자리를 전도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는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산헤드린 의회는 두 사도에게 “앞으론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냐”고 따져 묻습니다. 여기에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산헤드린이 아무리 유대 최고 의회이다 할지라도 그 권위로 하나님 위에 군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진실의 소리

“사상, 양심, 종교, 언론, 집회, 출판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건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자유로운 비판이나 의혹제기조차 ‘명예훼손’이란 구시대적 법규를 구실로 봉쇄하려 듭니다. 방송 삼사와 종편방송, 그리고 일간지 구독률 80% 이상을 차지하는 조중동은 연일 왜곡된 정보들로 대중의 눈과 귀를 막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조중동의 구독률은 해마다 대폭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2002년만 해도 유료 독자가 481만부에 달했으나 작년조사에 의하면 281만부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11년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을 조사하니 ‘없다’가 무려 31.9%에 달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만큼 진실의 소리를 듣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종교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 신앙양심에 기초한 진리를 전해야 하는데 종교계도 온갖 추문으로 얼룩져 대중에게 크게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게바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고자 ‘베드로’라는 칭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될 때까지 반석 같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고 직접 보고 들은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기는커녕 입을 다물고 숨어 지냈습니다. 이런 겁쟁이 베드로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한 다음에는 그 어떤 세속의 권력 앞에서도 담대히 예수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위대한 사도로 변신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눅 19:40)고 하셨는데 베드로는 그 이름대로 소리 지르는 돌이 되었습니다. 사실 복음의 진리는 그 어떤 권세조차 두려워할 만큼 강력합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그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지 않기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고 시시해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더 깊숙이 뿌리내림으로써 참 자유를 맛보며 진실의 소리를 담대히 외치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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