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8/18(화)
그 빛에 이끌려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인자 밖에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온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요 3:13-21>



밤중의 대화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탁월한 상담가처럼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 베데스다 38년 된 병자, 선천성 맹인, 빌라도 등 여러 사람과 만나 단독으로 상담하십니다. 이처럼 두 사람이 주고받는 긴 대화들은 심오한 복음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한 사람을 만나 대화하시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누군가 만나 상담할 때 얼마나 대화에 집중해야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대화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마틴 부버는 그의 대표작『나와 너』에서 “참된 만남은 기적을 낳는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고귀한 인격적 존재로서 ‘나’와 ‘너’가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눌 때 거기에 참된 만남과 삶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오늘날 많은 만남은 ‘나와 너’의 진정한 만남이 아니라 ‘나와 그것’의 왜곡된 만남이라고 부버는 지적합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이란 상대방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마치 사물이나 되듯 그저 이용 대상으로 대하는 만남을 의미합니다. 어떤 모임에 나가 악수할 때 보면 눈조차 안 마주친 채 형식적으로 악수를 건네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선거 앞두고 시민들 만나 악수하는 거와 비슷한 경우인데 그런 악수를 하고나면 몹시 불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기계적으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누구를 만나든 한 번도 그렇게 사람을 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화 도중 진리의 불꽃이 일고 큰 깨달음과 회개, 마음의 상쾌한 변화를 맛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내담자는 유대 지도자 니고데모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자 유대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의원(요 7:48, 50)이었고 재력가였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이 율법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체포하려 시도하자 예수님을 변호하며 제동을 걸었고, 예수님 장례 때에는 값비싼 장의 물품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근심하며 돌아간 부자 청년과 같이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의 비밀 제자처럼 주님의 편에 섰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지위와 소유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진 못하였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처음 찾아온 시기는 유월절을 맞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무실 무렵입니다. 공관복음의 예수님은 생애 막바지에 이르러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단 한 차례 방문하십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공생애 초반에 이미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표징을 행하셨다고 전해줍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표징을 보고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 여겨 한밤중에 찾아와 조용히 만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표징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한계를 잘 아셨기에 “자신의 몸을 맡기지 않으셨다”(요 2:24)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표징’은 이적을 가리키는데, 많은 사람은 그 이적에만 주목하였지 그 이적이 가리키는 표징으로서의 의미를 잘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오병이어 이적을 보고 그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요 6:26)고 책망하신 적도 있습니다.


하강과 상승

니고데모는 단순히 기이한 이적에만 눈 먼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라 부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하늘의 귀한 가르침을 얻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 지도자이자 바리새파 출신 랍비였으나 영적으로 몹시 혼란스럽고 허기진 상태였음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은 사람이라도 허방이 있게 마련입니다. ‘윤똑똑이’ ‘헛똑똑이’이란 말들이 그냥 나온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자신들만이 최고인 줄 알던 유대 지도자들이고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학식에 눈멀어 하나님의 외아들을 살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에 비해 니고데모는 그런 부류들 가운데서 상당히 예외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예수님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한밤중 은밀하나마 예수님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자 합니다. 이는 그 시대 정황으로선 파격에 속합니다. 유대 예루살렘 산헤드린 의원이 나사렛 출신의 예언자를 찾아가 그를 ‘랍비’라 부르며 만났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뒤흔드는 발언으로 거침없이 그를 공략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요 3:11) 니고데모가 무던한 사람이기에 망정이지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런 말을 들으면 발끈하여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살펴보면 동문서답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니까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니고데모가 늙수그레한 나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남’에서 ‘거듭’에 해당한 헬라어 단어는 ‘아노덴’인데 이 말은 ‘거듭’ 혹은 ‘위로부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두 가지 중에 ‘거듭 태어남’이란 의미, 그것도 문자적 의미로만 알아듣고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없지 않느냐?”는 반문을 하였습니다. 유대 최고의 학식을 자랑하는 랍비의 질문치고 너무 유치한 건 사실입니다. 이러니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런 것도 알지 못하느냐?”는 예수님의 질책이 나올 만도 합니다. 예수님은 알쏭달쏭해 하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하시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최근 수도권 어느 대형교회 담임 목사가 이 구절을 이상하게 해석하여 이단시비에 휘말려 시끄럽습니다. “십자가 상에 달리신 예수님은 놋뱀을 상징, 놋뱀이 예수님을 상징한다”며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뱀 곧 사탄이고 실제 예수님은 죽지 않았다고 설교한 것입니다. 이는 초기교회 시대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 일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건 착시에 불과하고 사실은 구레네 시몬이 죽은 거라고 주장했습니다. 더욱이 놋뱀을 예수를 상징한다고 하고서 그 뱀을 곧 사탄이라 하니 황당무계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든 뱀”은 불 뱀에 물려 고통당하며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고자 주님의 명령으로 만든 ‘놋뱀(구리뱀)’입니다. 주님은 이 놋뱀을 기둥에 달아 세우게 하신 뒤 불 뱀에 물렸지만 그걸 쳐다보는 사람은 다 살게 해주셨습니다(민 21:4-9). 뱀이라면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뱀을 떠올리며 곧장 사탄으로 연결시키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에덴동산의 뱀조차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라고는 직접 언급되지 않았고 예수님의 경우 “뱀 같이 지혜로워라”(마 10:16)라는 교훈으로 뱀을 긍정적으로 말씀하신 적 있음을 유념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세의 놋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시에 해당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와 같이 십자가에 들어 올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일러 주신 말씀입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이자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음에서 부활로 일으킴 받으셨고 마침내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들어 올려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빛으로 가자

니고데모는 어렴풋이나마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알아차리고 그 빛으로 나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밤중에 찾아왔으나 어느덧 그 어두움은 사라져 버립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전까지 니고데모는 유대 지도자, 산헤드린 의원, 랍비 따위의 허울은 입었지만 그 안에는 어둠과 의혹, 혼돈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그가 지녔던 지난날 의문들과 그를 괴롭혔던 어두움을 한 꺼풀씩 걷어내는 수술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요한복음의 위대한 선언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6)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생의 어둠과 절망 가운데 헤매는 자들을 다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비추십니다(요 1:9). 그리고 그 빛을 알아보는 사람,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그분의 충만함에서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으며, “은혜와 진리”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요 1:17). 이 생명의 빛에 이끌려 주님께 나아가며 그 가 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가득 받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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