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5/8/18(화)
흰빛의 영광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베드로는 모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질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명하시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가복음 9:2-9>


신비의 불꽃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겸 물리학자,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지병으로 불과 마흔 살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주사기를 발명하였고 유압 프레스를 고안해 냈으며 확률이론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생전에도 세계적인 천재 수학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파스칼이 죽자 그의 누이 질베르트가 염을 하고자 외투를 벗기다가 그 옷에서 ‘회상록’이라 적힌 양피지 한 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파스칼의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저녁 열 시 반쯤부터 열두시 반쯤 사이에, 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로다. 나의 하나님이요 여러분의 하나님이로다. 당신(예수)의 하나님은 또한 저의 하나님이로다. 하나님을 빼고는 세상만사를 죄다 잊으리. 오직 복음이 가르치는 길을 따라서만 님을 찾을 수 있으리라. 인간 영혼의 위대함이여,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저는 알아보았나이다. ...<하략>”

파스칼은 종교적 번민을 거듭하던 중, 이처럼 신비한 하나님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날의 감격스런 체험을 늘 가슴에 되새기고자 그는 양피지에 이 사실을 간략히 메모해 옷에 부착하고 다녔습니다. 이 은총의 체험 이후 잠시 수도원에 들어가기도 하였으며 별세할 때까지 기독교 작가로서 복음 전파를 위한 저술활동에 힘썼습니다. 대표적 기독교 비판가로 알려진 철학자 니체는 파스칼의 전향이 몹시 아쉬웠나 봅니다. 그는 기독교가 “비천하고 무력하고 약질적인 모든 것의 편을 들어왔고” “심지어 강한 이지적 본성을 가진 자들의 이성까지도 타락시켰다”며 그 “통탄할만한 예”가 바로 “파스칼을 타락시킨 일”이라고 말합니다. “파스칼은 자신의 이성이 기독교 때문에 타락했을 뿐인 데도 원죄 때문에 타락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반그리스도』, 5장). 물론 니체가 지적한 대로 경직된 교리에 대한 맹종은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이성적 비판 의식까지 마비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파스칼의 신비체험을 간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파스칼과 같은 하나님 체험은 사도 바울, 조지 폭스, 이현필, 유영모 선생 등 여러 기독교 영성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형언하기 힘든 신비한 빛이 자신에게 비춰 압도하였다고 말합니다. 지금부터 약 20년 전 개신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을 방문해 김금남 원장과 만난 적 있습니다. 그때 김 원장은 스승 이현필 선생의 신비체험을 잠깐 들려주셨습니다. 선생은 한겨울임에도 무등산 서석대에 올라 밤새 기도하고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가 돌아올 때면 수염에 고드름이 맺혀 있곤 하였대요. 그저 바라만 봐도 매서운 추위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선생은 “하나도 춥지 않았다”며 되레 “어젯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말씀을 하셨답니다. 또한 “저 빛을 보아라. 너희는 저 빛이 보이지 않느냐?”며 성령의 빛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해 안타까워하신 적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시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생각이 변화하게 됩니다. 주님의 빛이 비추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어둠 속에서 계속 허둥대며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흰빛 속으로

 가이사랴 빌립보의 여러 마을를 다니시던 도중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 대답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혹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한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신호탄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어떠한 수난을 겪게 될 것인지를 예고하십니다. 제자들로서는 뜨악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큰 기대를 안고 지금껏 고생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녔건만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잠겨 선뜻 발을 떼지 못하고 주저할 때 예수님은 앞장서서 걸어가심으로써 뒤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다음 처음으로 자신의 수난과 부활사건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첫 번째 예고가 있은 지 “엿새 뒤에”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그 “높은 산”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통 다볼산(588m), 또는 헐몬산(2826m)으로 막연히 추정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왜 다른 제자들은 다 놔두고 유독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을까요? 이 거룩한 산에서 보일 영광스런 변모체험에 대해 일정기간 함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뜩이나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앞둔 상태였고 말 많은 제자들 중 어느 누군가가 발설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일이 크게 어그러져 변화산의 영광스런 체험을 차라리 보여주지 않느니만 못하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막 14:33). 이것을 볼 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가장 신뢰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변화산에 올라 세 제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영광과 권능의 변모를 하십니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옷이 새하얗게 변화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는 평행본문에서 예수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마 17:2)고 하였고 누가도 “그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빛이 났다”(눅 9:29)고 보도합니다.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의 얼굴까지 변모하였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니엘서는 천상의 옥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묘사한 환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바라보니, 옥좌들이 놓이고, 한 옥좌에 옛적부터 계신 분이 앉으셨는데, 옷은 눈과 같이 희고, 머리카락은 양 털과 같이 깨끗하였다.”(단 7:9a) 인자는 하나님의 옥좌에 나아가 주님께 권세, 영광, 나라를 받습니다. 다니엘서의 이런 환상처럼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놀랍게 변모하셨고 하나님에게서 하늘의 영광과 권능을 부여받으십니다.

모세도 자기 부관인 여호수아를 데리고 하나님의 산 곧 호렙산에서 사십 일을 보낸 적 있습니다. 그가 두 번째 십계명 돌 판을 손에 들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다”(출 34:29)고 했습니다. 그 빛 때문에 사람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주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백성들에게 전한 뒤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랐을 때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뒤덮었고” 주님은 이렛날에야 모세를 구름 가운데서 부르십니다(출 24:16). “아론, 나답, 아비후”가 모세와 더불어 산에 올랐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출 24:1, 9). 이러한 내용들에 비추어 예수님의 변화산 변모체험이 모세의 시내 산 체험과 많이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예수님의 그림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예언자”라고 여러 차례 언급합니다. 따라서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주님의 변모체험을 예비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이후,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을 주고받았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세 분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만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이야기하셨다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났다”는 표현이 좀 어색해 보입니다. 엘리야는 모세보다 수백 년 뒤 활동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엘리야를 앞세운 까닭은 예수님의 선구였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의 빛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는 이 황홀한 광경에 넋을 잃다시피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에 세 분을 위한 초막 셋을 짓고 모시겠다”고 주님께 말합니다. 그가 굳이 초막을 짓겠다고 말한 까닭은 초막절을 염두에 둔 발언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집 근처에 초막을 세우고 거기서 임시 거주하며 조상들의 광야생활 체험을 합니다. 그런 체험처럼 변화산 사건의 추억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초막을 제안했을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예언자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들에 속합니다. 그런 분들이 나타나 예수님과 대담하였으니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 충격이 매우 컸을 것입니다. 곧이어 그들은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구름이 일어나 그들을 뒤덮더니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에도 비슷한 소리가 났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해 숨지셨을 때에도 한 백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막 15:39)고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그의 공생애 초반, 중반, 종반에 세 차례나 계속 강조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후 3:17) 또한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눈과 마음을 가리는 너울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복음의 광채를 바라보면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되고 더 큰 하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드실 때 가장 먼저 “빛이 생겨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빛이 우선입니다. 그 빛이 비춰져야 우리가 어둠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우리 내면이 진리의 빛 곧 복음의 광채로 빛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혼돈과 공허, 흑암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그라진 주님의 빛을 회복하고 내면에 그 등불을 잘 간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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