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11/6(목)
주님, 일어나소서.  

주님,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그리도 멀리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에 숨어 계십니까? 악인이 으스대며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악인은 스스로 쳐 놓은 올가미에 스스로 걸려 들게 해주십시오. 악한 자는 자기 야심을 자랑하고, 탐욕을 부리는 자는 주님을 모독하고 멸시합니다. 악인은 그 얼굴도 뻔뻔스럽게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이란 늘 이러합니다. 그런데도 악인이 하는 일은 언제나 잘 되고, 주님의 심판은 너무 멀어서 그들에게 보이지 않으니, 악인은 오히려 그의 대적을 보고 코웃음만 칩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내가 망하는가, 두고 봐라. 나에게는 언제라도 불행과 저주란 없다” 하고 말합니다. 그들의 입은 기만과 폭언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혀 밑에는 욕설과 악담이 가득합니다. 그들은 으슥한 길목에 숨어 있다가 은밀한 곳에서 순진한 사람을 쳐죽입니다. 그들의 두 눈은 언제나 가련한 사람을 노립니다. 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처럼, 은밀한 곳에서 기다리다가, 때만 만나면, 연약한 사람을 그물로 덮여서 끌고갑니다.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을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집니다. 악인은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하나님은 모든 것에 관심이 없으며, 얼굴도 돌렸으니, 영원히 보지 않으실 것이다” 합니다. 주님, 일어나십시오. 하나님, 손을 들어 악인을 벌하여 주십시오. 고난받는 사람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마음 속으로 “하나님은 벌을 주지 않는다” 하고 말하게 내버려 두십니까? 주님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포악함과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 악하고 못된 자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 그 악함을 샅샅이 살펴 벌하여 주십시오. <시편 10:1-15>



비극의 터널에서

 지난 5월 5일 어린이날, 세월호 유족 박종대씨가 안산 화랑 유원지에 차려진 합동분향소에서 아들 수현군의 영정을 빼버렸습니다. 박수현군(단원고 2년)은 세월호 침몰 도중 선실에서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약 15분간의 동영상을 남긴 학생입니다. 해경의 영상에서 의자 같은 집기로 창을 깨고자 몸부림치던 방이 바로 그가 머물던 곳이랍니다. 해경 고무보트가 바로 근처에 왔지만 배에서 탈출하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사이 안타깝게도 그 방은 바닷물에 잠기고 맙니다. 박종대씨는 “깨끗한 영혼을 혼탁하고 쇼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에 두고 국가적 희생물로 삼고 싶지 않다”며 분향소에서 아들 영정을 빼냈다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추모보다는 진상규명을 더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8일 어버이날 세월호 유족 100여명은 왜곡보도를 일삼는 KBS 본사를 항의방문 하느라 길바닥에서 날밤을 지새웠습니다. KBS 사장과 본부장은 끝내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유족들은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청와대 근처까지 갔으나 무수한 경찰 벽에 갇혀 오후 2시 넘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유족 중 어떤 분은 “우리가 다 잘못했으니 길을 좀 터 달라.”며 경찰에게 빌기까지 했답니다. 다른 분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니까 그분은 “우리가 잘못해 자식을 잃었기에 여기 있고 경찰 분들은 잘못이 없기에 서 있는 거 아니겠냐?”는 말씀을 하였다는 군요. 도대체 이 비극의 끝은 언제일까 모르겠습니다. 자식 잃은 슬픔만도 추스르기 힘든 분들에게 왜 이리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물론 ‘세월호 참사’만 비극은 아닙니다. 지금 이 나라는 침몰해 가는 거대한 세월호나 마찬가지입니다. 산재 사망자만 해도 인구 10만 명당 18명에 달해 국제노동기구(ILO) 통계 기준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2165명, 2013년에는 1929명이 산재로 사망하였습니다. 매일 5.3명씩 산재로 죽는 상황입니다. 가령 지난 2월초에는 울산의 한 자동차 부품업체에서 야간작업을 하던 한 실습 고교생이 폭설로 지붕이 무너져 사망한 일도 있습니다. 재작년 12월에는 순천효산고 실습생이 울산항만공사 현장에서 일하다 작업선이 전복되어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밀양 송전탑 공사, 쌍용차, 강정 해군기지 건설 등 무수한 비극들이 도처에서 진행 중입니다. 비극의 희생자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입니다. 자본의 이득을 더욱 많이 챙기고자 사람을 생각지 않는 기업주들, 부패한 관료, 정치인들, 언론 따위가 서민을 희생양 삼아 사회적 불행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산상설교를 패러디한 ‘슬퍼하는 자’라는 시에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슬픔을 영속화하는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슬픔을 당한 사람들은 실제로 계속 슬픔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비극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위로와 희망을 얻어 함께 복되게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왜 침묵하십니까?

시편의 많은 시들은 주님께 불의한 세상 현실을 고발하며 간절히 도움을 호소합니다. 시인들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며 겸손히 회개의 기도를 올리기도 하지만 주님께 거칠게 항의하는 내용의 탄원기도를 드릴 때도 적지 않습니다. 대개 악인들이 번성하고 의인들은 고통에 울부짖고 있는데 왜 가만히 보고 계시느냐는 불평과 항변입니다. 시편 10편도 그런 탄원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본래 9편과 연결된 하나의 시였습니다. 각 연마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에 맞춰 쓴 시(답관체踏冠體 acrostic 형식)라, 두 시편이 서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9편과 10편을 비교해 보면 내용이 사뭇 다릅니다. 시인은 9편에서 주님의 위업을 찬송하는 데 집중합니다. 주님이 그의 원수를 다 물리치고 권리와 이익을 찾아 주셨다며 환란 날에 피난처와 큰 도움이 되신 주님을 찬송합니다. 정의의 심판자이신 주님이 어좌에 앉아 심판하시기에 악인들은 망하여 사라지고 억눌린 가련한 자들은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시인은 악인들과 민족들을 주님의 심판 대상으로  꼽습니다. 시인 자신은 가련한 자, 가난한 자, 학대받는 자와 동일시됩니다. 만물의 통치자 하나님은 어좌에 앉아 계시고 한쪽에는 악인들이, 반대편에는 의인들이 있어 변론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10편에 들어와 갑자기 분위기가 크게 바뀝니다. 줄곧 극히 경건한 어조로 주님의 위업과 영광을 찬미하던 시인이 10편에서는 주님께 “어찌하여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숨어 계십니까?”라고 서두에서부터 대뜸 따져 묻습니다. 악인들이 가련한 자들을 억압하고 주님을 조롱하며 승승장구하는 동안 주님은 너무 멀게만 느껴질 정도 가만 놔두셨습니다. 의인들은 고난 가운데 폭력에 시달리며 울부짖는데 하나님은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시편의 시인들은 대부분 강한 응보론적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의인은 복을 내리시고 악인은 벌을 내려 망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부터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시 1:6)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시편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반에서 널리 찾아볼 수 있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악인의 집에는 저주를 내리시지만 의인의 집에는 복을 내리시는 분(잠 3:33)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이었습니다. 이 같은 응보의 원리가 정상 작동하는 사회라면 힘없는 서민들이라도 크게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선하고 바르게 열심히 산만큼 주님께서 갚아주실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불의한 세상 현실은 기대와 전혀 딴판일 때가 많았습니다. 악인들은 “벌주는 이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며 뻔뻔하게도 악행을 일삼는데도 주님은 그들을 징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셨습니다. 코헬렛도 응보론적 전통신앙과 어긋난 불의한 현실을 냉정히 관찰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두 가지를 다 보았다. 의롭게 살다가 망하는 의인이 있고 악한 채로 오래 사는 악인도 있더라”(전 7:15) “악인이 받아야할 벌을 의인이 받고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다”(전 8:14) 코헬렛의 처방은 과유불급 곧 중용입니다. “너무 의롭게 살지도 말고, 너무 슬기롭게 살지도 말라. 왜 스스로를 망치려는가?” “너무 악하게 살지도 말고, 너무 어리석게 살지도 말라. 왜 제 명도 다 못 채우고 죽으려는가?”(전 7:16-17)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 어려워 잘 모르겠다. 그러니 중용을 지키며 사는 게 생활의 지혜이자 최선이 아니냐?”는 입장을 보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는 ‘무고한 자의 고난’을 설명하면서 전통적 보응론에 대해 하나의 역발상을 합니다. 그는 의인에게 불행한 고난이 왜 닥쳐선 안 되는 거냐고 묻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쓰라린 고난이 닥칠 때 반드시 의인과 악인을 가리진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인과 악인 틀에 매여 삶의 비극과 고난 문제를 이해하려다 보니 그 무차별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에게서도 비슷한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마 5:45) 하지만 가난하고 힘 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하나님 말고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주님께서 내 원수를 갚아달라고, 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울부짖으면 하나님께서는 끝내 모른 체 하진 않으십니다. 억울한 자들의 울부짖음이야말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출발점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왜 일어났습니까?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 압제에 신음하며 주님께 살려달라고 울부짖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할 필요도 없고 억울함을 하소연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는 세상(암 5:24)이 되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시 113:7)입니다. 이런 주님께 “일어나 악인들을 벌하시고 재난과 재앙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봐 주시라”고 간구하는 건 극히 당연하고 꼭 필요한 일입니다. 시인은 “주님, 일어나십시오.”(시 9:26, 10:12)라고 거듭 간청합니다. 사실 이 문구는 본래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갈 때 쓰던 구호였습니다. 주님께서 일어나 밀려드는 적군들과 싸워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일어나 우리를 도우셔야 하겠지만, 우리 자신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깨어 일어나야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는 끔찍한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지금의 불의한 체제를 변화시켜나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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