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9/3(수)
부활하는 삶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사역이 끝난 뒤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서, 온 유대 지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지만, 하나님게서 그를 사흗날에 살리시고, 나타나 보이게 해주셨습니다. 그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여 주신 증인인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와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아 있는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의 심판자로 정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하기를,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34-43>



부활신앙의 출발

엊그제 지역의 한 기자가 “진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사고로 뒤숭숭한데 여수의 부활절연합예배 행사가 어떻게 진행되느냐”고 물어왔습니다. “나야 뭐 여수시교회연합회 임원도 아니고 참여도 안하기에 잘 모르니 연합회에 직접 알아보는 게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일각에서 부활절을 몇 주 늦추자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렇게 되진 않을 거라며 그보다는 내용과 형식을 좀 달리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소견도 덧붙였습니다. 사실 부활절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탄절보다 더 먼저 생겨난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키는 그리스도교 최대 절기에 해당합니다. 교회력으로는 부활주일을 시작으로 성령강림주일이 되기까지 장장 50일 동안을 부활의 절기로 지킵니다. 반면 성탄절은 교회가 4세기 이후부터 지키기 시작한 절기이고 대림절 기간을 빼면 그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절기는 무엇보다 부활절입니다. 이 날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절기이므로 큰 기쁨과 감격의 축제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로 무려 300여명의 사망 · 실종자가 발생한 참담한 상황이라 부활절이라고 주님의 부활하심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그는 산상설교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선언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마 5:4)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과 장애, 사망의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찾아가 위로하시고 고치시며 살려내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가르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뜻밖의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나눠야하는 건 당연합니다.

부활절과 재난구호가 썩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먼저 떨쳐버려야 합니다. 부활절을 단지 교회들만의 연례 잔치행사쯤으로 여기기에 이 같은 편견이 생겨난 것입니다. 애초 부활이 대체 왜 필요한 것입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의인들의 억울한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대인 부활신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생생한 일화를 우리는 구약외경 마카베오2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전 2세기 중후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가 유대지역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헬레니즘으로 제국을 통일하고자 유대교를 악랄하게 탄압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어머니와 일곱 명의 아들이 체포되는데 안티오코스는 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에 그리한 것입니다. 일곱 형제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율법을 어기진 않겠다며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러자 안티오코스는 일곱 형제를 그들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한 명씩 머리 가죽을 벗기고 혀와 손발을 잘라내는 끔찍한 고문을 가하며 처형합니다. 이때 둘째가 숨지기 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는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2마카 7:9) 셋째도 죽기 전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2마카 7:14) 이처럼 부활신앙이란 본디 이생에서 천수를 누리며 평안히 살고 내생에서도 영생복락을 누리려는 욕심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만을 굳게 의지하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의인들을 주님께서 반드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는 믿음이 그 출발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세월호 침몰사고와 같은 비참한 우리 삶의 현실 가운데 오히려 한줄기 소망의 빛을 비춰 줍니다.


생명의 부활로

사도 베드로는 가이사랴의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욥바의 몇몇 형제들과 더불어 그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선뜻 내키지 않던 걸음이었습니다. 유대인인 그가 로마 백부장의 집을 방문한 사실이 알려지면 유대인 사회에서 매장당할 위험마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천사와 환상에 의해 주선된 만남이라 더 이상 거역 못하고 고넬료 집을 찾아갑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고넬료로부터 자초지정을 설명 받고야 크게 안도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구원을 베푸시기로 하셨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요청에 따라 설교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총 아홉 번 나옵니다. 그 중에서 고넬료 집에서 행한 설교는 이방인을 상대로 한 첫 번째 설교에 해당합니다.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복음의 핵심을 잘 요약합니다. 이전의 설교와 달리 그가 새롭게 전제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주신다는 것”,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이시다”(행 10:35-36)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에 따르면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음에도 사람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사흘 만에 살리시고 사도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이리하여 베드로는 자신을 비롯한 사도들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모두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나 뵈었을 때 생기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죽은 자들처럼 근심에 쌓여 지내던 자들이 얼마 후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문을 박차고 나와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부활이 절망 가운데 기죽어 지내던 사도들도 살려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요 11:25-26)고 말씀하십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이 성구를 인용하며 “생명 있는 삶을 살아야 생명 있는 부활이 가능하다”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이 별개가 아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요 5:29)고 하십니다. 모두가 부활은 합니다. 그러나 다 똑같은 부활을 하는 게 아니라,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무기)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 6:13) 이는 우리의 부활이 단지 육신의 죽음 이후에나 찾아오는 것이 아님을 깨우쳐줍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의 삶을 살아야 생명의 부활에 들어가게 됩니다.


산 사람답게

한 흑인 해방운동 지도자가 백인의 총칼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담대히 싸울 때 누군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대체 무얼 믿고 이렇게 용감한 행동을 합니까?” 이에 그 지도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적인 면에서 우리 운동은 실패할 것 같이 보이지만, 우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에 반드시 이 운동이 승리할 것임을 내다보고 있소” 이처럼 우리가 부활의 삶을 살면 세상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왜 자꾸 자신을 ‘불의의 연장’이 되도록 내어주는 것입니까? 그들 육신은 살아 있을지라도 그 영혼에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부활의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였습니다. 그는 늘 주님과 더불어 죽고 다시 사는 부활의 삶을 살았기에 이와 같이 말씀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가 죄임을 알면서도 사람다운 삶을 포기한 채 회개함 없이 불의의 연장처럼 살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함께 부활하였으므로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며”(골 3:1) 생명의 부활로 들어가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고자 늘 힘써야 합니다. 우리 삶의 부활이 없이는 부활의 신앙은 쓸데없는 껍데기가 되고 맙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부활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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