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9/3(수)
예수의 마음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빌 2:5-12>



마음이 병든 사람들

 서울에서 여성 노숙인 사역을 하는 한 선배 목사님이 기도해달라며 최근 겪고 있는 힘겨운 사정을 호소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세 들어 있던 임대 건물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어렵사리 비용을 마련해 약 한달 전에 쉼터를 다른 건물로 옮겼습니다. 새 보금자리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데 난데없이 주민들이 “다른 곳으로 가라” 집단행동에 돌입했다는 것입니다. 곧 현수막도 내걸겠다고 으름장도 놓았습니다. 이유인즉 ‘노숙인’이란 이름이 들어 있어 안 된다는 거였습니다. 목사님이 주민회의에 참석해 지역에 전혀 피해 가지 않음을 알리려 했으나 이야기도 못 꺼내게 등을 떠밀며 내쫓더랍니다. 쉼터에 찾아와 직접 살펴보라고 해도 주민들은 막무가내 반응을 보이고 있어 큰 곤경에 처해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내 사는 지역에 ‘노숙인 쉼터’는 절대 안 된다는 주민들의 이기주의로 전형적인 님비(Nimby)현상입니다. 노숙인들이 있으면 빈민가처럼 되어 집값이 떨어지고 우범지대가 될까봐 걱정하는 거겠지요. 여성 노숙인 쉼터에 기거하는 분들은 대부분 남편의 가정 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집을 나온 여성들입니다. 피해자인 그들의 마지막 기댈 공간에서마저 무작정 나가라고 내쫓는다면 이건 사회적 타살이자 무서운 범죄로 보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그분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황금에 눈 어두워 같이 못살겠다고 시끄럽게 군다는 건 참으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이렇게 무례한 행동들을 거침없이 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 마음이 썩고 병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한국은 환경오염도 심각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도 심히 병들고 오염되어 구제불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 나라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34개국 가운데 2003년 이래 9년 연속 자살율 1위라는 사실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자살자가 연간 14,000명에서 15,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끼 식사조차 제대로 챙겨 먹기 힘들던 6-70년대에 비해 지금의 경제사정은 비교하기 힘들만큼 좋아졌습니다. 높은 자살률을 경제적 빈곤만으로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오히려 각종 마음의 병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원인이 더 크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국내 초중고교생 25%가 적어도 한 가지 이상 정신병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8세 이상 성인의 10.2%(368만 명)도 매년 우울증, 강박증, 공황장애 같은 23가지의 정신질환 진단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보건복지부 2011년 자료). 더욱이 성인 정신질환자 수는 2006년에 비해 2011년에 23%나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통계를 보더라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옛말에 “모든 병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였습니다. 매일 마음이 울화가 치밀고 편치 않다면 무슨 밥맛이 있을 것이며 운동을 한들 어찌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현자 코헬렛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속썩이지만, 무슨 보람이 있단 말인가? 평생에 그가 하는 일이 괴로움과 슬픔뿐이고, 밤에도 그의 마음이 편히 쉬지 못하니, 이 수고 또한 헛된 일이다.”(전 2:22-23) 근래 ‘힐링’이란 말이 크게 유행한 까닭도 그만큼 속 썩이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반증입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아야 생기가 돌고 살아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근심 걱정이 많으니 급기야 뼛속까지 타들어가는 괴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잠 14:30; 17:22). 마음에 중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비우는 마음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 각별한 사이입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자주옷 장사 루디아의 개종을 시작으로 빌립보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의 첫째가는 도시로서 유럽의 관문에 해당합니다. 바울은 한밤중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고는 실라와 더불어 이곳에 건너가 전도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치안관들에게 붙잡혀 매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히는 억울한 고난도 겪었습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설립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바울이 안정적으로 선교에 전념할 수 있도록 후원금도 여러 차례 보냈고 에바브라디도 같은 동역자도 붙여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빌립보 교회처럼 물심양면으로 그를 열심히 도운 교회는 찾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일컬어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빌 4:1)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 ‘기쁨과 면류관’이라 칭송받는 이 빌립보 교회가 골치 아픈 내분을 겪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을 대적하며 그의 지시에 불순종하는 자들은 없어 보이나 교회 지도자들끼리는 서로 파벌이 나뉘어 다투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시기하고 다투면서”(빌 1:15)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두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서로가 주도권을 차지하겠다고 싸웠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고 다투면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어떤 사람은 좋은 뜻올 전합니다.....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빌 1:15, 18) 이처럼 바울은 ‘시기와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까지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에는 복음을 전한다면서도 자파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경쟁심과 허영’으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대로 방치하다간 고린도 교회처럼 사분오열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2장 서두에서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빌 2:2)라고 권고합니다. 자신이 남보다 더 낫다는 생각으로 시기와 다툼을 불러일으키며 교회를 자주 소란스럽게 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한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로 하여금 “한 마음 한 뜻을 품으라”라고 누누이 당부합니다(빌 1:27; 2:2; 4:2). 대체 어떤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참된 마음’ ‘겸손한 마음’인데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본문 6절부터 11절까지 기록한 말씀은 흔히 ‘그리스도 찬가’라 일컫는 초기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을 바울의 작품이라 보는 시각도 있고 초기 교회에 널리 알려진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느 견해가 더 타당한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찬가’를 여기에 적은 것은 빌립보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본받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습니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렙’ 또는 ‘레바브’입니다. 렙과 레바브는 구약성경에서 모두 ‘마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성경은 마음이란 단어를 거의 대부분 사람과 연관시켜 사용합니다. 특정 동물의 마음을 말한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성서 저자들이 사람만이 마음을 지닌 존재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성서가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였는지 드러납니다. 그런데 ‘마음’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레바브이든 헬라어 카르디아이든 문자적으로는 모두 ‘심장’ 부위에 해당합니다. 지금에야 마음과 심장을 분리해서 생각하지만 성서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을 곧 심장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자들은 마음이 심장이 아닌 ‘뇌의 작용’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마음을 심장으로 보든 아니면 뇌의 작용으로 보든 간에 성서의 저자들이 말한 마음은 심장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심장은 뇌와 같이 깨닫고 실천하는 기능의 부위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사도 바울의 권고는 예수의 심장을 가슴에 품고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셨습니까?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라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예수의 마음을 배우고 체화시키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운 사도 바울의 부단한 열망과 실천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열망합니다. 주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어서라도 기어코 하나님과 같아지려 합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녔지만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더 높아지고 남들을 지배하려는 자신의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스스로 겸손히 다른 사람의 종이 되심으로써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우주만물의 통치자이자 주님의 자리에 앉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구속하시고자 “십자가 위에서 죽기가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온갖 질병과 아픔을 겪으며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에 지쳐서 기운 빠져” 살아가는 무리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마 9:35-36). 우리가 가슴에 품고 본받아야할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욕심을 비우는 마음, 자신을 낮추며 섬기는 겸손의 마음, 고생스레 살아가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심장에 새기고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큰 은혜 아래 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번호제 목짧은댓글이름첨부작성일조회
636   살아있는 소망   바위솔   2014-04-27  1270
635   부활하는 삶   바위솔   2014-04-20  1175
634   예수의 마음   바위솔   2014-04-13  1224
633   이 뼈들이 살겠느냐?   바위솔   2014-04-06  1570
632   가서 눈을 씻으라   바위솔   2014-03-30  1600
631   풍랑 가운데서   바위솔   2014-03-23  1409
630   산 믿음을 위하여   바위솔   2014-03-16  1530
629   악마의 유혹   바위솔   2014-03-09  1700
628   자유의 언약   바위솔   2014-03-02  1346
627   담장 허물기   바위솔   2014-02-23  1524

 
처음 이전 다음       목록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