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5/8(목)
악마의 유혹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또다시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마 4:1-11>


광야의 시험장

예수님은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신 분의 첫 출발치고는 소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는” 가운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런 장면조차 없었다면 예수님은 그저 당시 세례 받으러 나온 수많은 사람에 섞여 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이 갈라지고 음성이 들려와 그나마 메시아다운 면모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는 음성이 들렸다지만, 사실 현장에 있던 사람들도 그것을 목격했는지 의문입니다. 아마 예수님 혼자만의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따랐겠지요.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뒤 “곧 성령이 그를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짤막히 보도할 뿐입니다. 광야에 며칠 간 머물렀는지, 금식은 하셨는지 안하셨는지, 또 사탄에게 무슨 시험을 받으셨다는 건지 전혀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태와 누가의 평행 본문은 마가와 달리 예수님이 광야에서 무슨 시험을 받으셨는지 알려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광야 시험 장면을 기록할 때 마가에게 없던 공통의 전승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태와 누가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내용이 거의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자신이 가고 싶어 가셨다기보다는 성령이 그를 광야로 내몰아 악마에게 시험받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하시고선 그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예수님을 악마가 출몰하는 메마른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초반부터 너무 세게 담금질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광야에서 “밤낮 사십일을 금식하셨다”고 합니다. 반면 누가는 ‘금식하셨다’고 하지 않고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았다”고 표현합니다. 약간 뉘앙스가 다릅니다. 금식은 어떤 종교적 목적을 위해 일정기간 곡기를 끊는 생활을 가리키므로 마태의 예수님이 좀 더 주도적으로 광야 시험을 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왕 받아야할 시험이라면 마지못해 끌려가듯 치를 게 아니라 이처럼 기꺼이 즐겁게 치르면 더 나을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께 밤낮 사십일 동안 금식하라 강요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하신 금식입니다. 금식은 우리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욕망의 불을 잠재우는 오랜 유용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공생애 초반에 광야에 나가 금식하심으로써 앞으로 닥칠 온갖 시험에 철저히 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 시험장이 왜 하필 ‘광야’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넙니다. 온 백성이 홍해를 건넌 뒤 광야에서 40년을 머물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과거 이스라엘 선조들의 경험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세례에 해당하고 40년 광야생활은 밤낮 40일 금식과 연결됩니다.


신의 아들이거든

악마는 밤낮 사십일 금식을 다 마쳤을 때 찾아왔습니다. ‘악마’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볼로스는 “앞길에 뭔가를 던지는 자”란 의미가 있습니다. 사탄은 “방해하는 자, 대항하는 자”를 가리키지만 악마는 우리 앞길에다 뭔가를 던짐으로써 우릴 테스트하고 유혹하는 존재입니다. 악마가 던지는 건 미끼일 수도 있고 진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걸려들었다 하면 헤어나기 힘든 유혹의 미끼나 장애물 또는 테스트일지도 모릅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금식으로 몹시 허기졌을 때 찾아왔습니다.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에 해당하는 ‘배고픔’을 가지고 초장에 올가미를 씌우려 하였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악마의 시험 중에서 어느 것보다 가장 우선하는 시험임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먹어야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식욕에서 초탈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악마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고 요구합니다.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은 민중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보라는 요구나 다름없습니다. 로마 식민치하에서 이중, 삼중 착취당하며 배고픔에 허덕이는 민중들을 구원하려면 ‘돌로 떡을 만드는 능력’ 정도는 보여야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신 바 있습니다. 하지만 돌로 빵을 만드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빵만’으론 안 된다고 보십니다. 빵과 아울러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사는 게 인간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요 6:27)고 가르치십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는 두 번째 시험을 합니다. 첫 번째 시험과 마찬가지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란 조건이 붙은 시험입니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번에는 악마가 성구를 인용하여 시험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악마조차 주님의 백성을 유혹하여 넘어뜨리고자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왔다고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 착각하면 안 됩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성경을 인용하는지 잘 살피고 성경 해석이 바른지 헤아리지 않으면 악마의 미끼에 대번 걸려들게 됩니다. 각종 이단 사이비가 성경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미혹합니까? 악마는 시편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에서 뛰어 내려 보아라, 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너를 상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놀라운 이적을 일으켜 민중의 인기를 단 번에 얻어 보아라는 요구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는데 천사가 보호로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면 대번 종교적 영웅이 되지 않겠습니까? 악마의 논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정도는 보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이는 광야의 시험 때 악마만 했던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실 무렵에도 대제사장들, 율법학자들, 장로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조롱하였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보다! 그가 이스라엘 왕이시니,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지!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을 터인데!”(마 27:42) 예수님의 동생들도 비슷한 유혹을 하였습니다. “형님은 여기에서 떠나 유대로 가셔서, 거기 에 있는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하십시오.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숨어서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형님이 이런 일을 하는 바에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 7:3-4) 이처럼 예수님은 경이로운 이적을 행하여 헛된 자신의 영광을 구하라는 사람들의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한갓 자신의 세속적 명예를 구하고자 억지스런 이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만을 섬겨라

 악마는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시험 장소의 변화에 주목해 보십시오. 처음에는 광야였고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 세 번째는 매우 높은 산입니다.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이 어지간해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습니다.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다 네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을 회개시켜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악마는 “내게 엎드려 절하면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을 다 네게 주겠다”고 합니다. 악마에게 절 한 번하고 천하의 모든 나라를 다 차지하면 굳이 십자가에 처형될 일도 없이 손쉽게 뜻을 이루지 않겠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천하의 모든 나라를 차지한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악마에게 절한다는 건 악마에게 굴복한다는 것이므로 그 나라는 여전히 악마의 나라이고 예수님은 그 하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며 악마를 당장 축출하십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겨야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기본 원칙이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악마의 졸개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권력을 얻고자 악마와 손잡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변명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러나 그들이 요직을 차지했을 때의 상황을 보면 그들은 호랑이를 잡기는커녕 그 밥이 되어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 세속의 권력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이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이 와서 그를 억지로 모셔다가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요 6:15).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십니다. 그의 제자 베드로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대신 그리스도로 숭배 받으며 살라고 어느 날 가시던 길을 가로막고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불같은 화를 내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 16:23)라고 호되게 책망하십니다. 악마가 행한 광야의 시험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가시는 길목마다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유혹을 주의 말씀과 기도로, 굳은 신앙으로 이겨내셨습니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내 욕망은 무수했고, 내 울부짖음은 처절했으나 그러나 당신은 차디찬 거절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힘 있는 자비가 내 삶속에 속속히 깃들어 있나이다.” 우리 모두가 삶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악마의 모든 시험을 예수님 안에서 거뜬히 이겨내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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