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5/8(목)
다시 쌓는 기초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햇살처럼 비칠 것이며, 네 상처가 빨리 나을 것이다.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가실 것이며, 주님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가 여기에 있다’ 하고 대답하실 것이다. 네가 너의 나라에서 무거운 멍에와 온갖 폭력과 폭언을 없애 버린다면, 네가 너의 정성을 굶주린 사람에게 쏟으며, 불쌍한 자의 소원을 충족시켜 주면, 너의 빛이 어둠 가운데서 나타나며, 캄캄한 밤이 오히려 대낮같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너의 백성이 해묵은 폐허에서 성읍을 재건하며, 대대로 버려 두었던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은 너를 두고 “갈라진 벽을 고친 왕!” “길거리를 고쳐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한 왕!”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사야 58:6-12>



금식의 이유

지난 1월 2일, 예장통합 총회가 주최한 “신년 하례회 및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본래 작년 말 대림절을 맞아 시국기도회를 갖기로 했다가 갑작스레 한 차례 연기되어 열린 기도회였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에 따른 ‘대선 부정선거’를 언급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는 없었습니다. 총회가 내외의 압력에 굴복해 ‘시국’이란 단어도 떼고 극히 의례적인 기도회처럼 진행하였기 때문입니다. 함께 참석한 몇몇 목사님과 더불어 급히 기도문 형태의 유인물을 만들어 나눠주고 현관에서 대선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일인시위를 전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총회의 한 직원은 유인물을 배포하지 못하게 막았고 어떤 여성은 ‘종북 좌파’ 운운하며 거칠게 항의하고 그 유인물을 찢기도 하였습니다. 다만 전국 노회 임원들이 1천여 명 가량 참석한 기도회였는데 유인물 배포에 대해 반발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국기도회’인줄 알고 왔다가 알맹이 없는 기도회 진행에 아쉬워하는 분들이 더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총회는 이 날 점심 한 끼를 금식하기로 하고 2시간 남짓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전국 노회 대표들을 불러 기도회를 개최한 만큼, 총회 차원의 시국 성명서 한 장이라도 냈다면 꽤 의미 있는 신년기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용기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긴지 20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사무엘은 온 백성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고 참회의 금식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우상숭배를 그치고 자신들의 죄악을 주님께 고백하는 대대적인 회개의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블레셋에게 빼앗긴 성읍들을 도로 찾고 평화를 얻었습니다.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 시절 왕후 에스더는 유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위해 사흘 밤낮 금식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다”는 각오로 왕을 만나 담판 짓기 전 에스더는 동포들과 함께 사흘 동안 금식 기도하였습니다. 또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금식기도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자 시내 산에 올랐을 때 주님과 함께 밤낮 사십일을 지내며 금식을 한 일입니다(출 34:28). 예수님께서도 세례 받으신 이후 곧장 광야에 들어가 밤낮 사십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마 4:1).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유구한 금식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비단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이웃 종교들에서도 금식기도는 널리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 금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영성 수련입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금식’이란 단어 자체가 종교적인 이유로 일정기간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합니다. 그 밖의 이유로 곡기를 끊는 일은 ‘단식’이라고 하여 둘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살 빼려고 단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왕 그렇게 다이어트 할 거면 기도를 곁들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몸도 정신도 다 건강해 질 테니 말입니다. 미국 의학자인 하임 코언 박사는 2004년 <사이언스지>에 ‘장수유전자’로 일컫는 ‘시르투인’이란 물질을 소개하였습니다. 장기간 적게 먹인 쥐들과 맘껏 먹게 한 쥐들을 비교해봤더니 적게 먹인 쥐들의 뇌, 간, 신장 등의 조직에서 ‘시르투인’이란 물질이 나와 세포자살을 억제하더랍니다. 이는 모든 동물이 마찬가지여서 사람도 되도록 적게 먹으면 장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일일 일식을 실천한 다석 유영모 선생은 91세까지 사셨고 산행이나 먼 거리도 젊은 사람보다 더 잘 걸어 다니셨다고 알려졌습니다. 동물들은 몸이 아프면 본능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는데 그렇게 굶다보면 어느새 병이 낫습니다. 이것도 장수유전자인 ‘시르투인’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이 물질이 체내의 수십억 세포를 스캔하여 자연치유력을 발휘하기에 병이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이유든 건강을 위해서든 아니면 시국을 염려해든 간간이 금식 또는 단식의 실천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껍데기 금식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멸망 관련 총 4일간의 금식 날을 지켰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첫 번째 공격을 기억하는 날(10월 10일), 예루살렘 함락일(4월 9일), 성전 파괴일(5월 10일), 총독 그달랴의 살해를 기억하는 날(7월 3일) 따위가 그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 이처럼 여러 날을 두고 금식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한국이 6.25 전쟁 기념일이나 8.15 광복절을 정하여 기념행사를 갖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성전까지 파괴된 뒤 포로로 끌려가 살아야했던 지난날을 기억하고 그 과오를 되풀이 말자는 뜻에서 금식 날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처음 좋았던 취지는 온데간데없고 의례적인 금식에 그치는가하면 잦은 금식에 불평하는 볼멘소리마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스가랴서에 따르면 베델의 어떤 사람이 사레셀과 레겜멜렉에게 하인들을 딸려 보내어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우리가 지난 여러 해 동안 해 온 그대로, 다섯째 달에 애곡하면서 금식해야 합니까?”(슥 7:2~3)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그동안 많이 했으니 이제는 그만 해도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58장 3절에서도 금식에 대한 불평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묻습니다.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이처럼 금식 날을 지키긴 하는데 그 효과에 의문을 품고 불평하는 자들이 생겨났고 금식 자체도 순수성을 잃어 겉치레로 변질되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할 때면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쓴 채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였습니다. 굵은 베옷은 시신을 입히는 수의를 상징합니다. 머리에 뒤집어쓰는 재는 시신을 땅에 묻는 것을, 엎드리는 자세는 시신이 관 앞에 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곧 금식을 하는 행위는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고 오로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겸손한 신앙적 행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껍데기만 남은 이스라엘 백성의 금식에 대해 호되게 나무라십니다.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사 58:3c~4).” 본말이 전도된 금식이 계속되자 드디어 하나님이 직접 나서셔서 호되게 나무라십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금식 날 금식으로써 자신의 향락을 위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자가 있고 “못된 주먹질”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금식은 철저히 자신을 내려놓기 위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망각하고 금식으로써 하나님을 압박해 하나라도 더 뭔가를 얻어내려는 얄팍한 속셈을 알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하나님께 나아가 묻고 주님의 길을 찾고자 애쓰는 사람들처럼 보이나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약자들에 대한 폭력과 탐욕만이 가득하였습니다.


신앙의 기초

느헤미야서에는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사회, 경제적 문제로 겪는 혼란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한몫 잡은 귀족들과 관리들은 가난한 동포들이 겪는 고통은 아랑곳없이 돈놀이로 그들의 가산을 삼켰습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동포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도 성에 차지 않던지 사람들이 빚을 갚지 못하면 그들 자녀마저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백성 대부분이 무거운 세금 내기도 버거운 처지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 같은 무자비한 짓을 하였습니다. 당시 유다는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였고 나라의 행정력은 잘 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무법천지처럼 사회가 더욱 혼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면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겠지만 종교적 타락으로 그마저 여의치 않았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는 폐허 상태였던 성전과 예루살렘 성읍의 재건이라는 중대한 과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똘똘 뭉쳐 이 과업에 매진해도 부족할 판에 그들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왜곡된 신앙 따위로 서로 신뢰하지 못한 채 마음부터 황폐해진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겉치레에 불과한 금식보다는 “부당한 결박에서 풀어 주는 것, 압제 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굶주린 자에게 먹거리를 나누어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부터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일이야말로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하시며 금식 자체를 다시 정의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바라시는 금식은 단순히 음식 먹지 않으며 기도하는 행위이기에 앞서 이웃의 상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돌보는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에서 바른 금식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금식할 때에는 기름을 바르고 낯을 씻어 은밀하게 하여 숨어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이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금식이 아닙니다. 참회하는 심령으로 먼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부서지고 상처 받은 이웃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갈라진 틈을 매우는 일에 더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는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뼈마디에 원기를 주시고 마치 물 댄 동산처럼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병든 사회를 회복하고 자신도 살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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