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2/2
복 있는 사람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 5:1~12>


복 구하는 마음

 설날이면 으레 주고받는 인사말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오랜 세월 사용해 진부하게 느껴질 만도 한데 이 인사말이 그대로 사용되는 건 여전히 강한 호소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치고 ‘복’ 싫어하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은 드물어졌지만 옛날 밥그릇이나 국그릇을 보면 흔히 한자로 복(福)자가 새겨 있었습니다. 또 어른들은 애들이 다리만 떨어도 ‘복 달아난다’며 꾸지람하였습니다. 복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대체 복이 무엇이기에 다들 새해부터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복’을 찾아보니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 정의해 놓았습니다. 이런 정의로는 복이 뭔지 다소 막연합니다만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세월 ‘오복’을 추구해왔습니다. 오복이란 첫째 오래 사는 복(長壽), 둘째 재물의 복(富), 셋째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한 복(康寧), 넷째 덕을 베풀어 좋은 평판을 듣는 복(攸好德), 다섯째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은 복(考終命) 따위를 말합니다. 사실 부귀, 장수, 건강, 명예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바입니다. 형태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오복 같은 복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얻고 싶어 합니다.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복을 구하는데 유독 골몰하는 나라라고 보기 힘듭니다. 가령 이탈리아의 유명한 항구도시 ‘베네치아’만 해도 라틴어로 ‘축복받은’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의 전임자 ‘베네딕토’ 교황 이름도 같은 ‘축복 받은 자’란 의미로 같은 어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서구에서도 복 받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동일합니다. 더욱이 “행복 추구권”은 헌법도 보장하는 중요한 권리입니다. 사회복지도 누구나 누려 마땅한 복된 삶을 제도적으로 함께 이루어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 받은 세 족장

성경에서 ‘복’ 하면 대번 떠올리게 되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주는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의 소명을 종교적 차원에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거듭하여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보면 앞서 말한 오복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여 주겠다”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여주겠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 소유로 삼게 하겠다.”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약속들입니다. 마지막의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 복을 받게 될 것이다.”는 약속만 제외하면 모두 세속적인 복에 해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손번성하고 명성 크게 떨치고 자기 땅을 얻어 부자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는 시쳇말로 하나님께 낚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은 금방 이루어지지 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비슷한 약속을 하십니다.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씨의 덕을 입어 복을 받게 하겠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약속받은 땅을 얻지 못한 채 떠돌이 생활을 하였고 자식도 두 아들 에서와 야곱 밖에 두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에게도 땅과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고 야곱도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세 족장에게 그들이 혹할만한 세속적 복을 거듭 약속하셨고 거기에 덧붙여 세계 민족에게 복을 끼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극히 세속적인 상품으로 호객행위를 하신 뒤 영적인 복을 슬쩍 끼워 파신 셈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과대포장 허위광고로 그의 종들을 항상 헛고생시키신 건 아닙니다. 구약성서가 말하는 성경 인물들 중에는 노아, 욥, 다윗처럼 장수의 복, 재물의 복, 자손 번성의 복을 받은 사람이 여럿 나옵니다. 구약성경은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많은 재물을 얻고 장수하며 자손을 많이 낳는 세속적 복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인 시각을 보입니다. 신명기만 하더라도 모세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주의 깊게 지키면...당신들의 태가 복을 받아 자식을 많이 낳고, 땅이 복을 받아 열매를 풍성하게 내고, 집짐승이 복을 받아 번식할 것이니, 소도 많아지고 양도 새끼를 많이 낳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곡식 광주리도 반죽 그릇도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 28:1-6) 이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그 주님께 순종할 때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얻도록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세속적 복을 구하는데 앞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늘 묵상하며 실천하는 삶”(시 1:2)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 축복관의 핵심에 해당합니다.


하늘의 큰 복

구약의 시편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노래하는 시로 시작합니다. 그는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 1:1-2)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면 신약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시인답게 시편 1편 같이 짤막한 분량의 시로 여덟 종류의 복 있는 사람을 이야기해 주십니다. 개역개정, 새번역, 공동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은 모두 “마음(심령)이 가난한 사람은...”을 시작으로 팔복을 번역하였습니다. 반면 주교회의 성경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렇게 시작합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복이 있다(마카리오이)”란 말이 3절부터 11절에 이르기까지 계속 맨 앞에 나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팔복 말씀이 애초 운율이 있는 한편의 시처럼 잘 다듬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다섯 편의 예수님 설교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 5~7장에 이르는 산상설교가 첫 번째 설교인데 예수님은 팔복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이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종말과 심판 설교(24~25장)에 앞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마태는 예수님의 축복과 저주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은 “그저 한편의 아름다운 시”이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노래”가 아닙니다. 극히 제한된 수도자들이나 지킬 수 있는 말씀도 아닙니다. 20세기 대표적인 순교자인 본회퍼 목사는 산상설교 실천을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 몸에 참여하는 성례전”으로 보았습니다. 신학자 한스 큉의 경우는 산상설교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영성의 길”이라고 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첫 번째 청중은 제자들이고 그 다음은 예수님 가까이 있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팔복 선포를 들었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된 삶을 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같은 요구와 명령을 하십니다. 가장 먼저 “심령(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받을 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평지설교에서는 ‘심령’이란 단어가 빠진 상태로 그냥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복도 여덟 가지가 아니라 가난, 굶주림, 우는 자들, 박해받는 사람들 등 네 가지만 적혀 있습니다. 그 대신 산상설교에 없는 네 가지 화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평지설교가 예수님의 원래 목소리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이 많지만 정확한 건 알 수 없습니다.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를 비교하면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세 종류의 사람이 받는 복만 겹칩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 맞습니까?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가난하고 슬퍼하며 박해받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서 불쌍히 여기고 조롱하며 우습게 아는 사람들을 ‘복 있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특히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에 대해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는 똑같은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하늘 나라’(천국)은 반드시 얻어야할 최고의 가치입니다. 하늘 나라를 얻은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의’의 경우도 마태가 누누이 강조하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를 갈망하며 그 일을 위해 힘쓰다가 고초를 겪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들도 하나님 나라를 차지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엄청난 복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사람’의 소유라니 얼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심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프뉴마’는 직역하면 ‘영’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말하는 영은 ‘인간의 영’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를 대체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비워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자를 뜻한다고 봅니다. 마태는 마음의 가난 혹은 영적인 가난을 말하였지만 누가는 수식어 없이 그저 ‘가난한 자’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의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팔복의 선포로 세속의 가치 기준을 뛰어 넘는 ‘하늘의 복’을 제시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세속의 복을 추구하는 데 머물지 말고 바로 이 하늘의 복을 얻는 데로 나아가라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 백성’으로서 주님이 말씀하신 ‘복’을 이미 얻은 사람들임을 깊이 깨달을 뿐 아니라 하늘의 복을 꾸준히 추구하는 복된 삶을 이어나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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