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4/1/19
문을 열어라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 그 때에 빌립을 만나서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빌립은 벳새다 출신으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향 사람이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말하였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빌립이 그에게 말하였다. “와서 보시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나다나엘이 예수께 물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43-51>



떠남과 만남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 주던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요 1:28)에서 처음 등장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세례 주던 그곳으로 자진해서 가십니다. 분명 세례 받고자 가시는 장면일 텐데 예수님의 세례는 이미 끝난 이후의 상황처럼 그려집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며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라고 말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처음으로 드러냅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한 데서 더 나아가 자신의 두 제자를 붙여주기까지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살점이라도 떼어주겠다는 태도를 보입니다. 그가 두 제자와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 거듭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틀 전 사람들에게 똑같은 증언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 들으라고 다시 그 말을 했다는 것은 “저분을 따라가라”는 말이나 다름없지요.

실제로 두 제자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인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는 자기 형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언급한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이제 “메시아”로 바뀌었습니다.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예수님이 묵고 계시는 곳에서 이미 하룻밤 같이 지냈습니다. 그 사이 그들은 요한의 말 그대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동튼 해는 이제 정점을 지나 서서히 예수님 편으로 기울어 갑니다. 그것은 ‘다음 날’이란 말이 세 차례나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세례자 요한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세례를 베풀며 자신은 “광야의 소리”일뿐 “그리스도가 아니다”고 밝힌 날을 기점으로 “다음 날”을 셈합니다. 하루, 이틀, 사흘,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영향권을 벗어나십니다. 오늘 본문 43절을 보면 “다음 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떠나려고 하셨다.”고 적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갈릴리에 가십니다(막 1:14). 그런데 여기서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언급이 없음에도 예수님이 갈릴리로 떠나시려 합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갈릴리에 가시기 전에 이미 제자 다섯 명을 택하십니다. 안드레, 익명의 제자,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복음에 실명이 나오는 제자는 다섯 명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도마와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의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거닐며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같은 어부생활을 하던 자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반면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 익명의 제자, 베드로가 스스로 예수님께 와서 제자가 된다는 점이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사람인 빌립을 만나셨을 때에야 “나를 따르라”고 그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만나신 것은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친 게 아닙니다. 직접 찾아가 만나신 것입니다. 그래선지 요한복음에서 빌립은 제자들 가운데 상당히 돋보이는 사람입니다.


진가를 보라

 예수님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추천을 받았는지, 아니면 소문으로 들어 알고 계셨는지 모르나 빌립의 됨됨이를 알아보시고 그를 제자로 택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에서 시작된 예수님에 대한 소개가 연쇄반응을 거쳐 나다나엘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또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다섯 권의 책을 ‘모세오경’이라 부릅니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서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모세가 이 다섯 권의 책을 쓴 것은 아니지만 오랜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기록했다”는 말은 ‘예언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빌립은 율법서와 예언서 곧 “성경에 예언된 그분을 우리가 만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리라’고 예언된 그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진 나다나엘도 흥미롭게 들었으리라 봅니다.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빌립이 “그분은 나사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라고 덧붙이자, 나다나엘은 당장 얼토당토않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냐?”고 합니다. 한 마디로 “헛소리 마라”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이렇게 말하는 건 당시로서는 당연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구약에서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을 만큼 외진 시골입니다. 더욱이 메시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게 정설이었습니다. 나다나엘 뿐 아니라, 유대인치고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메시아를 선뜻 인정하긴 힘들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했다는 전승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유대 베들레헴 태생이 아닌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그리스도라는 점은 유대인들이 그를 받아들이는 데 계속 걸림돌로 작용합니다(요 7:41-42, 52).

 빌립은 나다나엘에 대한 전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와 괜한 논쟁을 벌이지 않고 일단 “와서 보라”며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빌립은 백문이 불여일견(百聞以 不如一見)이란 속담을 잘 아는 사람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짧은 지식으로 나다나엘을 설득하려 들기보다는 그를 예수님과 직접 만나게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 말라”며 그들을 다독이실 때 빌립은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요청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이건 무리한 요청이었지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데 그분을 앞에 두고도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나다나엘이 다가오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며 칭찬하십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오기 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며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치 못하겠다며 무시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와는 딴판이셨습니다. 지금껏 누구도 몰랐던 나다나엘의 진가를 꿰뚫어 보시고 그를 추겨 세우십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은 창세기의 야곱을 떠올리게 합니다. 야곱의 별명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는 ‘속이는 사람’ 곧 간사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조상 야곱은 간사한 인물이었지만, 나다나엘은 진국이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하십니다. “가장 좋은 교사란 아이들과 함께 웃는 교사이고 최악의 교사는 아이들을 우습게 보는 교사이다”(닐)란 말이 있습니다. 당초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시피 봤지만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의 진가를 알아주시고 기꺼이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그를 훤히 꿰뚫어 보시자 화들짝 놀라 대번 무릎 꿇고 맙니다. 그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세례자 요한 말고 예수님 제자 가운데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은 나다나엘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굳게 닫힌 마음 문을 여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 사다리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물었을 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었을까요? 어떤 분들은 유대 랍비들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제자들을 가르치곤 했다며 나다나엘을 랍비로 보기도 합니다. 또 여기 나오는 무화과나무가 율법서나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스가랴는 “그 날이 오면, 너희는 서로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이웃을 초대할 것이다.”(슥 3:10)고 예언했는데 혹시 그 말씀과 관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어떤 사람인지 그 마음속까지 훤히 아셨다(요 2:25)는 점이고 이로써 나다나엘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고 덧붙이십니다. 이는 틀림없이 야곱의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꾼 꿈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야곱의 돌베개 꿈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고이지요.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심으로써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주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훗날 모두 데려가시겠다(요 14:3)고 하셨으니 하늘과 땅에 사다리가 놓인 셈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진리, 생명, 소망의 문이자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되셨습니다. 이 예수님과 더불어 하늘과 사람의 닫힌 문을 열고 연결하여 새 세상을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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