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3/12/22(일)
임마누엘의 성취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마 1:18-23>



마리아의 아들

 마태복음 첫 대목에 나오는 예수님 족보는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브라함 자손이라 생각하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사회에서 그다지 메리트 있는 말이 아닙니다. 반면 ‘다윗의 자손’은 다릅니다. 더욱이 예수님 족보를 보면 다윗부터 여고냐에 이르기까지 유대왕국의 왕들이 즐비합니다. 이 족보가 액면 그대로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부러움을 살만한 왕손에 해당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서 다윗의 자손인 아기 예수가 진정한 유대인의 왕임을 강조합니다. 반면 당시 통치자였던 헤롯대왕은 순전히 로마제국을 등에 업고 왕위를 가로챈 반역의 수괴에 지나지 않음이 은연중 드러납니다. 헤롯대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 이두매 곧 에돔족속 출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마지못해 그를 지배를 받으면서도 속으로는 헤롯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사야나 미가 같은 여러 예언자가 예언한 다윗 가문의 메시아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족보를 건성으로 읽다가는 “예수님은 왕손이라 우리와는 출생배경부터 전혀 다른 분이구나.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가까이 다가서기조차 힘들겠구나.” 이렇게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족보를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법적으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실제로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사람의 혈통에 따라 나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 22:45)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다윗의 자손인 건 맞을지라도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족보와 별 상관없이 마리아가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마태는 마리아의 출신배경에 대해 말해주지 않습니다. 누가는 세례자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을 아론의 자손으로 소개하면서 그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친척이라고 전해줍니다. 이를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제사장 가문 출신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제사장 가문 출신임을 보여주는 어떠한 단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저 평범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그것도 약혼자 요셉과 잠자리도 같이 하지 않았는데 임신한 여인으로 그려집니다. 마태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마리아를 굉장히 신비스런 아우라를 지닌 여인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말은 극히 신앙고백적인 표현이고, 객관적 현실은 어떻습니까?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약혼자도 모르는 사이 임신하였으니 마리아는 전형적인 미혼모입니다. 또 정절을 지키지 못해 파혼 당할 처지에 놓인 수치스런 여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를 받고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리라는 사실에 굉장히 들떠 당당히 하나님을 찬양하기까지 합니다. 반면 마태복음의 마리아 분위기는 전혀 다릅니다. 자신의 임신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못하고 단지 약혼자 요셉의 용서와 선처만을 기대해야하는 딱한 처지입니다. 마태는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고 전합니다. 요셉이 이처럼 사려 깊고 약혼자를 잘 배려하는 남자였다는 점이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가 만일 못된 사람이었다면 마리아는 동네 사람들의 돌 세례를 받아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이하여라.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일러줬어도 요셉이 “이건 단지 꿈일 뿐이다”며 그 지시를 듣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마리아는 홀로 예수를 키우며 심히 고달픈 인생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지시하면 군말 없이 그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한 하늘 징조

천사는 마리아가 낳을 아들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임을 요셉에게 알립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모든 일’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임마누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라는 내용의 이사야서 7장 14절 말씀을 70인역에서 인용합니다. 70인역 성경은 주전 300년경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말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보아라,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라고 돼 있는 구절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살짝 바뀌었습니다. 젊은 여자(알마)가 ‘동정녀’(파르테노스)로 번역된 것입니다. 마태가 그 사실을 알고도 일부러 그렇게 인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동정녀’가 잉태하였다는 그의 인용은 불필요한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의 본래 맥락에 따르면 임마누엘 예언의 강조점은 ‘동정녀의 잉태’에 있지 않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아이가 버터와 꿀을 먹을 정도 나이가 되면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황무지가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곧 임마누엘이란 아이는 대재앙이 닥쳐올 것임을 알리는 징조에 해당합니다. 이는 다가오는 파국을 두려워말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의연히 대처하라는 아하스 왕에게 주는 주님의 메시지였습니다. 물론 신약성서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 반드시 본래 맥락에 맞춰 인용하진 않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탄생을 임마누엘 예언의 실현과 연관 짓는 사례도 그러합니다. 다만 본문에서 유념해야할 사항은 마태의 초점이 ‘동정녀’의 잉태가 아닌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든 아니면 젊은 여자 마리아에게 잉태되었든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분이 바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점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가장 뚜렷한 징조임을 보여줍니다. 즉 그는 아기가 태어나는 평범한 사건에서 하나님이 세상 속으로 직접 개입해 들어오시는 성육신의 하늘 징조를 읽어냅니다.


우리 곁의 예수

야곱은 그의 형 에서를 피하여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도망치다 날이 저물자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잡니다. 그때 그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사닥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말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야곱은 그 곳을 ‘하나님의 집’이란 뜻의 벧엘이라 명명하고 거기서 서원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주시면...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창 28:16-22) 그는 브엘세바를 떠나 혈혈단신으로 달아나며 자신 곁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어느 때보다 가까이 그와 동행하고 계심을 새삼 깨닫고 이 같은 서원 기도를 한 것입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생활할 때에 떨기나무 가운데 불꽃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에게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출 3:12)는 말씀을 듣습니다. 모세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역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수 1:9) 그렇다고 하나님은 야곱, 모세, 여호수아 같은 이스라엘의 족장이나 지도자에게만 함께하신 게 아닙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 의해 쫓겨난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도 함께 하셨습니다. 특히 아이 이스마엘에 대해 창세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 그는 광야에 살면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창 21:20)

마태는 그의 복음서 첫 장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임마누엘 예언’의 실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마지막 28장 마지막 절인 20절에서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기록합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마 18:20)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마태는 예수님이 항상 우리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임종 때에도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외쳤다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큰 어려움에 봉착해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나 밖에 없구나! 이제 어쩌지?” 이런 생각을 하니 두려움에 빠져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는 두 강도가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유대 집권자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할 때, 마태는 이들 두 강도도 함께 예수님을 욕했다고 전해줍니다(마 27:43). 인생의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그들 곁에 구원자 예수님이 함께 계셨건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분께 오히려 욕하였습니다. 두 강도만 그런 게 아닙니다. 유대 집권자들을 비롯한 많은 백성이 임마누엘 예수님을 함부로 대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예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그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요 14:18). 주님이 늘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임마누엘 신앙의 삶을 살면서 어려운 현실에 굴함 없이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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