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3/12/15(일)
누구를 찾는가?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물어 보게 하였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들이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다. 이 사람을 두고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마 11:2-11>



기다림의 사람

 지난 9일(월) 95세 나이로 타계한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물결로 한 주간 내내 지구촌이 들썩였습니다. 그는 남아공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어 수백 년 이어지던 흑백갈등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진실과화해위원회를 만들어 오랜 흑백갈등 기간에 발생한 각종 범죄의 진상을 밝히고 처벌보다는 용서와 화해로 나아가게 이끌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헌법상 중임이 가능하기에 원한다면 대통령을 더할 수도 있었으나 5년의 임기로 대통령 자리에서 깨끗이 물러났습니다. 만델라는 젊은 시절, 백인정권의 흑인 차별정책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게릴라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다 체포되어 내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무려 27년간 감옥에서 복역한 바 있습니다. 46세에 수감되어 출소할 때는 73세의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옥생활에서 “정직, 진실, 소박함, 너그러움” 등 자신에게 부족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합니다. 종신형을 살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자신을 갈고 닦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끝내 열리지 않을지도 모를 철창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며 스스로를 철저히 준비한 만델라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만델라가 장기 복역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기네스북에 오른 최장기수는 따로 있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 때 유엔군에 체포되어 45년간 감옥생활을 하다 출소한 김선명 씨가 그 주인공입니다. 김선명 씨 외에도 비전향 장기수로 43년 복역한 안학섭, 39년 복역한 한창호 씨 등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겠다는 전향서 한 장만 쓰면 석방시켜준다는 데도 그것을 끝내 거부하고 반평생을 감옥에서 지냈습니다. 도대체 이들을 그처럼 긴 세월 감옥 안에서 기다리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김선명 씨는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소원은 조국의 통일이라 말합니다. 조국통일이든, 신념이든, 가족이든 뭔가 희망의 끈을 끝내 놓지 않았기에 0.75평 감옥에서 그가 반백년을 견디며 살 수 있었겠지요.  

신약성경에서 ‘기다림’의 달인 세 사람을 꼽는다면 시므온,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 세례자 요한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 정결예식을 행할 무렵 예루살렘에 살던 의롭고 경건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렸고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사람으로 소개됩니다(눅 2:25).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받아 안았을 때 “주님, 이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을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가게 해주십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스도를 기다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도 집 나간 아들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린 사람입니다. 마침내 아들이 돌아오자 그는 맨발로 달려 나가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왔다며 그 아들을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생애 마지막까지 메시아를 간절히 찾고 기다린 사람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점에서 시므온과 비슷하지만, 막연히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는 세례자 요한이 “백성 앞에 나타나는 날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눅 1:80)고 말합니다. 이는 요한이 상당히 일찍부터 광야생활을 하였음을 추정케 합니다. 그는 제사장 가문 출신이라 마음만 먹으면 제사장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광야로 나가 은둔하였을까요? 영성가로 잘 알려진 헨리 나웬은 “기다림이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 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가 살던 불의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황폐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며 메마른 광야로 나가 주께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를 어서 보내주시라고 간곡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메시아의 도래를 조금이라도 더 앞당기고자 대대적인 회개의 세례 운동도 착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신이십니까?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베풀 때 줄곧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곧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요한 자신은 다만 그 분의 길을 준비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그 손에 도끼나 키를 들고 계신 분입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사정없이 찍어 불에 던져버리고 쭉정이로 판명난 자들은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태우시는 심판의 주님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는 선한 사람이었고 유다인들은 동족들을 향해 정의를,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건을 실천하며 세례를 받으러 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을 유다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작용도 하였으나 요한을 궁지로 몰아넣게도 만들었습니다. 요한은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아내를 버리고 그의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와 결혼하자 그 부당성을 지적하며 규탄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많은 백성은 요한을 지지하였으나 헤롯 안티파스는 폭동이 날까 두려워 세례자 요한을 마케루스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언제 처형될지도 모를 위기 상황에서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님은 이 같은 질문을 받고는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전하라”며 에둘러 답변하십니다. 메시아인지 아닌지 분명히 밝히면 될 일 같은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애매한 답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생각하는 메시아상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소 차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악인들을 불 같이 또는 키질하듯 심판하시는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같은 메시아가 될 것이라 예상했다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자 제자들을 보내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하고 물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혹자는 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자 이런 질문을 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요한을 최대한 보호하려는 그 충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런 시각은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 됨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질문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나왔음을 감안할 때 요한이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질 위험성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셨습니다. 마태는 그 당시 이미 요한이 예수님의 비범함을 알고서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마 2:14)하면서 말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예수님이 애초 요한에게 세례 받고 그의 영향 하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음을 감추기 위한 마태의 가필로 보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처음부터 메시아로 인식했다면 훗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하고 묻는 게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답변에서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사야 35장 5~6절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실현되고 있음을 알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기대하듯 불같이 심판하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병자들을 고쳐 회복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메시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천국의 새 시대로

 요한의 제자들이 떠났을 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 평가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은 예언자를 능가하는 사람이며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최고의 찬사라 할 만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군중도 누군가를 애써 찾다가 세례자 요한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광야로 나가 요한을 만났고 그에게 푹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의 요한과 궁중의 화려한 옷 입은 사람을 대조하십니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던 예언자였습니다. 외형상 아무 볼품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도마복음 78절은 “너희들은 왜 시골로 나갔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너희의) 왕들과 위인들처럼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 그들은 부드러운 옷을 입고 있어 진리를 분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요단강의 갈대는 헤롯 안티파스가 만든 동전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헤롯 안티파스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또는 ‘화려한 옷 입은 사람’ 대신 광야의 요한을 찾아 나선 군중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을 기대하고 광야로 갔느냐고. 그러면서 요한을 예언자를 능가하는 최고의 예언자로 평가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 “하늘나라에서는 아무리 작은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덧붙이십니다. 요한의 시대와 하늘나라 곧 하나님 나라의 시대 곧 메시아의 시대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메시아 왕국의 성문까지 사람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성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신 분입니다. 요한은 예고편을 말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직접 맛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이 과연 ‘오실 그분’이 맞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분이라면 예수님 말씀처럼 ‘화려한 옷 입은 사람’을 궁중이 아닌 광야에서 찾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물어봐야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눈 먼 사람을 보게 하시고, 병든 사람을 치유하시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들려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냅니다. 이런 우리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를 만들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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