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3/12/08
희망의 뿌리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한 것이며,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써,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인내심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같은 생각을 품게 하시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를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으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증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긍휼히 여기심을 받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을 드리며, 주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또 “이방 사람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 하였으며, 또 “모든 이방 사람들은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사야가 말하기를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하였습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 15:4-13>



절망의 늪지대

그제 새벽 밀양에서는 음독자살을 시도한 주민 유한숙 씨(74)가 안타깝게도 끝내 숨졌습니다. 돼지 400여 마리를 키우던 분인데 아무리 반대 농성을 하고 협상을 시도해도 한전이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자 비관해 농약을 마셨다 합니다. 이로써 작년 1월 이치우 씨(74세)가 송전탑 공사 강행을 대하며 분신자살한 뒤 두 번째 밀양 주민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희망버스가 농성장을 찾아갔던 날 그의 지인에게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렸다”며 낙담하더랍니다. 송전탑이 들어서면 농사짓는 사람들이야 그나마 낫지만 자신 같은 양돈농가는 대책이 없다는 거였습니다. 유 씨의 한스런 죽음을 보며 그와 같이 농성해오던 주민들은 자신들도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조상대대로 뿌리내리고 살던 밀양지역 여러 마을이 난데없는 송전탑 공사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태반이 노인인 주민들이 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불철주야 농성해도 한전은 국가사업이라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입니다.

밀양만 송전탑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여수 율촌 봉두마을도 대형 송전탑으로 40여년 이상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70년대 19기의 송전탑이 마을에 즐비하게 들어섰고 최근에는 6기가 증설되어 무려 25기의 송전탑이 마을에 빼곡합니다. 봉두마을에는 80여 가구 200여 주민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평화롭던 이 마을은 대형 송전탑들이 들어선 뒤 여러 주민과 가축이 암, 백혈병, 유산 등 각종 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국가사업’이라는 미명하에 오랜 세월 희생을 강요당했지만 보상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전답을 팔고 고향을 떠나고 싶지만 땅을 사겠다는 사람도 없어 떠나지도 못한답니다. 도시와 산단의 전력공급을 위해 핵발전소가 증설되고 대형 송전탑들이 세워지자 시골 마을의 주민들이 피눈물 흘리며 절망 속에 울부짖는 상황입니다. 이런 일이 아니어도 한국은 OECD 가입국가 중 벌써 수년째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지난 10년간 119%나 증가했고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하루 평균 43명꼴의 높은 자살률을 보입니다. 자살률은 노년세대일수록 높게 나타나지만 청소년이나 카이스트 학생들마저도 몹시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이는 지금의 한국사회에 절망과 사망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드러냅니다.


희망의 근거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의 으뜸가는 도시 빌립보에서 전도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그의 동료 실라와 함께 옥에 갇힌 적 있습니다. 치안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옷을 찢고 많은 매질을 한 다음 옥에 가뒀습니다. 그들 처지를 보면 인간적으로 몹시 억울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그 ‘캄캄한 한밤중’ 기도하며 찬송하였습니다. 이때 갑작스레 큰 지진이 일어나 모든 죄수들의 수갑과 착꼬가 풀리고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죄수들이 모두 달아난 줄로 알고는 칼로 자결하려 합니다. 이를 본 바울은 그의 자결을 막았고 덜덜 떨며 “내가 어찌해야 구원을 얻겠냐?”고 묻는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복음을 전합니다(행 16:30-31).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절망스런 현실 앞에 낙심하고 좌절하여 심지어 자결에까지 이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바울과 실라처럼 절망스러운 상황에 내던져질지라도 거기에 굴하지 말고 주님 손을 꼭 붙잡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들은 옷이 찢기고 심한 매질도 당한 채 옥에 갇혔으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도와 찬송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반면 간수는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의 수갑과 착꼬가 풀리자 자신은 이제 끝장이라는 생각에 자결을 시도합니다. 두 전도자와 간수는 모두 절망스러운 상황을 경험했지만 대응은 천양지차로 갈렸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습니까? 두 전도자에게는 구원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으나 간수에게는 그 분이 없었습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도 아주 기본적인 이 사실을 망각하면 어느덧 절망 가운데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희망은 어둠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요, 촛불을 밝히는 것이다”(빈센트 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캄캄한 밤 자체만으로 절망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명령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 가운데 어둠이 가득하기에 우리는 빛이 되라고 주님의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희망의 등불을 밝히기는커녕 캄캄한 세상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탄식, 낙담, 원망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는 신앙인다운 자세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에 미리 기록된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며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인내와 위로, 희망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수신자인 로마교회가 힘겨운 고난 중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인내와 위로, 희망이 필요한 이때에 바울은 이사야서 11장 10절을 인용해 희망의 확실한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 구절은 <70인역>을 인용하기에 우리가 가진 구약성경과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싹이 나서 이방 사람을 다스릴 이가 일어날 것이니, 이방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둘 것이다” 이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만민의 구원자가 나올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실현하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온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희망의 확실한 근거라고 교훈합니다.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사 11:1)며 장차 메시아가 이룰 평화의 세계에 대해 예언하였습니다. 이 메시아는 공의로 판결하여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이 없게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가 통치하는 세계에서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놀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암소와 곰이 벗이 되며 젖먹이 아이가 독사 구멍 곁에서 장난한다고 했습니다. 아마 개 꿈같은 이야기라며 전혀 현실성 없다고 보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희망의 메타포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그런 오해를 하는 겁니다. 문자적 해석을 한다면 사람이 어떻게 나무줄기나 뿌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자체부터 말이 안 되지요. 이사야는 훗날 평화의 메시아가 임하셔서 다스리실 이상세계의 모습을 예언자적 상상력을 통해 훌륭히 묘사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을 이새의 줄기와 뿌리에서 자라난 한 싹과 가지, 열매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처럼 싹과 가지를 내고 열매를 맺는데 그가 통치하는 세계는 사람과 동물, 동물과 동물의 모든 적대 관계가 해소된 평화의 세상입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동물 간의 모든 갈등이 해소되고 서로 공생 공존하며 조화를 이룬 세계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해졌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십자가의 수욕을 다 참으시고 온 세상을 위한 화해와 구원의 깃발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희망의 근거로 제시합니다.


다 함께 찬미를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로마교회는 강한 자와 약한 자, 유대인과 이방인, 할례와 무할례 따위 문제로 내부적인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화합이 절실한 시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 하여 한 마음 한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는 14장 1절에서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7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이십시오.”라고 재차 권고합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있고 교우 각자의 출신이나 성별, 나이, 생각도 각기 다릅니다. 한 핏줄인 가족 내에서도 의견이 갈려 심하게 다투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데 교회인들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며 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었고 다윗의 후손이셨지만 유대인들의 구원만을 위해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 사람들아, 주님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여라”(신 43:43)는 말씀처럼 유대인이나 모든 이방인이 조화를 이루어 주님을 찬양하는 데 이르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WCC부산 총회를 잠깐 참석해 다양한 교단에 소속된 각 나라 그리스도인들이 한데 모여 일치를 위한 회의를 할 때 벅찬 감격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자 모양과 색깔은 달라도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데 어울려 지구적 구원을 위해 연대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희망의 뿌리’이자 ‘샘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맛본 사람들로서 절망 가운데 있는 세상에 새 희망의 빛을 비추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모두가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충만히 받아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맡겨진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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