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솔샘교회 오신분들을 사랑합니다.




이름: 바위솔
2012/6/11(월)
생명의 면류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격분해서, 스데반에게 이를 갈았다. 그런데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고서,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바깥으로 끌어내서 돌로 쳤다. 증인들은 옷을 벗어서,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 <행 7:51-60>



순교 마케팅

 얼마 전 애양원에 잠깐 다녀왔습니다. 새 단장한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기념탑, 11명의 순교자 부조를 둘러보았습니다. 근처 축사에서 풍기는 돼지 똥 냄새만 빼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풍경입니다. 기념관 앞에는 관광차가 여러 대 주차돼 있고 내부에는 경상도 말씨의 외지 손님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엑스포 보러온 관광객들이 짬을 내 애양원에 들른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수시는 엑스포 손님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애양원에 백억 이상 들여 지금의 종교테마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예장통합 총회와 여수노회도 순교 기념탑과 순교자 부조 등을 세워 여기에 일조하였습니다. 애양원에 들른 엑스포 손님들이 본래 취지대로 “손양원 목사의 사랑과 순교 정신”을 새기고 간다면 거액을 투자한 공원조성에 크게 아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순교자 손양원 목사’가 어느덧 지역의 관광 상품으로 변질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여수시야 이미 의도한 바이기에 아무 문제의식을 못 느낄 것입니다. 여수에 관광객을 끌어와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허나 “순교자 손양원 목사의 사랑과 순교 정신”을 잇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좀 다르게 봐야할 것입니다. 박제된 종교 영웅은 좋은 볼거리는 될지 몰라도 그를 본받고 따르게 할 생명력은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최근 교계에서는 순교자 유적지 발굴과 기독교 성지화사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최초 성경 전래를 기념해 조성되는 충남 서천의 종교문화 박물관, 신안 증도의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전주 기독교 성지화사업, 광주 양림동 일대 선교유적지 조성사업, 여수 금오도 이기풍 목사 순교기념관, 광양기독교선교 100주년기념관, 경북 청송 엄주선 강도사 테마공원 등 가히 전국적인 현상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선교를 시작한 1884년 이래 2,600여명의 순교자를 배출하였습니다. 개신교보다 100여년 먼저 들어온 가톨릭의 경우는 대원군 시절 각종 박해로 무려 1만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가톨릭에 비하면 적은 수이나, 개신교는 짧은 박해의 시대를 경험한 것치고는 무척 많은 수의 순교자를 얻었습니다. 바로 6. 25전쟁 때문입니다. 한국전쟁 기간 극심한 좌우 이념대결 상황에서 수많은 기독교인이 순교하였습니다. 해방이후 북한이 공산화되자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하였고 그들은 반공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가령 제주 4.3항쟁 때 극우테러를 일삼아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의 상당수는 영락교회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처럼 공산당과 개신교의 악연이 깊어 가면서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가 선교 130년을 앞두고 이제 신앙의 흔적 찾기에 눈길을 돌리고 있습니다. 가톨릭이 오래 전부터 순교자들 시성시복과 현양사업에 열심이고 불교는 전통사찰 체험을 내세운 템플스테이로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서자 이에 자극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성장이 멈춘 개신교가 순교자들을 내세워 성도들의 신앙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으리라 봅니다. 어떻든 국가의 종교박해가 사라진 이 땅에서 순교자들을 재조명하고 전국 도처에 순교자 성지를 조성하려는 움직임은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순교신앙을 잘 살려내 잇기보다는 종교적 마케팅을 위해 교묘히 ‘활용’하는 데 치중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지금과 같은 무분별한 순교자 기념사업이 계속될 경우 개신교 발전에 득보다는 해악이 더 크리라고 봅니다. ‘순교신앙’은 거창한 기념사업으로 고취시킬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증언자

 스데반은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열두 사도가 뽑은 예루살렘 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파와 히브리파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파 유대인은 헬라어를 일상어로 말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고 히브리파 유대인은 아람어를 일상어로 하는 토박이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양대 계파 가운데 그리스파 과부들이 교회에서 구호 음식 받을 때 홀대받자 불평하면서 큰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구호 음식을 나누고 교회 재정을 관리하는 일곱 명의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이들을 보통 ‘일곱 집사’라 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들을 ‘집사’라 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호 음식을 배분하는 역할 때문에 본래 식탁 봉사자를 의미하는 ‘집사’로 잘못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스데반과 빌립 같은 인물의 사역을 보면 단순히 구호 음식 배분이나 교회 재정 관리 역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처럼 큰 이적을 행하고 아무런 제한 없이 설교도 합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하였습니다. 고로 사도들이 뽑은 일곱 사람은 집사라기보다는 그리스파를 대표하는 ‘일곱 지도자’로 보아야 적합합니다. 이들 일곱 사람의 이름 자체도 그리스식입니다.  

일곱 지도자 중에 가장 뛰어난 인물은 스데반이었습니다. 그는 구레네, 길리기아, 알렉산드리아, 아시아 등지에서 온 사람들과 성서논쟁을 벌여 번번이 그들을 설복시키곤 하였습니다. 이처럼 디아스포라 출신의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섭니다. 바울보다도 먼저 이방지역 복음화에 힘쓴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의 은혜, 능력, 지혜가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율법에도 밝아 누구든 그와 논쟁을 벌이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스데반을 시기 · 증오하던 자들이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의회에 고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하였고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의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악의적인 거짓이 섞였으나 이 고발에도 어느 정도 진실은 들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산헤드린 앞에서 행한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 “당신들은 시내 산에서 천사가 모세에게 전해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 않았다”며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을 공박합니다. 스데반은 그의 설교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직접 거명하진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을 신문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당신들이 예언자들이 오리라 예언한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다”며 예수님을 처형한 그들의 죄악을 환기시킵니다.

스데반은 이처럼 설교 말미에 이르러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게다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곁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인다”함으로써 신성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투석 형에 처해집니다. 적법 절차에 따라 사형을 하려면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합니다. 재판도 더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생략되었습니다. 레위기는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를 온 공동체가 돌을 던져 죽이라”(레 24:16)고 규정합니다. 그들은 이 신성모독 죄를 스데반에게 과도히 적용해 사형에 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데반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순교자를 의미하는 마르튀스(martus)라는 헬라어 단어는 본래는 ‘증인’이란 의미입니다. 주후 3세기경 박해 중에 숱한 그리스도인이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의 진실성을 증거하자 순교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이런 순교자의 대표적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셨고(딤전 6:13), 그 다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증인인 스데반이 피를 흘리며 죽어 갈 때” 자신도 그 곁에 있었고 그가 죽는 것을 찬성했었다(행 22:20)고 말합니다. 그는 이 스데반의 순교에 내심 크게 동요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 진리가 아니라면 누가 목숨을 내걸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늘 그리스도인의 증인된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순교자

 하지만 ‘순교’에도 주의해야할 함정은 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서머나 교회 감독 폴리갑(주후 156년)이 순교한 뒤부터 교회에서 순교자 기념과 과도한 공경 풍조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자의 유해를 신주단지 모시 듯 간직하고 순교자들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는가 하면 그들이 순교한 날을 기념하였습니다. 나중에는 순교 자체가 큰 영광으로 알려지면서 일부러 관리들을 자극해 교회에 무서운 박해를 가하게 만들고 스스로 순교할 기회를 얻는 자들마저 나타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증인이 되려다가 죽는 게 아니라 순교자가 되려고 부나방처럼 섣불리 죽음에 뛰어들었습니다. 이 같은 순교자들이 교회에 끼치는 폐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박해를 불러왔고 많은 무고한 죽음과 배교자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과열된 순교 현상에 대해 클레멘스나 키프리안 같은 교부들은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예전에 애양원 성산교회에 갔다가  어느 교회 학생회가 수련회를 하며 걸어 둔 “우리도 순교할 수 있다!”는 펼침막을 보고 깜짝 놀란 적 있습니다. 순교 자체가 무슨 신앙의 극치나 되는 듯 그것을 목표로 달려가자고 선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해입니다. 주님은 복음의 진실한 증인을 찾으시지 ‘순교자’를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순교자 가운데 순교자가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 애쓰다보니 사람들의 미움을 사 억울하게도 순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 정신에 따라 살고자 애쓰는 중에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것도 순교자다운 삶을 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주님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계 2:10)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나오는 ‘면류관’이 바로 헬라어로 ‘스테파노스’입니다. 곧 스데반의 이름 뜻이 면류관에 해당합니다. 순교자는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스데반도 ‘잠들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의 영웅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칼뱅과 삼위일체 논쟁을 벌이다 화형당한 세르베투스는 말합니다. “내가 화형대에서 불타 죽는 것은 하찮은 사건에 불과하다. 우리는 논쟁을 영원히 계속할 것이다” 권력자들은 순교자들을 죽여 그들 입을 어떻게든 틀어막으려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진리와 양심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믿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진실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름   메일   회원권한임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번호제 목짧은댓글이름첨부작성일조회
540   화해로 가는 길   바위솔   2012-06-24  1333
539   뒤바뀐 주인   바위솔   2012-06-17  1178
538   생명의 면류관   바위솔   2012-06-11  1584
537   생명 바람   바위솔   2012-06-05  1052
536   만물의 산고, 성령의 탄식   바위솔   2012-05-27  1373
535   가장 아름다운 땅으로   바위솔   2012-05-20  1194
534   선한 불화   바위솔   2012-05-13  1444
533   사랑하기에   바위솔   2012-05-01  1165
532   집요한 천착   바위솔   2012-04-25  1327
531   저 우상을 넘어   바위솔   2012-04-18  1207

 
처음 이전 다음       목록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