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김진호
2006/12/28(목)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시대단상] 무례함이 일상화된 교회는 민주화에 저항할 수 밖에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화려한 성탄 장식과 삭발한 목사의 머리

지난 21일, 한국 개신교 최대교단의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예장통합) 목사들이 영락교회에 모여 <개정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위한 총회 총대 비상기도회>를 열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자리에서 목사와 교장 등 20여 명의 삭발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전날에는 예장통합 측 목사를 포함한 30여명의 목사들이 삭발투쟁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이제 오늘, 크리스마스 전날 주일 예배를 드리는 여러 교회의 교인들은 자기네 목사‘님’들과 교장 출신 장로‘님’들의 빡빡머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하던 목사들이 어느 날 삭발하고 교회에 나타났을 때 술렁이던 바로 그 모습과 유사한 광경입니다.

이미 소식을 들은 교인들도 있겠지만, 필경 더 많은 이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주일 아침을 맞겠지요. 물론 모든 교인들에게 사태는 곧 파악될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교회의 화려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장식들의 번쩍거림이 목사, 장로들의 비장함으로 반짝이는 두상과 어우러지는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모든 교인들은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예장통합과 대한감리회 등 거대교단들의 비장함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거취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던 모양입니다. 19일 과거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다시피 했던 바로 그 기관조차도, 사립학교법 재개정에 무게를 실은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날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 등이 사립학교법 재개정 투쟁을 재차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고 하니 한국의 개신교는 이제 거의 한 방향으로 통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지경이니 삭발한 목사님네들의 행동은 가히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한다고 할 만합니다. 교회에 가득 울려퍼지는 그 영광송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감사의 찬양일 뿐 아니라 동시에 삭발한 목사님들의 의기에 대한 기림이겠지요. 그것에 누구는 눈물을 흘릴 것이고, 또 누구는 침이 튀도록 우렁차게 통성기도를 드릴 것입니다.

일방적 종교교육 "불신자를 격파하라"

지난 9월 16일, 서울외국어고등학교의 1,2학년생 전체는 강당으로 모이라는 방송을 듣습니다. 특별활동을 하도록 배정된 시간인데 무슨 일인가 하는 마음으로 강당으로 올라간 학생들은 입학 이후 처음 경험한 낯선 광경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대 위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엘샤다이’ 찬송가를 배경으로 춤을 추는 오프닝 이벤트는 낯선 놀라움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날의 온갖 특이함 중에서 제일가는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태권도 시범이었습니다. 시범자들이 송판을 격파합니다. 근데 그 송판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사탄’, ‘미신’, ‘무교’ 등. 그리고 격차 순간 장중한 목소리로 나래이션이 깔립니다. “원죄의 결과는 죽음뿐.” 그리고 강연자는 강연 도중에 기도를 함께 하자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기도말을 외칩니다.

미션스쿨이 아닌 학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한데 행사가 끝나고 교장이 무대 위로 올라와 충격적인 말을 전합니다. “이 강연은 대 서울외고가 미션스쿨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게 개신교계 학교의 실상입니다. 다소 과장된 예일지 모르나, 한국의 개신교계 사학들의 종교교육은 이 광경에서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억지로라도 예배에 참여하게 하고 듣게 하고 보게 하고 외우게 합니다. 그러면 당장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삶의 기로에 선 순간이 왔을 때 회심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논리가 저들의 강권적인 종교교육의 배경에 깔린 확고부동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씨를 뿌렸는데 끝내 회심하지 않는 것은 그 받는 이들의 존재의 터가 나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저들의 종교교육의 배경이 되는 교육관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교육은 ‘독백적’입니다. 대화하고 토론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 이질적인 생각들이 교차하고 타협하며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적대시하여 강권적으로 억제하고 오직 하나의 생각, 하나의 태도, 하나의 신앙만을 반복적으로 수용하게 하는 식의 교육인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양상은 학교라는 현장에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한국의 개신교 일반의 선교적 태도이기도 합니다. 아무도 듣는 이 없는 가운데서 홀로 열기에 차서 독백하는 ‘거리의 십자군’들의 모습은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자리잡고 있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례함이 일상화되어버린 한국교회, 연애도 안해봤는지

한데 도대체 이런 무례한 종교가 한국에서 왜 그렇게 성공하고 있을까요? 교회 중에서도 특히 무례한 성향의 교회가 더 성공적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왜 한국의 개신교는 타인의 취향을 무시하고, 타인의 스케줄을 무시하고, 타인의 의사를 무시함으로써 성공하는 무례한 자들의 종교가 되어야 했을까요?

다소 시끄러운 커피숍의 옆자리에서 한 청년이 선배인 듯한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청력이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되는 나로서는 그의 말소리를 세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체로 그 청년의 여자 친구가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아 괴롭다는 내용인 듯 했습니다. 반면 선배라는 이는 그 주절거리는 청년과는 너무나도 다른 태도로 큰 소리로 명쾌하게 충고를 하더군요. 나는 그의 말소리를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덮쳐버려!”

어쩌면 우리가 사회 속에서 분명하게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이런 일방적이고 강권적인 연애관과 같은 모습일지 모릅니다. 상대방의 생각, 상대방의 상황, 상대방의 느낌 등을 유념하기보다 자신의 목표만을 위해, 그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놓고 전력투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소리인지도 모릅니다. 해서 그러한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독백적인 일방적 강권의 문화를 일상화시켜 놓았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일상화되었다’라는 말은 생각보다 무서운 표현입니다. 왜냐면 일방적이고 강권적인 공세를 펴는 이뿐 아니라, 그러한 공세의 대상이 되는 이들도 그러한 일방향성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왠지 모르는 편안함을 줍니다. 물론 일방적인 공세는 불쾌감을 낳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 켠에선 그것이 편안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호한 마음이 오늘 한국인의 일상화된 심성인지도 모릅니다.

독재를 거친 백성들의 식민화된 자의식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식민지 시절부터 이미 익숙해졌던 심성이 해방 이후 근대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더욱 심화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러한 문화적 감수성 때문에, 한국에서 근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급성장한 종교가 바로 그러한 일상화된 식민화된 심성과 잘 맞아 떨어진 모습을 가진 개신교가 된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도 크게 무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개신교는 선교 초기부터 그러한 성향을 지니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 적응해간 면도 있습니다.

민주화에 저항감 느끼는 교회, 그래도 대화해야

교회가 개정된 사학법에 그토록 반대하는 이유는 건학이념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저 일방향적 종교교육이 간섭받을지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관련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개신교의 감수성이 일방향성에 극도로 익숙한 양태를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 대화하는 것 자체를 수용할 수 없는 태도 말입니다.

하여 대화적 체제를 지향하는 민주화에 교회는 저항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론을 미리 전제하지 않는 대화주의적 태도를 교회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인 정답을 안다는, 바로 자기 자신만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신념과, 그러한 신념을 놓고 다른 이와, 다른 이의 신념이나 감수성과 대화한다는 것 자체를 신앙적 모독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익숙한 심성을 가져왔던 무례함의 문화가 민주화를 거치면서 급속하게 붕괴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민주화가 배려의 문화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전통적인 무례함의 틀이 붕괴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무례함이 일상화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길게 얘기할 수는 없고 다른 기회에 이에 대해 좀더 얘기하겠지만, ‘시장화된 무례함의 체계’라고 나는 이 새로운 무례함의 문화를 부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무례함의 체계에 우리 모두는 또 다시 익숙해져가고 있습니다. 하여 전통적인 무례함의 문화를 대표하는 교회와 새로운 무례함을 대표하는 이른바 민주화된 사회의 주역인 시민이 경합을 벌이는 양상이 작금의 종교를 둘러싼 문화전쟁의 실체라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를 맞는 나는 매년 복잡 미묘한 심사에 빠집니다. 그것은 주님의 오심이 ‘우리를 향한 신의 배려’라는 나의 믿음과, 오늘도 예외 없이 무례한 자들이 벌이는 잔치에 다소간 세뇌되어버린 나의 감수성이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엔, 우리 사회가 어떻든, 우리 개신교가 어떻든, 또 나의 교회가 어떻든 간에, 내 주위의 다른 감수성의 그(녀)들과의 대화를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모습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나아가 예수님의 형상을 읽어보려 합니다.

 

입력 : 2006년 12월 27일 16:11:54 / 수정 : 2006년 12월 27일 16: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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