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김창락
2006/1/16(월)
내가 걸어온 길..- 배움과 관련하여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가난한 농촌 마을이었습니다. 50호도 채 못 되었으니까 아주 조
그마한 마을이었지요. 논 20여 마지기 가진 사람이 마을에서 첫째가는 부자로 꼽힐 정도였으니까 참으로 가난한 마을이었지요. 그나마 우리 집은 농토라고는 밭 400평 밖에 없었으니까 가난은 숙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사회과 시간에 각 마을의 가옥 형태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우리 마을만이 기와집도, 양철 지붕집도 단 한 채도 없는 마을이라는 사실을 그 때에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 전체에서 예수 믿는 집은 우리 집과 우리 외가 두 집뿐이었습니다. 나의 신앙
의 기본 바탕은 우리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믿음이 독실하
시고 교회와 이웃을 돕는 데 헌신적인 분으로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는 분이었습
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글을 익히기 전
에 나를 앉혀 놓고 그림 성경을 가지고 창세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요한 계시록에 이르
기까지 매일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의 기독교 신앙의 기본 바탕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 나의 성격
발달에 많은 장애가 생기게 된 것 같습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2, 30명밖에 안되는 실로 조그마한 학교였습니다. 졸
업 후에 상급하교에 진학하는 학생도 2, 3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4, 50리 떨어
진 T시에 있는 한 중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에 6,25 사변이 일어났습니
다. 전쟁 때문에 1년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복학 할 때에 어쩔 수 없이 나는 1년 후
배들과 한 반에서 공부해야 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인 관계를 꺼려하는 소극적 성격이 형성된 것 같습니다.

문학에 특별한 소질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대학은 영문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정말
로 내가 연구하고 싶은 학과는 신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학은 신학교에 가서 전문적
으로 연구하기보다는 밖에서 아마추어 정신으로 자유롭게 연구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
라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에는 신학의 기초 과목이 되
는 여러 가지 고전어 공부에 힘을 쓰면서 종교학 과목을 부전공으로 택했습니다. 또 장
차 직업적으로 국어학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언어학 계통의 강의도 부전공 수준으로 많이 들었습니다.

3학년 재학 중에 학보병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복학하였습니다. 그 때에 나는
이미 그 전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 근무할 동안에도 나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신
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대를 하고 대학에 돌아왔을 때에 나는 나의 기독교 신앙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방황했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
는 기독교 교리가 현재의 내 실존적 물음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독교와 완전한 결별 선언을 할 정도의 용기는 없었지만 기독교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은 완전히 식어버렸습니다. 6학년 때에 4,19가 일어났고 그 물결
에 이끌려 다녔습니다.

졸업 후에 O시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2년간 교편을 잡았습니다. 무엇인가 새로 시작해
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스스로 사표를 제출하고 K대학 대학원 철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실
존적 물음으로 정신적 방황을 하고 있는 처지이기 때문에 실존철학을 전공하고 “싸르뜨
르의 자유 개념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논문으로 과정을 마쳤습니다.

대학원 한 학기를 마치고 서울 D고등학교에서 다시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64년 8월
에서 73년 7월까지 근 10년 간 봉직했습니다. 이 학교에 재직하는 기간 중에 내 평생의
삶의 진로를 결정짓는 중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학교에 대학 선배 한 분이 계셨는
데 그 분은 나중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봉직하고 정년 은퇴하신 나학진 교수님
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나를 끌고 종로 4가 세운상가 4층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가
서 비로소 알게 되었지만 거기는 중앙신학교라는 야간 신학교 강의실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어느 강의실에 밀어 넣으면서 한 번 들어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신학을
하려다가 중도에 포기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중앙신학교에는 독
일에서 돌아오신 허혁 교수와 안병무 교수가 강의를 전담하고 계셨습니다. 그 날 저녁
에 처음 들은 과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허혁 교수의 강의였습니다. 한 시간 강의를 듣고
서 나서 나는 신학이 이러한 학문이라면 다시 해 볼만 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곧바로 교
무과로 가서 입학 절차를 밟았습니다. 이것이 직업적 신학의 길로 들어서게 된 첫 걸음
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안병무 교수와 허혁 교수는 두 분 다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 노
선에 서 계셨기 때문에 나의 실존철학적 바탕과 궁합이 아주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나는 이 새로 접하는 신학에 희열을 느꼈습니다. 대학에서 이수한 신학 과목 학점을 인
정받아 3학년에 편입했기 때문에 4하기를 공부하고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졸업한 후에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최대의 목표는 불트만 신학을 좀 더 연구하는 것이었습니
다.

독일로 간 때는 73년 9월이었습니다. 독일에 도착하니 국내에서는 전혀 알지 못하던 사
실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4월에 있었던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 최종길 교수 사
건의 진상, 김대중 선생 납치 사건의 내막 등등에다가 73년 말부터 국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관한 소식을 실상 그대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74년에 서
독에서는 국내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운동 단체가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되
었습니다. 나는 여기에 참여하는 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사회 문제와 역사의식에 눈을
조금씩 뜨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 나는 비로소 내가 그토록 심취해 있던 실존신학이라
는 것은 부르조아 지식인들의 호사스러운 지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
었습니다. 서독 신학생들 중에서 제3세계 문제, 남미의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등 진보적
인 신학운동에 열중하는 동료들과 교제하게 되었습니다. 80년 광주 사건은 나의 신학 여
정에 또 한 번 결정적인 변화를 불러 왔습니다. 나는 그 때에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
던 학위 논문을 내 던져버리고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여 새로운 주제의 논문을 쓰기 시작
했습니다. 논문 제목은 “갈라디아서에서 복음을 위하여 벌인 바울의 투쟁”이었습니
다. 논문 제목에 ‘투쟁’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것은 그 당시의 우리의 역사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분수에 넘치게도 84년 3월에 한신대학교 신학과 전임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습니
다. 그 동안 별로 이렇다 할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2001년 8월에 정년 퇴임을 하였습니
다. 해 놓았어야 했을 일들 중에 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있는 듯한 중압감에 짓눌려 지내는 심정입니다. 지탱할 힘도 없는 주재에 또
하나의 벅찬 짐을 떠맡으려고 나선다는 것이 주재 넘은 일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인생 여정에는 위대한 사람의 찬란한 성공담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사람의 시시한 경
험담도 때로는 쓸모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없이는 감히 부끄러운 만용을 부리지 못
할 것입니다.





나는 일제 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을은 지금은 어엿이 시로 승격되었고 큰 규모의 대학들도 몇 개 들어서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내 어릴 적에는 비록 거기에 군청이 소재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2층 건물이라고는 단 하나 밖에 없었던 낙후한 시골이었다. 이 유일한 건물은 경찰서 본관이었다. 장날이 되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읍내로 장 구경 갈 때에는 이 경창서 앞을 지나면서 그 어마어마한 건물을 바라보고 감탄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의 하나였다. 이 건물을 바라볼 때마다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이 건물의 건축과 관련된 숨은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우리 고을에서 으뜸가는 부자는 O씨 일가였는데 이 O부자가 이 경찰서 건물을 무상으로 지어서 기증했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국민학교(그 때에는 그렇게 불리었다)에 들까 말까 한 정도의 나이 또래인 우리 어린이들서는 건축비가 얼마가 되었는지를 셈할 수 있었을 턱이 없다. 다만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이런 어마어마한 건물을 짓는 데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을 터이고 이 건물을 공짜로 지어준 O부자는 과연 어마어마한 부자로구나 하는 사실 확인 그것이었다.

O부자의 재산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되었는지 우리 어린 아이들이 알았을 턱이 없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우리 주변의 모든 임야들이 O부자의 소유이고 눈에 띄는 인근의 큰 과수원들이 모두 O부자의 소유라는 것 정도였다. O부자는 재력뿐만 아니라 권력도 소유했다. 그 당시에 군수 자리는 일본 사람 몫이었으니까 제외하고 군청 소재지의 면장 노릇을 했으니까 우리 고을에서 조선 사람에게 돌아오는 최고의 요직을 차지한
셈이다.

면장이 된 답례로 경찰서 건물을 지어준 것인지 경찰서 건물을 지어준 공로로 면장으로 임명된 것인지는 우리에게는 모를 일이었다.

이 O부자와 관련된 일 중에서 평생 동안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서 내 자신의 정체에 대한 물음을 되새기에 하는 것이 하나 있다. O부자 가족들은 매년 한 두 차례 사냥 행차를 벌였다. 이 사냥은 우리 마을 뒷산인 그들 소유의 산에서 멧돼지나 노루 꿩 등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우리 마을 한 복판을 가로질러 가게 되어 있었다. 그들의 행차는 우리들에겐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그들은 저마다 이상한 나라 사람의 복장에다 깃털이 달린 모자, 번쩍번쩍하는 감정 장화, 머리 위로 치솟는 엽총을 둘러메고 번지러한 이름 모를 갖가지 외래종 사냥개들을 수십 마리 몰면서 위풍당당하게 지나가는데 그들 뒤에는 수 십 명이나 되는 몰이꾼들이 뒤따르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은 빈촌 중의 빈촌이었던 탓에 외래종 개를 기르는 집이 한 집도 없었다. 그래서 이 사냥 행차 때에 평소에 보지 못하던 이런 저런 외래종 사냥개들을 보는 것은 우리들에겐 큰 구경거리였다. 이 개들은 모두 부자 주인을 잘 만난 덕택으로 잘 먹고 번질번질 윤기를 내었다. 그 당시는 일제의 태평양 전쟁 기간이라서 춘궁기에 농촌에서는 대다수 농민들이 초근목피로 겨우겨우 연명해야 하는 처지였으므로 집에서 기르는 개에게 먹을 것이 돌아갈 수 없었다. 가엾게도 그들은 어린애들이 누는 똥이나 먹고 살아야 하는 문자 그대로 똥개 신세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마을 빈 밭을 힘차게 뛰어다니며 놀았고 행여 마을에 낯선 사람이라도 나타나면 일제히 힘차게 짖어대는 마을 지킴이 역할을 잘 해 주었다. 그렇지만 O부자네 사냥 행차 때에는 그 위풍당당한 외래종 사냥개들의 위세에 눌려 모두 꼬리를 내리고 비실비실 한 쪽 구석에 숨어버리는 것이었다.

부자들의 지킴이 노릇을 해 주는 대가로 잘 먹고 잘 살아가면서 위세를 떨치는 외래종 사냥개들과 가난한 농민들 편에 서 있으므로 기를 펴지 못하는 재래종 개들의 대조되는
두 광경은 내 눈 앞에 언제나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은 이른바 고급 지식인이라는 것은 가진 자들의 주구 노릇을 하면서 그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아가는
사냥개와 같은 존재는 아닌가 하고 자신에게 되묻게 한다.





우리는 그 때 그랬다. 너를 악의 세력이라 규정했다. 싸웠다. 투쟁했다. 이를 인권운동이라 했고, 또 민주화 투쟁이라 했었다.
그게 뭔가? 그 운동, 그 투쟁의 알갱이-핵이 뭔가?
5 ․ 16 쿠데타 세력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이라 하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했다. 실제 그들은 그랬다. 반공전선을 강화하였다. 수천년 이어오던 보릿고개를 사라지게 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풍요의 토대를 놓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입으로 후~~ 불어 만든 풍요라 비판하더라도 그렇다. 그랬기에, 단군이래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꼽으라 하면 박정희 전(前)대통령이 세종대왕이나 백범선생님을 크게 제치고 으레 1위에 오른다.
위기에 떨어진 당을 구할 구원투수로 그의 딸을 급히 내세운 것도 바로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대중의 향수에 기대려는 것일게다.
그러나 나는 그 때, 그의 세력을 악의 세력이라 규정했던 입장을 수정하지 않는다. 그를 내세우는 저들은, 그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허나, 대중의 이동이 이루어진다는 데는 내 가슴에 먹구름같은 슬픔이 깔린다.
전두환은, 박정희를 이어 정권을 거머쥔다. 정의사회구현을 봉기의 명분으로 내세웠던가. 그에게는 점수를 줄 대목이 없지 않다. 이승만-박정희를 이어져 왔던 장기집권야욕을 끊어낸 것이 그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지만, 하여간 그 이후 법이 정한 대통령의 임기는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들을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두 전(前)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권위주의 통치세력을 악의 세력으로 여전히 규정하는 것은 왜인가? 설명이 필요없다. 그들 통치에 「인간존엄」이 있지 않았다는 너무나 중대한 사실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온갖 노력의 목표는 「인간존엄」이다. 반공, 가난퇴치, 단임제 등도 그 철학이 「인간존엄」이라고 반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규정을 무르지 않는 것은「인간존엄」의 결과를 내오기 위해 「인간존엄」을 짓밟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인간존엄」철학이 없다는 증좌다.
이른바 “구국”적 계획을 성취해 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발생했었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했던가! 재판에 회부되었던가! 감옥살이를 했던가! 아니, 그렇다! 사형을 당했던가!
얼마나 많은 공순이, 공돌이들이 잔혹한 착취를 당했던가! 얼마나 많은 빈민들, 세입자들이 집을 잃고 저 변두리로 밀리고 또 밀렸던가!
어느날, 갑자기 폭도의 도시가 되어버린, 그래서 병신이 되고, 아들 딸을 잃게 되고, 죽임을 당하고, 또 죽임을 당한 저 광주의 절망은 얼마나 깊었던가!
「인간존엄」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악의 세력이라 규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싸웠다. 그래서 투쟁했다. 거창양민 학살사건, 4 ․ 3 제주-모두가 집권자의, 당시로는 당연한 구국적 계획만 일삼던 반 「인간존엄」이었다.
예수의 시대에 일주일의 마지막 날을 쉬는 법이 있었다. 이 날을 안식일이라 했다. 그 법은 절대법이었다.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사안이었다. 먹고 살 것 있고, 모든 것이 여유로운 사람에게는 얼마나 낭만적이었겠나.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이 코앞에 오면 숨이 막혔다. 좀더 일해야, 그래야, 당장의 문제를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을 것인데 또 안식일이 온 것이다. 그러나 하던 일을 멈추어야 했다. 집권자들의 감시와 처벌이 무서웠다.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날 밀밭을 지나가게 되었다. 배가 너무 고팠던 제자 몇이 밀을 훝어 입에 털어 넣었다. 감히 그리했던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들을 감시의 눈으로 지켜보던 집권자들이 예수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당장 덤벼들었다. 그 때, 예수는 그야말로 천지가 진동하는 명언을 쏟아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
절대계율인 안식일조차도 「인간존엄」의 다음자리로 밀어낸다.
그렇다! 사람이다! 사람이 중요하다!
모든 것이 사람이 존엄해지자고 있는 것이려니. 주와 객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지난 시기의 독재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것때문이리라. 이것은 크게 옳은 것, 누구나 그 옳음을 거스를 수 없는 것, 大義다.
오늘, 우리는 권위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다행이고 또 다행이다. 우리는 인권투쟁의 시대, 민주화 투쟁의 시대를 거쳐왔다. 이제는 그것들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살아 작용하는 시대를 만들라 하고 있다. 그것이 개혁!이다.
개혁의 목표도, 이루어가는 과정도 「인간존엄」이어야 한다. 행여 목표는 그러하나, 그 목표가 하도 옳고 당연하여 이루어가는 과정에 사람 한사람한사람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해도 용납되리라 여겨서는 안된다. 그럴 수 없다.
며느리가 나쁜 시어머니를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어느새 시어머니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독재와 싸우다가 독재를 배우게 될 수 있다. 반「인간존엄」의 국가통치와 싸우다가 반「인간존엄」에 익숙해질 수 있다. 이리 되어서는 안된다. 절대 안된다. 우리 자신의 행보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은 「인간존엄」을 완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방법과 과정도, 똑같은 「인간존엄」이어야 한다. 이것은 쉽지 않다. 어렵고 더디고 답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 좀 느려도, 좀 더디어도, 좀 답답해도, 그래도 그래야 한다.
개혁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개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값을 개값만큼도 치지 않은 저들에 대해 지금도 우리는 분노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무리이기에, 사람을 소중히 하는 방법으로 오늘을 개혁해 나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열이 희생되더라도 거기 끼어드는 한 도둑을 어서 기필코 잡아야 하겠다 해서는 안된다. 어렵고 힘들고 더디고 답답하더라도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도둑을 잡는 것이 옳은 길이다. 오늘은 이것이 대의大義다. 개혁과 「인간존엄」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나는, 글쎄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겠지만, 「인간존엄」을 택하리라. 우리 앞으로 험했던 지난 날을 거쳐온 우리는 그리하리라!





그랬습니다.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일제시대는 남의 나라가 통치했던 시대이었으니까 그랬었다 합시다. 그러나 해방이후에도 우리는 줄곧 가난했습니다. 6.25직후가 제일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문제이었습니다. 세 끼 밥도, 철따라 입을 옷도, 등 펼 구들도 모두 우리에겐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월남전쟁에 나가겠다고 지원했겠습니까? 자칫 하면 황천객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도 그래도 총 매고 흰 장갑 끼고 당당히 떠났던 것이었습니다. 중동의 건설현장에도 우리는 머리에 수건 쓰고 달려갔습니다. 거기서 온갖 고통을 이겨냈던 과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태양열이 너무 뜨거워 모두가 바닥에 쓰러져 낮잠에 떨어져도 우리는 사막에 크레인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대도시로 밀려온 공순이 공돌이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소모품에 불과했습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렇게 하여 모은 돈을 시골의 부모님께 송금했습니다. 팔이 짤려 나가면 그것으로 그의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이 되고 맙니다. 그래도 또 다른 우리가 그 자리에 섭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그 긴, 길고 또 긴 고투 끝에 오늘의 풍요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온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댕기며 외칩니다. 1970년 전태일입니다. 그것이 분기점이었습니다. 30년이라는 긴 시간을 투쟁하여서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풍요라는 것도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좋은 집에 산다고 으스댈 처지가 아닙니다. 빨리 다 잡을 데를 다 잡아도 안심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노동자의 인권문제도 이제 그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노동자의 힘이 너무 커졌다 하지만 평균을 낸다면 훨씬 미치지 못한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오늘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외국인 노동자 문제 아닙니까?
그들이 누굽니까? 60년대 70년대 우리 아닙니까? 월남으로, 중동으로 나갔던 우리 아닙니까? 그들의 처절한 희망, 아픈 꿈을 누구보다 뜨겁게 껴안을 수밖에 없는 과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를 이렇게 하다니. 안됩니다! 안됩니다! 이리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물론 외국인 노동자들의 도덕적 인간적 완전함에 근거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힘없는 자들을 편드신 것도 도덕적 잣대를 드리대 그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소외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사건에서 우리는 그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출애굽사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에집트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노역장을 일시에! 일시에! 떠난 사건입니다. 에집트의 산업기반이 일시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재앙 아니었겠습니까!
우리가 그리해서도 안되지만, 그리하면 우리도 재앙에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물론이고 모든 종교가 나서서 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종교를 가진 기업인, 정치인, 노동자가 모두 나서서 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패숀 오브 크라이스트, 마리아를 주목해 보자

아마도 장삿속 이었으리. 어느 영화배급사가 기독교 국가 중에서도 몇 국가를 찍어 영화필름 하나를 배급했다 한다. 그것도, 기독교가 지키는 사순절과 예수의 수난주간에 맞추었다 한다.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지금 상영 중에 있다. 패숀 오브 크라이스트 (The Passion of Christ). 우리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기독교인들은 극성스러워 그 열심이 기독교 국가의 교인들을 뛰어넘는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 같다. 아시아권에는 우리나라와 필리핀이 배급리스트에 끼어 있을 뿐이다. 필리핀은 기독교 국가니까 그랬을 테지만.
나는 사순절과 수난주간을 피해서 관람했다. 그 기간에는 영화관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교회적일 것 같아서였다. “주여! 아멘!” 이런 소리가 제법 크게 여기저기서 새어 나온다는 소문도 있어서 관람을 미루었었다.
자리를 잡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여니 영화관람 때와 특별히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비교적 젊은이들이었다. 연인들로 보이는 이들도, 항상 그랬듯이 많이 보였다. 특별한 영화를 특별한 이유로 관람하러 온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영화도 보러 오는구나. 모두가 교인일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영화는 예수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부터 시작하여 최후의 만찬-예수의 갈등과 기도-체포당하심-재판-고문-십자가-부활하여 제자에게 나타나심 등 예수의 마지막을 비교적 성서에 근거하여 구성했다.
초점은 물론 예수에게 있었다. 그가 체포를 예견하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시는 장면, 체벌을 받는 장면은 어느새 관객의 두 눈을 뜨겁게 하고도 남았다. 살집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것은 음향효과와 함께 우리의 눈을 감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육신의 한계를 넘어가 버렸는데도 그 무거운 십자가 형틀을 지고 처형장까지 오르라 한다. 아니, 예수가 스스로 끝끝내 지고 간다.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 없는데도 마치 자학증 환자처럼 친히! 친히! 지시고 가신다.
드디어 십자가 형틀에 묶이고 두 손바닥과 겹쳐진 발등에 못을 친다. 누구라서, 이 장면을 뜬눈으로 볼 수 있을까!
그때쯤 관객은 영화 첫머리에 흘러간 글이 떠올렸으리라. 나는 그랬다.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이사야 53장 9절-

예수의 고통, 슬픔을「예수의 수난」이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 그렇다, 심연보다 깊은 깊이가 거기 있도다. 그렇기에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있다. 아, 예수다! 흔히 목에 걸거나 옷깃에 달고 다니는 십자가 형틀은 거기 걸릴 만큼 가볍지 않다. 천근, 만근, 천만근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아, 예수님!

조연 마리아가 있어 주연 예수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예수의 그 수난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는 여인을 다른 카메라로 따라잡아 보여준다. 어머니 마리아다. 어느 한 순간에 짧은 한마디를 아들에게 준 것 말고는 그에게 배당한 대사는 없었다. 그러나 백 마디 말보다 더 감동적이고 격정적인 전달이 우리에게 부딪쳐 오고 있었다. 아들의 수난을, 그것도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그렇게 모조리 따라갈 수 있을까! 아들의 고통만큼이나 무겁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니, 어쩌면 아들의 고통보다 더 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들은 자신의 소명을 그렇게 이루려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는 아들의 소명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있었을 뿐이 아니겠는가! 아들의 의지에는 분명 미치지 못하였으리. 그러나 그녀의 눈은 무거웠다. 고통에 찼다. 그러면서도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찼다. 기도 자체였다. 마리아의 위대함! 아니, 마리아가 그 수난의 자리에 그렇게 버티고 함께 있어, 그렇게 눈 지킴을 놓지 않았기에 예수는 마지막 말

“다, 이루었다.”

를 토해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마리아는 조연자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모든 관객의 가슴에 마리아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내 머리에 슬며시 낙엽 하나가 구른다. 나는 시간이 허락하면 음악을 듣는다. 안락한 의자에 될 수 있는 대로 편한 자세로 즐긴다. stabat mater는 단골메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함부로 들을 수 없겠구나. 다리 뻗고 등을 적당히 눕히고 쾌적한 분위기를... 그렇다고 두 무릎을 꿇고 음악을 들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러니 안 듣게 되겠구나.
서구의 종교 음악가들은 예외 없이 똑같은 곡명 stabat mater를 작품했다. 가브리엘 포레, 팔레스티나, 쉬츠, 비발디, 페르골레시, 스칼라티, 로시니, 보케리니 등이 모두 그러했다. 내가 즐겨듣는 팔레스니타의 곡 중에 이런 작(作)이 있다.

스타바트 마테르 돌로로사 룩스타 그루쳄 라크리모사
stabat mater dolorosa luxta cruccem lacrimosa
슬픔의 성모 서 있다 울며 십자가 곁에

이 짧은 한 마디가 패숀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160분의 길이로 전해 온다. 어디 160분뿐이겠는가! 마리아가 있어 예수는 그 엄청난 고통을 수난할 수 있었겠다.

우리 사회에도 마리아가 있는 것이겠거니. 조용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있어, 사회가 위태로워 보이지만 중심을 잡아 간다. 너와 내가 모른체 하지않고 응시하는 마리아 역을 자임하자.



조기 은퇴를 결정한 후 만나는 사람마다 은퇴 후에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다. 은퇴 후에도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은퇴 후 특별히 할 일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목사 정년 70세까지 꽉 채우려고 한다. 실제로 많은 목사들이 은퇴한 후에 무료한 시간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바쁘게 일할 때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은퇴하여 3개월만 지나면 그 남는 시간을 어떻게 메워야 할지 막막해 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려워한다.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고 있으면 죄를 짓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그러나 이런 강박관념은 산업사회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겠다. 그 이전에는 환갑 정도 나이만 되면 자손들의 공경을 받으면서 오히려 떳떳한 노후를 보냈다. 현대에 이르러는 수명이 늘어나고 건강이 좋아지면서 사람들은 늙어서도 무엇인가 일을 하려고 기를 쓰고 있다.

목사가 은퇴한다는 것은 그 개인에게 있어 큰 변화를 가져온다. 평생 접촉하며 사귀던 교인들과의 만남이 끝나게 되고, 대외적으로 불려 다니며 회의도 참석하고 설교나 강연을 하던 일도 끝나게 되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던 이름이 점점 잊혀져 가는 외로움을 맛보게 될 것이다. 매 주일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할 때의 그 흥분과 뿌듯함을 잊을 수 없어 옛 기억을 반추하며 쓸쓸해 할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때로는 사람이 그리워 누가 찾아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기도 할 것이다. 많은 목사들이 이런 일들에 익숙지 않아 은퇴 후에도 기를 쓰고 일을 만들어서 바쁘게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은퇴 후에 만나는 이런 외로움과 적적함은 반드시 나쁜 것일까? 우리는 꼭 죽을 때까지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가?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갈 때일수록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도시의 시끄럽고 분주하였던 삶 때문에 눈뜨지 못하였던 나의 영성이, 은퇴 후 한가하고 조용한 시간을 만나면서 새롭게 눈을 뜨고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영력을 얻게 될 수 있지 않을까?

70세 정년이 되어 은퇴하는 어떤 큰 교회 목사님이 인사말을 하면서 은퇴를 영어로 ‘retire'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동차가 경주하다가 중간에 타이어를 바꾸어 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이제부터 인생의 바퀴를 갈아 끼우고 새롭게 출발하겠노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 하겠다는 뜻이다. 그 목사님의 경우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바퀴를 갈아 끼운다는 말은 맞는데, 문제는 이제부터 달리는 길은 지금까지 달려온 길과 다르다는 점이다. 즉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달려가고자 바퀴를 갈아 끼우는 것이다.

은퇴 후에는 죽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이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잠들어 있던 내 영을 깨워 하느님께 보다 가까이 다가가며,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보며, 주님의 말씀을 보다 분명하게 들을 수 있기 위하여 준비함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 은퇴로 말미암아 조용해진 삶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은퇴는 이 땅의 삶에서의 퇴장이며, 영생으로 나가기 위한 준비의 때이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솔로몬의 영광으로 입은 옷이 들에 핀 한송이 백합화보다 못하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도시문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솔로몬의 영광은 찬란한 도시문명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은 한 마디로 그 영광이 들에 피는 백합화의 영광만도 못하다고 하심으로 인간이 이룩한 도시문명이란 보잘 것 없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솔로몬이 그렇게 애써 이룩한 영광이 들에 잠시 피었다 지는 백합화의영광보다 못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찬란한 문명이 꽃피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 왕 때에 확장된 영토를 유지하면서 상업을 발전시켜 경제적인 부강을 이룩하였다. 그는 은을 돌같이 흔하게 사용하였고, 고급 건축재인 백향목을 뽕나무처럼 지천으로 사용하여 화려한 성전과 자기 궁을 건축하였다. 이런 경제적인 부강은 자연 도시 문명을 낳게 하였다. 그는 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켜 화려한 성전을 비롯하여 왕이 거처할 궁과 여러 위성도시들을 건축하고 요새화하였다. 그는 대단히 화려하고 사치한 생활을 하였다. 그의 보좌는 상아로 만들어 금을 입혔고, 그가 사용하는 그릇은 모두 금이요 은이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솔로몬은 문화적으로도 눈부신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는 구전된 많은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겼고, 음악과 시편 영창을 제의(祭儀)에 도입하였고, 또 수 많은 잠언을 남겼다. 그는 이제까지 부족동맹(部族同盟) 형태로 남아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완전한 왕국으로 변모시켜 강력한 군주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이런 솔로몬의 영광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 발전은 그 사회 안에 계급적 분열을 가져왔고, 민주적이었던 부족사회는 사라지고 군주국가가 되었으며, 과다한 건설공사는 많은 강제노역 동원을 필요로 했고, 이는 자유롭게 살던 민중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뿐만아니라 과다한 지출을 메우기 위한 과세가 민중들에게 과중하게 부담되었다. 결국 이런 문제들 때문에 솔로문이 죽은 후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화려한 문명의 뒤안길에는 수많은 민중의 아픔과 고통이 있게 마련임을 아신예수님은 그것의 화려함이 들에 피는 백합화보다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고 하시므로 우리가 몰두해 있는 현대 도시문명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 그 역사를 통찰할 것을 요청하셨다. 그것은 동시에 도시문명이 앗아간 자신의 영혼을 되찾으라는 말씀이 기도 하다.

문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 사회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그 문명과 더불어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오래 전부터 받아왔다. <25시>의작가 게오르규는 한국 민족이 내부의 성(城) 즉 영혼을 가진 민족이라고 추켜세웠지만, 밀려오는 문명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성도 방치된 옛성처럼 점차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 심각한 파멸의 징조가 나타나기 전 종종 문명에 찌든 도시를 떠나 조용한 자연의 품에 들어가 기계문명이 짓밟고 간 자신의 영혼을 되살리고, 그 영혼의 창을 통해 비쳐지는 세계를 관조할 수 있을 때 이 사회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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